제8장 편조왕사 신돈의 개혁(3)
* 개혁의 서막
공민왕이 왕비 노국공주의 죽음으로 비탄과 실의에 빠져 정사를 내동댕이치고 지낼 적에 신돈은 영도첨의가 되었으나 그의 개혁정책을 한참 동안 진척할 수가 없었다. 다만 왕은 신돈을 공경하여 자주 만나서 위로받기를 원했을 뿐 정사 논의를 외면했다. 왕은 영도첨의를 줄여서 항상 “첨의”라 칭하며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고려사》 권132, 열전45. 신돈)
찬성사 이인임과 이춘부는 시중 류탁에게 공민왕의 평소 구상을 이야기하며 누구를 조정에서 물러나게 할지 누구를 발탁해야 할지 의론하여 처결하였다.
왕비 노국공주 사후인 그해 5월, 조정에서 말썽이 난 경천흥과 최영의 사냥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메뚜기 피해와 지진이 있어 인심이 흉흉할 때이기도 했다.
왜구의 침범이 잦았던 그 시절 최영은 동서강도지휘사로 동강이란 곳에 진을 치고 대적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구가 창릉에 칩입해 세조의 영정과 보물을 탈취해 갔는데도 최영은 그것을 방비하지 못했다. 이에 왕이 놀라 대장군 김속명으로 하여금 퇴치하도록 했다. 그런데 그때 최영이 군사를 이끌고 고봉현에서 사냥을 했으니 대간들이 이 사실을 알고 왕에게 아뢰었다.
왕에게 대간이 아뢴 일을 사초를 쓰던 예문관 사신 안중온(安仲溫)이 다음과 같이 전했다.
“지금 심한 가뭄과 메뚜기(蝗蟲:누리)가 달려들어 곡식에 큰 피해를 입히고 또 지진이 일어나 세상이 어지러운데 왜구를 막으러 간 장수가 사병을 거느리고 사냥을 하러 다니니 어찌 그냥 두십니까? 당장 최영과 경천흥을 벌하소서.”
왕은 분노했다.
“당장 최 장군을 파직해 다른 곳으로 보내시오.”
왕의 엄명에 신돈은 이인임, 이춘부와 논의 끝에 최영을 계림윤(鷄林尹;경주)으로 좌천시켰다. 판개성부사 이순이 왕명을 받들어 최영에게 가서 전하고 속히 임지로 가라고 하였다.
최영은 대간들이 임금에게 상소하여 처결되었음에도 간사한 신돈의 참소로 좌천하게 되었다며 억울해하였다. 최영은 신돈을 자기 집에 기숙하게 한 김란을 비방한 일을 상기했다
“요승 편조 때문이다. 김란의 집에 그 중이 있을 때 딸들을 들여보내 잠자리 시중들게 했다는 걸 알고 내가 김란을 나무란 적이 있는데 그때 앙심을 품고 날 쫓아냈구나.”
《고려사절요》는 그때의 일을 기록했는데 《고려사》 <신돈전>에는 김란의 딸이 시침한 것을 최영이 질책한 일을 먼저 쓰고 그 질시로 참소당해 최영이 계림윤으로 폄출(貶黜) 되었다고 해 왜구가 침입했는데도 막지 않고 군사들과 사냥한 사건은 쏙 빼 버렸다. 《고려사》 권132. 열전 45. 반역6 신돈전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 공민왕 14년, 신돈이 밀직 김란의 집에서 기식하고 있었는데……, 최영이 이 일을 책망하자 김란과 신돈이 미워한 나머지 왕에게 참소해 그를 계림윤으로 좌천시켰다.
신돈은 최영으로부터 김란의 집에 기숙한 일이 별로 좋지 않은 소문으로 번지자 그 집을 떠나 궁궐에서 가까운 기현(奇顯)의 집에 기숙하게 되었다.
신돈이 기숙할 집으로 옮기고 보니 기현의 부인이 전에 시중에서 객승으로 탁발하며 고아와 부녀자들을 구호할 때 세운 반야암이나 극락암에 드나들며 도움을 주며 친하게 지냈던 과부였다.
“아니! 부인은 전에 극락암에 오시던 분이 아니시오?.”
“저는 그 후에 좋은 사람을 만나서 재혼했어요. 우연히 대사님께서 집을 구하신다는 소식을 신 내관께 듣고 반가웠습니다.”
기현은 그런 인연으로 신돈의 심복이 되어 나중에 신돈이 새집을 그 근처에 짓게 되자 송강 집을 오가면서 가신 노릇도 자청했다. <고려사>에는,
― 顯與妻事旽, 朝夕不離側, 若老奴婢然.
― 기현과 그 처는 신돈을 섬기기를 조석으로 곁을 떠나지 않아 늙은 노비 같았다.
기술했으며 기현의 부인이 과부로 있을 때 사통한 사이라고까지 모함했다. 《고려사》를 편찬한 그들에게는 여인이 조금만 남정네를 가까이했다고 소문이 나면 사통했다고 하고 또 정성을 다해 모시면 늙은 노비로 치부한 모양이다.
조금 맑은 정신이 든 왕이 신돈을 7월에 진평후(眞平侯)로 봉했고 얼마 있지 않아 아주 긴 48자 관명의 벼슬을 내리며 이름을 승명인 편조가 아니라 속명인 신돈을 쓰도록 명했다. 그때까지 《고려사절요》에는 스님 이름인 편조로 나온다.
― 수정이순논도보세공신(守正履順論道保世功臣) 벽산삼한삼중대광 영도첨의사사 판감찰사사 취성부원군 제조승록사사 겸판서운관사
정1품 문관의 품계인 “벽상삼한……”은 중신으로 초상화를 벽에 그리거나 걸어 영원히 기린다는 뜻이니 왕과 동등한 수준의 명예직이었다. 영도첨의사사는 조선 시대에는 영의정에 해당하는 최고의 관직이었으며 판감찰사사는 시정을 옳고 그름이나 부정부패를 조사하고 풍속을 교정하며 백관을 규찰하거나 탄핵하는 벼슬(요즘의 사정기관)이었다. 그 모두 실질적인 권력기관의 수장이었다.
상호군 이득림과 순군경력 오계남이 최영의 죄를 왕에게 아뢰었다.
“최영을 비롯해 전하의 존엄을 훼손하고 불충하여 서로 결탁하여 상하 신하들을 이간시키며 현량(賢良)을 배척해 내쫓았던 이인복, 이귀수 등 여러 명의 관직을 삭탈하고 귀양보내소서.”
“당장 그리 시행하라. 또 불충한 자들을 색출 처벌하라.”
불충하다는 대신들을 국문한 후 자복한 내용을 아뢰자 왕은 당장 시행하라고 했다. 그러나 《고려사》에는 죄를 날조했다고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 최영과 이구수 등을 국문하고는, 그 두 사람이 김수만과 결탁해 왕과 신하들을 이간질하고 충신들을 배척하는 등 크게 불충한 짓을 했다는 죄목을 들어 옥사를 날조했다.
왕명을 받아 신돈은 대대적인 세신 대족 세력을 여러 번에 걸쳐 조정에서 물러나게 하였다.
<창녕신문 > 2023년 7월 11일 연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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