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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군지명사

이야기-창녕인물비사(15) / 용맹한 청년장수 사천현감 신갑, 진주성에 전몰

by 남전 南田 2025. 12. 6.

<이야기  창녕인물비사>

용맹한 청년 장수 사천현감 신갑 진주성에서 전몰

 

 

임진왜란 2차 진주성 싸움에서 전몰한 사천현감 신갑辛𥑐※은 영산 원천(지금의 도천) 출신으로 용맹스럽고 형제 우애가 넘친 25세 한창 때 청년 장수였다.

* 신갑辛𥑐을 집안 문중에서는 ‘신압’이라 부른다 하나 『창녕군지』에 신갑으로 등재되어 그에 따른다.

 

신갑은 혈기방장하여 니탕개란 때 16세였는데 싸우러 나가려고 했다. 난을 평정할 군사 모병이 있자 겁 없이 지원했었다. 그런데 형 문암 신초가 알게 되자 깜짝 놀라 말렸다.

“아니! 열여섯 살에 싸우러 자원해서 함경도까지 가려고?”

“형님! 사내대장부가 야인이 분란을 일으켰는데 어찌 가만있겠습니까? 당장 막아야지요.”

신초는 동생의 돌발 행동에 당장 야단을 쳤다. 그렇지만 모병에 응한 명단이 이미 작성되어 상부에 올라갔으니 어쩌나? 형이 동생을 말리고 대신 싸움터에 나갔다. 모병에 응했으니, 취소가 어려웠던 것이다.

니탕개란尼湯介亂은 1583년 함경도 회령에서 야인 여진의 니탕개란 자가 일으킨 난으로 1월에서 7월까지 싸움이 벌어졌었다. 모병에 응했던 동생 신갑 대신 형 신초가 출전하여 공을 세우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었다. 그처럼 신갑은 어렸을 적부터 무예를 닦아 싸움터에 나가기를 겁 없이 희망했던 것이다.

신갑은 임란 직전인 1591년(신묘)에 별시 무과가 있자 응시하여 급제하니 훈련원 별장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신갑은 영산의병군의 별장으로 왜적과 싸웠는데 형 신초와 함께 곽재우군과 연합하여 기음강전투, 정암진전투, 우강산성, 마분산, 구진산전투 등에 크게 활약하였으며 제1차 진주성 대첩 등에 큰 공로를 세웠다.

선조 26년 1월 11일, 각도에 의병장으로 주재하게 하며 병사를 천 명을 배할配割 할 때 영산현의 주자駐箚로 신갑이 임명되었다. 그때 창녕현에는 성안의에게 병사 천 명을 주어 주자로 임명하였다. 그 후 경상관찰사 학봉 김성일이 신갑을 사천현감에 천거 임명되었다.

제2차 진주성 싸움(1593. 6.21~29, 양 7.19~27)이 벌어져 왜적이 6월 14일 창원을 지나 함안을 휩쓸고 일주일 후에 고성을 거쳐 진주성을 공격하니 큰 싸움이 벌어졌다. 지난 해의 패배를 설욕하고 전라도로 가기 위해 왜적 10만여 명이 몰려온 것이었다. 이때 진주성에는 3천여 명의 군사와 6만여 명의 진주 백성들이 왜적을 맞아 치열한 공방전을 벌렸다.

이때 사천현감 신갑이 조카인 부사과 신순의와 함께 참전하여 분전하다가 적의 조총 철환에 전사하고 말았다. 신 현감은 적들의 예봉을 막아내며 수십여 명의 수급을 베었는데 왜적들이 난사한 포환에 맞아 어깨와 왼쪽 다리에 부상을 입어 쓰러져 일어날 수가 없었다. 쓰러진 채 올려다보며 사력을 다해 창을 휘둘러 여러 명의 적을 베고 마침내는 죽임을 당하였다.

 

사실 지난해 1차 진주대첩 후 관찰사 김학봉의 천거로 신갑이 사천현감이 되었을 때 신초는 걱정이 앞섰다. 사천현은 왜적이 항상 출몰하는 너무 위험한 남해바닷가라 적을 만나면 항상 앞장서 위험을 무릅쓰고 돌격하는 불같은 성격의 동생이 불안했던 것이었다.

그것을 걱정한 형 현풍현감 신초가 혈기방장한 동생을 진양의 어느 고개에서 만나 말렸다.

“지금 왜적의 기세가 날로 강성해지는데 스물 몇 살 젊은 네가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느냐? 너는 현풍을 지키고 내가 너를 대신해서 이 사천을 지키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느냐.”

형의 권유에 동생이 사양하며,

“모두 나라를 위한 일이며 관장하는 바가 다를 뿐입니다. 또 사천이나 진양의 위기가 현풍보다 백배나 더합니다. 그런데 어찌 형님을 위험한 곳에 두고 제가 스스로 한적한 곳에 자리 잡아 있겠습니까.”

“아니다! 관찰사께 청을 올려 임지를 서로 바꾸면 좋겠다.”

“걱정 마세요. 형님! 적을 만나기만 하면 단칼에 벨 것이오. 또 창을 휘둘러 요절을 낼 테니 염려 마이소.”

결국은 눈물을 뿌리며 형제는 서로 헤어졌다. 후세 사람들이 그 고개를 이름하여 이별령離別嶺이라고 하였다.

신갑과 신순의는 진주성 싸움에 다투어 나가 적을 수십 명을 참살하였으나 적의 조총에 맞아 전몰하고 말았으니 그때 신 현감은 약관 25세였다. 또 함께 싸운 신순의도 전사하고 말았다.

곽재우 장군은 신갑의 죽음을 애석해하여 '지용을 겸비한 훌륭한 장수라 남쪽 전부를 지킬만한 의로운 젊은 인재를 잃었구나.' 하였으며, 신갑의 처남 광서 박진영 장군은 '영남의 장성을 잃었다'하며 탄식하였다. 

후에 신갑은 숭정대부 병조판서 겸 의금부사에 추증되고 계향사에 배향되었으며 함께 전사한 신순의는 호조참판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장마면 초곡에 있으며 비문은 문소 김흥락이 찬하였다.

 

 

전사 소식을 전해 들은 신씨 형제들이 시신을 수습하려고 진양성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사천현의 군사들이 이미 현감의 영구를 수습하여 사천관아로 옮겨 보존하고 있었다. 왜적이 물러난 후에 문씨文氏 성을 가진 아전이 옷과 이불로 현감의 시신을 수습하여 사천으로 운구하여 안치한 것이었다.

“아전 문씨는 우리들에게 말하기를 현감님은 열사의 몸이네. 마땅히 현청 높은 자리에 잘 안치하였다가 본가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했습니다.”

현의 아전들과 군사들이 이구동성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였다. 고마운 사람 문씨 아전을 찾았으나 아전들이 고개를 내저었다. 사천에 없다는 뜻이었다.

“문씨는 이곳은 왜적이 자주 출몰해 위험하므로 운봉 여원치 산중으로 피신했소. 그런데 현감님과 연을 맺은 누이를 데리고 갔지요.”

“뭐라꼬요? 압이 동생과 연을 맺은 여인이라니요?”

“문씨가 산중으로 들어가며 그랬습니다. 내 누이의 배 속에 신 현감의 아이가 있다고요.”

훗날 문씨 아전의 누이는 아들을 낳았으며 그 아이를 거두어 길러 지금 그 자손들이 약간 남아있다고 전해 온다. ※

※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1827~1899) 찬撰 : ― 兵曹判書辛公墓表 참조 ; 왜적이 물러난 후에 사천의 문씨 성을 가진 아전이 …… 그는 공과 연을 맺은 누이를 데리고, 산중으로 들어가며 “내 누이의 배 속에 신씨의 아이가 있다.”라고 하고, 그 아이를 거두어 길러 지금 그 자손들이 약간 남아있다.

 

<창녕신문> 2025년 11월 일자 연재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