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남전과 함께
소설

편조왕사 신돈 이야기 / 제6장 공민왕의 꿈 편조의 꿈(4)

by 남전 南田 2023. 3. 23.

계성 사리 황새등 아래의 일미사 유허가 있는 일미골

편조왕사 신돈 이야기 / 

제6장 공민왕의 꿈 편조의 꿈(4)

 

* 공민왕과 편조의 담공(談空)

 

왕은 편조를 만나 얼마간 대화를 나누자마자 그가 비록 키 크고 삐쩍 마른 몰골에 볼품없는 낡은 승복 차림이었지만 총명하고 사리에 밝아 득도한 고승임을 한눈에 알아본 것이었다. 그러나 왕이 불도에 미혹되어서 생긴 일이라고 깎아내렸다.

<고려사절요>의 기록은 참 우습고 기가 막힌다.

……총명하고 말을 잘하며, 스스로 불도를 깨달았다고 하면서 큰소리치며 궤변을 늘어놓아 왕의 뜻을 맞추었다. 왕이 꿈을 꾸고 한창 불교에 미혹되었으므로…….”

이어 왕과 편조는 불도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편조의 언변은 솔직하고 유창하며 거침이 없어 부처님의 가르침과 반야심경의 설법으로 공민왕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고려사>의 기록은 이어서 편조의 불도에 관한 수준 높은 견식을 궤변이라 깎아내리는 기록은 <고려사절요>와 대동소이하다.

왕이 평소 불교를 신봉한 데다 꿈에 현혹되어 자주 몰래 그를 궁중(宮中)으로 불러들여 함께 불교의 교리를 논하곤 했다. 신돈은 글도 모르는 주제에…….

하고 왕이 자주 편조를 내전으로 불러서 여러 번 담공했다고(=여지담공與之談空) 했다.

글도 모르는 자라 불학 무식한 중이라 비하해 놓은 위 기록은 편조의 득도와 설법을 사기, 속임수나 궤변으로, 공민왕의 불도 귀의를 혹몽(惑夢:꿈에 취한 미혹)으로 비방하고 깎아내렸다. 곧 조선 건국 후 불교에 대한 편견을 가진 학자들이 편찬한 고려사나 고려사절요가 얼마나 사실과 진실을 조롱해 비하 왜곡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라 할 것이다.

왕과 편조가 나눈 담공(談空)‘이란 반야바라밀다심경에 나오는 을 서로 담론했다는 것이다. 그다음 기록하기를 편조는 글을 한 자도 모르는 무식한 자로 중이 되었다고 했다.

참 우스운 기록이 아닐 수 없는데 글을 읽을 줄 모르는 무식하기 그지없는 사람이라 폄훼해 놓고 불법에 심취해 불경 이해에 수준이 높았던 공민왕과 에 대한 거침없는 담론을 해 왕을 설복하였다고도 하였다. 아무리 총명하고 언변이 좋았다 하더라도 얄팍한 속임수나 들은풍월만 가지고는 깊이 있게 왕과 담론을 전개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공민왕은 참선 수행을 통해 득도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었다. 해박하고도 심도 있는 담론을 주고 받았음을 왕이 인정했는데도 <고려사><고려사절요>는 편조가 왕을 속이며 득도했다고 큰소리로 사기를 쳤다고 삐딱하게 기록하고 있다.

 

김원명을 따라 궁에 입궐해 첫 대면을 한 이후 편조는 내관 신소봉과 시승 강성을의 연락으로 자주 공민왕을 뵙게 되었다. 왕이 편조를 만나고 싶으면 신 내관에게 하명했다. 편조는 왕을 만나면 조심스럽게 불도를 조정 중신들과 그 아래 모든 백성까지 믿어서 부처님의 평등한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그것이 편조의 꿈이었다.

 

김원명은 명덕태후의 외척으로 자주 태후전에 들락거렸다. 태후에게 요즘 왕이 편조라는 스님을 자주 만난다는 것은 궁인들한테서 듣고 김원명에게 물었다.

궁 안에 소문이 무성하던데 정말 편조란 스님이 득도한 고승임에 틀림없느냐?”

그럼요. 저도 여러 번 담공하는 자리에 참석하여 편조 대사의 설법을 들었는데 경전 해석도 잘하고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습니다. 편조 대사는 지혜와 지식을 두루 갖춘 분이지요.”

나는 그자가 스님이 아니라 요승이고 사승이란 소문을 들었다.”

태후는 홍씨 집안 친족인 보우국사의 말을 귀담아듣고 있었으므로 김원명이 다시금 편조의 득도에 대해 얘기했으나 태후는 끝내 믿지 않고 배척하는 것이었다.

 

여러 번 만나 불법에 대해 담론을 하게 되자 왕은 그의 행각승 경험담 듣기를 좋아했다.

왕은 자연히 개인적이거나 정치적인 얘기를 하기도 하였다. 즉위한 이후 지금까지 숙정을 제대로 단행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답답한 심경을 이야기할 곳이 없었는데 편조를 만나 털어놓기 시작하였다. 공민왕은 마침내 편조 대사가 도를 얻어 욕심도 적고 또 미천하여 친당(親黨)도 없었으므로 큰일을 맡길 만하다고 여기게 되면서 더욱 친근해졌던 것이다.

사실 짐은 오래도록 숙정이나 개혁을 추구하였지만 옳은 인물을 만나지 못하여 이룩하지 못했소.”

숙정을 단행하여 개혁과 쇄신함이 힘들지요.”

신망이 두터워진 된 편조에게는 개인적인 일도 털어놓았다. 19살에 노국공주와 연경에서 혼례를 올린 지 십수 년이 넘었는데 왕손이 없음을 은근히 걱정하였다.

아마 부처님께서 왕손을 곧 점지해 주실 겁니다.”

편조로서는 왕의 마음을 알면서도 슬쩍 비켜 갔다. 계성 일미사에 있을 때 아들 수태를 원하는 부녀자에게 비방(祕方)으로 수태를 하게 한 적이 여러 번 있었던 일을 말하지 않았다. 왕은 왕손이 없음을 걱정하기도 했지만 정치적인 이야기를 많이 했다.

편조의 대궐 출입이 잦아지자 당장 보우 국사 쪽에서 비방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자의 하는 짓을 보니 중이 아니고 사기꾼 사승(邪僧)입니다.”

또 왕의 최측근인 문하시랑 평장사 이승경과 기철을 주살한 무신 정세운이 노골적으로 편조를 요승(妖僧)이라면서 죽이겠다고 했다. 공민왕은 두 사람의 참소(讒訴)에 편조를 자주 만나지 못하고 좀 멀리하게 되면서 은밀하게 불러들였다. 편조도 자주 입궁하지 못하고 조심하게 되었다. 편조는 이처럼 집권하기 전부터 기득권 세력의 견제를 받고 있었다. 심지어 죽음의 위협을 받았던 것이다.

 

편조는 그의 불국토 꿈이 아직 때가 되지 않았음을 알고 다시 금강산으로 입산하였다. *

 

<창녕신문> 2023. 3.11자 연재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