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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군지명사

이야기-창녕인물비사(14) / 충절의 장수 영산현감 전제 도산성에서 순절

by 남전 南田 2025. 11. 20.

 

<이야기 - 창녕인물비사>

 

충절의 장수 영산현감 전제 도산성에서 순절

 

 

영산 남산 절벽 아래 즐비하게 선 선정비들을 일별하면서 더 안쪽으로 가면 큰 비석이 비각 안에 서 있다. <영산현감전제장군충절사적비>라 새겨진 비의 비문을 읽으면 왜란 때 억울하게 희생된 영산현감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

 

영수 전제英叟 全霽(1558~1597,선조 30) 영산현감 이숙, 장천기 현감에 이어 임진왜란 막바지였던 시기에 부임하여 낙동강을 오르내리며 왜적을 격퇴하였던 무과 급제를 한 용감무쌍한 장수로 정유재란 때 화왕산성에 입성하여 곽재우장군 휘하에서 현풍현감 신초, 창녕현감, 밀양부사 등과 참전하여 옥천 계곡에서 왜적을 맞아 혈투를 벌여 물리친 장수이다.

 

※ 묘지명(성재 허전 찬)에 <辛卯出宰靈山>이란 문구가 있어 신묘년(선조 24년, 1591)에 영산현감으로 제수된 것처럼 해석한 이가 있으나 신묘년은 전제가 별시 무과에 급제한 해이다. " 辛卯出 宰靈山" 한자 띄어서 읽으면 옳다. 임란 직전 재임 현감은 강효윤이었는데 왜란이 터지자, 영산에 왔던 경상감사 김수를 따라 초계로 갔다가 병으로 사직하였고 후임으로 제포만호 이숙이 7월에 부임했다.

 

영수 전제는 초계 사람으로 성품이 효우하고 충용이 절윤하였다고 한다. 1591년 임란 직전 무과 별시에 급제하였는데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종조숙부 탁계 전치원濯溪 全致遠 초계의병장, 이대기, 곽율 등과 창의 기병하여 조호장으로 왜적과 싸웠다. 무계, 초계, 마수진 전투 등지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경상우도와 초계지역을 온전하게 보존하였다. 특히 박진나루에서 배를 타고 북상하려는 왜적을 맞아 싸웠는데 곽재우 의병군과 협력했으며 곽 장군이 그의 용맹과 의기를 높이 칭찬하였다고 한다. 왜란 내내 왜적과 싸워 대구진관 병마절제도위(6)와 훈련원 첨정(4)에 제수되었다.

정유년 1년 전쯤 전제는 영산현감으로 도임하자 모정 배대유와 복제 이도자 등과 의병군을 모아 적의 침공에 대비하며 훈련하며 난리로 떠도는 유민들을 진무하는 데 큰 힘을 쏟아부었다. 영산현에 출몰하는 왜적을 물리치는 데 힘을 쏟아 현민을 안정시켰다.

정유년 7, 화왕산성 수성 때 조방장으로 산성 방어전에 크게 활약하였다. 특히 동문 쪽 옥천 계곡으로 침입한 왜적이 관룡사까지 와서 불을 지르고 입성하려고 공격하자 전제는 신초와 곽재우 장군 등과 합세하여 하루 종일 혈전을 벌려 막아냈다.

전투에 나아갈 때는 사졸의 앞장을 서서 시석도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가등청청의 왜적이 며칠간 화왕산성 공격을 시도하다가 패퇴 당하자, 낙동강을 건너 초계 쪽으로 후퇴했는데 전제는 정기룡 장군과 함께 후퇴하는 적군의 뒤를 따라가며 공격을 퍼부어 왜적 섬멸에 앞장을 섰다.

 

울산 도산성 전투는 정유재란 막바지의 큰 싸움이었다. 159712~15989월 사이 두 차례 벌어진 공성전이었는데 첫 번째는 1597(선조 30) 1222일부터 이듬해 14일까지의 전투였는데 이때 전제가 억울하게 참형당했다.

도산성은 태화강 하구에 왜군이 쌍은 성으로 성이 물길에 둘러싸여 마치 섬처럼 보인다고 해서 도산성島山城이라 했다. 두 차례의 도산성전투 결과 조명연합군은 성을 함락하지 못했다. 도원수 권율의 명으로 영산현의 군사를 이끌고 간 전제는 힘을 다해 싸웠다.

·명 연합군은 왜군을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서 성안으로 화공火功을 시도했다. 권율 도원수가 나무 방패와 마른 풀을 지고 진격하여 적의 진영을 태우라고 화공을 명했다. 그런데 비가 쏟아져 불이 쉽게 붙지 않을 것이라 실패가 뻔했다. 그래서 전제 현감이,

어제 오늘 밤까지 비가 와서 인마가 추위와 배고픔에 지쳤고 불도 잘 붙지 않을 것이니 걱정입니다

하고 소신 있게 진언했다. 군사들의 희생을 막을 전략이었으나 도원수가 무시하면서 직접 나서서 독전하였다. 하는 수 없이 전제도 적의 탄환이 비 오듯 하는 적진을 향해 나아가 성 위에 올라가 섶을 던지고 불화살을 쏘며 분전하였다. 그러나 비 때문에 화공은 실패하고 말았다. 그런데 충청병사 이시언의 군관 이사종李士宗이란 자가 싸움이 한창일 때 권율 도원수에게 참소하였다. 이사종은 전제의 충용을 시기하고 있었다.

전제가 도원수의 명을 거역해 화공을 실패하게 하며 군사들의 사기를 꺾었으니, 역적이나 다름없소. 당장 목을 베어 조리돌림을 해 전군에게 경고를 삼으십시오.”

권율은 이사종의 참소에 깜짝 놀라 전제에게 변명을 할 기회도 주지 않고 부하 두 명(급제자와 군정)과 함께 목을 베어 버렸다. 조급한 도원수의 판단 착오로 인한 어이없는 참사였다. 그날이 15971226(향년 39)이었다.

이 참극을 우병사 성윤문이 직접 목격하고 부당함을 체찰사 서애 류승룡에게 급히 알리니 평소 충용이 있는 장수라 하며 죽음을 몹시 안타까워하며 상세한 전말을 보고하라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영산현민들이 전공이 있는 현감이었다며 부당함을 호소 이사종의 죄를 묻게 하고 또 화왕산성 장서기로 함께 싸웠던 모정 배대유가 임금께 상소를 올려 부당함을 절절하게 호소하였다. 이에 선조가 이사종이 왜적의 편(부적자)을 들어 용감한 장수를 죽였음을 알고 크게 노하여 이사종을 참수하였다.

전제 현감의 억울함을 상소하여 풀어낸 배대유(1563~1632)1608(무신)에 문과 등제하여 필법으로 일세를 떨쳤으며 통정대부 승정원 좌부승지……춘추관수찬관을 지냈다.

 

전제는 1605(선조 38) 4, 선무원종 3등 공신에 녹훈되고 호조참판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총관에 증직되었고 도계서원에 배향되었다.

<창녕신문> 2025년 11월 11일 자 연재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