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조왕사 신돈 이야기 /
제11장 파국, <空>이로다(6)
* 모니노 입궁과 공민왕의 최후
강반야가 모니노를 수태하게 된 사실을 신소봉 내관과 함께 처음부터 소상하게 알고 있는 시중 이인임에게 왕자를 입궁시키라 명했다.
“시중! 이제 원자를 궁으로 들였으면 하오. 전날 신 내관이 궁인이라면서 과인의 침방에 들여서 시침을 하게 한 아름다운 여인에게서 원자가 태어났으니…….”
“아아! 그런 일이 있었지요. 그때 전하께서 왕비님의 서거로 비탄에 잠겨 그만 궁 밖에 버려두었습니다만…….”
“신 내관이 그랬지. 그 궁인이 아들을 잘 낳을 여자라고 왕사가 그러면서 추천했지요.”
“돌아가신 왕비님과 비슷한 시기에 수태 소식이 있었지요.”
“이제 그 원자를 궁에 들여 가르치면 걱정이 없겠어.”
이인임은 왕의 명에 즉시 궁 밖의 신돈 송강의 집에 내관들과 함께 달려갔다. 주인을 잃은 집은 적막에 싸여 있었다. 그래도 모니노와 강반야, 유모 장씨는 잡아가지 않았다. 이인임이 진작 그들을 보호하라고 군사들에게 은밀하게 지시해 놓았기 때문이었다.
왕이 강반야를 궁에 들이지 말라는 언질이 있었으므로 이인임은 왕자 모니노와 오래전부터 젖을 먹여 키운 유모 장씨만 입궁시키려 했다. 강반야가 아들을 따라나서려는 걸 군사들이 막았다.
“어디로 데려갑니까? 나를 모니노와 같이 데려가십시오.”
이인임은 묵묵부답이었다. 군사들에게 눈짓으로 여인을 막게 하면서 한참 만에 겨우 한마디 했다.
“부인은 한씨댁에 가 있으시오. 불원간 소식이 있을 것이오. ”
한씨는 누군가? 바로 몇 전 죽은 능우 스님 어머니 집을 말하고 있었다. 그 집에서 유모 장씨가 모니노 왕자를 키웠다.
강반야는 또 버려졌다.
이인임은 왕자를 태후궁에 들이면서 태후에게 그간의 사정을 아뢰었다. 어미가 시중에 사는 처녀로 역적으로 몰려 죽은 강성을 판사의 딸이라 말하기에도 좋지 않고 거기다 어제 그제 참형 당한 신돈의 질녀란 소리는 더더구나 할 수 없었다. 그는 난산으로 죽은 궁인 한씨의 소생이라 꾸며서 말할 수밖에 없었다. 태후는 상을 찡그리며 싫은 기색이 역력했다.
“천한 궁인을 주상의 침방에 들이다니! 그래서 원자를 궁 밖에서 자라도록 했구나.”
왕자가 태후궁에 들어오자 공민왕은 측근 호위로 그를 모시고 있는 상장군 이미충에게 눈짓하며,
“너는 원자 일을 알고 있지?”
하고 의미심장하에 물었다. 그때 옆에 같이 있었던 임박이 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왕자 출생 비밀은 몇몇만 알고 있었는데……. 왕의 물음에 이미충은,
“신이 알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임박은 그제야 왕자 출생 사실이 조정에 슬슬 널리 퍼져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밖으로 나오자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임박은 이미충에게 물었다.
“아! 전하께서 자주 첨의의 집에 내왕하지 않았습니까? 송강의 집에 입주할 때 전하께서 그 집에 가셨다가 아기를 만났는데 그때 가져갔던 금화를 주셨지요. 신돈이 넌지시 그 아이가 누군지 말해주었소.”
이미충의 말을 들은 후에 임박은 사관 민유의와 이지에게 말했다. 아마 사관의 일지에 기록하라고 한 일이었다.
“전하께서 궁인과 관계하여 아들을 보았는데 이제 벌써 일곱 살이 되었소. 신 첨의가 몰래 아이를 키우고 있었지요. 그러나 나라 사람들 잘 모르고 있었다오.”
임박의 말에 사관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궁인 한씨의 소생이라며 왕자의 출생과 관련된 일을 일지에 기록하였다.
왕자 모니노가 공식적으로 이름을 ‘복 우(禑)’로 받고 강녕부원대군(江寧府院大君)에 책봉되기는 태후궁에 들어간 지 2년 후인 공민왕 22년(1373) 7월이었다.
“신이 지금 나이가 차서 죽을 때가 임박하였으니 지금 후사를 세우지 않으면 사직을 누구에게 부탁하겠습니까?”
하고 모니노를 후계자로 삼을 뜻을 태후에게 분명히 밝혔다. 그런지 4개월 만에 왕자에게 우(禑)라 이름을 정하고 대군에 책봉하고 정당문학 백문보를 왕자의 사부로 삼았다. 그러나 강반야의 입궁은 허락되지 않았고 이인임은 조정 중신들에게 왕자 우가 궁인 한씨의 소생이라 재삼 알리기만 했다.
신돈이 죽은 이듬해인 공민왕 21년(1372)에 날이 오래 가물어 한해로 흉년들어 나쁜 징조가 보였다. 왕의 허물 때문이란 말이 사람들 사이에 떠돌았다. 그간 거센 피바람이 불어 얼마나 많은 목숨이 이슬처럼 사라졌는가. 하늘도 무심치 않다고 했다.
태후가 5월에 날이 오래 가문 것은 사람(왕을 지칭)의 허물 때문이라고 내관을 보내 왕에게 의지(意旨)를 전하게 하였다.
“한해 때문에 민심이 흉흉해지고 그것을 주상에게 돌리니 죄수를 사면토록 하여 하늘의 노여움을 풀라고 하셨습니다. 여자들이 신돈 역변에 무슨 죄나 상관이 없으니 여자들만이라도 풀어주라 하시오.”
태후의 여자들에 대한 사면 방면하라고 하자 왕은 고개를 내젓다가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하였다. 관비로 적몰된 여자들은 사면되어 풀려났으나 유배나 관노로 전락한 남자들의 운명은 여전히 비참하였다. 우왕 원년에 사면 될 때까지.
공민왕은 자신을 죽이려 한 신돈과 그 역당들을 처형했으나 마음이 편치 않았다. 밤이면 성문 문루에 높이 달린 피가 흐르는 신돈의 목이 꿈에 나타났다.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 악몽을 잊기 위해 술을 마시고 향락에 빠져 보통 사람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괴기한 황음과 만행을 저질렀다. 공민왕의 방황은 그치지 않고 미소년 자제위란 걸 만들어 즐겼다.
자제위 미소년에게 후궁 익비를 범하게 하고는 그것을 보며 즐겼으니 해괴망측한 변태요 관음증이었다. 익비가 태기가 있자 왕이 왕비 임신을 알고 있는 최만생과 홍륜 일당을 죽이려 하자 도리어 자제위와 최 내관의 칼에 명예롭지 못하게 저세상 사람이 되고 말았다.
신돈을 배신해 잔인하게 죽인 지 3년 후에 공민왕이 세상을 떠나니 1374년 10월, 보위에 오른 지 23년, 45세였다. 3일 후, 장례도 치르기 전에 이인임의 주청으로 강릉부원대군 왕우가 왕위에 오르니 곧 우왕이다.
하늘의 저주가 내린 것이었다. 고려 멸망의 어두운 그림자가 서서히 닥쳤다.
<창녕신문> 2024년 4월 15일자 연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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