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남전과 함께
소설

편조왕사 신돈 이야기 / 제10장 왕의 배신과 좌절(1)

by 남전 南田 2023. 11. 11.

편조왕사 신돈 이야기 / 

10장 왕의 배신과 좌절(1)

 

* 영전건축으로 생긴 간극(間隙)

 

공민왕은 왕비 노국공주의 무덤인 정릉과 위패를 봉안한 혼전(魂殿)인 인희전(仁熙殿)을 지어 추모했는데 또 죽은 왕비를 잊지 못해 영상을 모실 영전(影殿)을 송악산 왕륜사 동남편에 짓기로 하였다. 처음 영전 건축을 명하기는 전민변정도감이 설치된 해인 15(1365) 5월의 일이었다.

왕륜사는 919년 창건한 송도 10찰 중 하나였다.

공민왕 19(1370)에는 왕륜사에 왕이 신돈과 함께 행차하였던 일이 있었다. 그때 부처님의 치()사리와 얼마 전 편조와 혜근스님의 스승이었던 지공선사가 입적하였는데 다비한 선사의 유골(두골)이 송도에 도착하였기 때문이었다. 치사리와 선사의 유골을 친견하는 승려들이 많이 모인 큰 예불이 있었다. 그때 신돈도 가고 왕도 거둥하여 친견과 예불에 참석하였고 치사리를 궁 내불당까지 모시기도 하였다. 선사의 유골은 얼마 후 혜근이 천보산(天寶山) 회암사로 모시고 가서 공민왕 21(1372) 부도에 안치하였다.

왕은 광암사 곁 왕비의 무덤인 정릉과 혼전을 짓고 자주 행차했었다. 정릉이나 혼전에서 불사를 집전할 때에는 신돈에게 그의 독창적인 염불과 반야심경 독송을 하도록 하고 왕도 함께 따라 하기도 했다.

혼전을 지었던 환관 김사행에게 영전 공사를 명하자 왕명을 받은 그는 영안군(永安君)과 함께 문묘 근처 왕륜사 동남쪽 터에 아주 큰 규모의 영전을 짓기 시작했다. 혼전보다 크게 짓고 그곳에 공민왕이 직접 그린 공주의 영정을 모시기로 했다. 바로 궁궐 밖 동북쪽이었다. 그런데 왕륜사 쪽 영전을 짓기 시작한 지 몇 년 지나지 않아 공민왕 17(1367) 5월에 왕은 짓고 있던 영전을 헐고 마암에 더 큰 규모로 지으라고 명했다. 신돈은 건축을 강행하려는 왕과 공사를 반대하는 중신들 사이에 끼여 중재하려고 이인임, 이춘부와 힘을 써야 했다.

왕은 자주 운암사나 안화사 등 인근 사찰을 찾았다가 꼭 영전공사 현장에 들렸다.

터도 더 넓게 잡고 집도 궁궐처럼 더 좋게 크게 지어라

왕은 죽은 왕비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궁에 돌아오면 노국공주의 초상을 그리면서 추모했다. 8월에는 신돈과 함께 안화사에 들러 예불한 후에 돌아오면서 영전공사장에 들려 일꾼들에게 푸짐하게 음식을 내리며 공사를 서두라고 독려했다.

공민왕 16(1367) 정월에 원나라에서 죽은 왕비에게 노국대장공주라는 시호를 내리자 왕은 혼전에 행차하여 원나라에서 시호가 내려왔음을 고하는 큰 잔치를 열었다.

 

영전에 쓸 목재나 석재도 옮겨야 했다. 자재를 옮기다 쓰러져 다치거나 죽는 사람이나 말과 소가 많았다. 민심이 크게 돌아 탄식과 원망이 끊이지 않았으나 공사는 강행되었다. 이로 인해 조정안에는 신하들의 반대 목소리가 커졌다. 그것을 두고 보지 못했던 대신들이 왕에게 상소를 올렸다.

수시중 유탁과 밀직 안극인 등이 공사를 중지해 달라는 상소를 올리자 공민왕은 크게 분노해 그들을 하옥시켰다. 신돈의 예상대로 수시중의 상소를 보고 분노한 왕은 당장 그들을 하옥하고 죽이려 들었다. 영전공사 반대 상소에 방관했던 신돈이 시중 유탁을 죽이려는 왕을 말리려고 하였다.

삼사좌사 이색까지 건축을 중지하여야 한다고 하며 분란이 커지자 신돈은 왕을 설득하려고 하였다. 왕은 이색까지 죄를 물어 하옥하려 했다. 이색은 영도첨의 신돈도 알고 있었는데 왕에게 상소하지 않았다고 걸고넘어졌다.

방관만 하던 신돈은 하는 수 없이 왕을 달랬다.

전하께서 너무 노하셔서 소신도 그 일을 감히 여쭙지 못했습니다.”

왕은 여럿이 말리자 심기가 아주 불편해서 성을 냈다. 시중 이춘부에게 어보(御寶)를 봉하라 하고는 왕은,

내가 부덕해 신하들이 내 말을 듣지 않으니 어보를 덕이 있는 자에게 가져가 섬겨라!”

하고 왕위까지 양위하겠다는 심한 말을 했다. 신돈은 영전 건축으로 인한 왕과 중신들의 다툼을 중재하고 사태 수습에 많이 고심하여야 했다. 죽이려고 까지 생각하던 왕은 하는 수 없이 유탁과 이색 등을 석방하니 영전건축으로 인해 생긴 조정 중신의 반발은 일단 무마되었다.

그러나 왕은 신돈마저 이색이나 유탁의 주장을 찬성하는 듯 하자 몹시 서운해 돌아앉았다. 죄를 묻지 말라고 말한 신돈에 대해 앙금이 남았으니 그 신임에 대한 틈이 나고 금이 가기 시작했다. 곧 왕과 간극(間隙)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었다.

 

공민왕은 신돈에 대한 반발로 생긴 무장들의 탄핵 상소, 유학자 출신들의 암살 기도 사건이 어느 정도 가라앉은 후 왕비의 영전 건축에 다시 관심을 기울였다.

마암의 영전 건축은 유탁 등의 상소에도 불구하고 계속되었는데 왕은 정사를 신돈에게 맡기고 있었다. 신돈도 영전 건축에 왕과 중신들의 관심이 쏠림에 따라 그를 반대하는 자들을 물리치고서 재정 확보와 민생안정을 위해 개혁 단행 추진하고 있었다.

마암의 공사는 난공사나 다름없었다.

공민왕 18(1369) 9월에 큰 사고가 연달아 나고 또 났다. 이듬해(19)에는 기둥이 아홉 개나 되는 높고 넓은 관음전을 짓기 시작하였는데 또 사고가 났다. 강성을이 이인임과 이춘부가 있는 자리에서 신돈에게 사고 소식을 전했다.

관음전 3층 대들보를 올리다가 26명이나 깔려 죽었답니다.”

태후가 공사 중단을 강력하게 요청하자 공민왕은 하는 수 없이 마암의 공사를 중단시켰다. 그러나 왕은 영전 건축 애착을 버리지 못했다.

 

결국, 지난번에 짓다가 버려둔 왕륜사 쪽 영전 건축을 재개하여 신돈이 실각하게 되는 공민왕 20(1371) 4월에야 대들보를 올렸으며 관음사까지 지어 3년 후 왕이 죽을 무렵에야 준공되었다.

 

<창녕신문> 2023. 10월 31일 연재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