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남전과 함께
창녕군지명사

이야기-창녕인물비사(17) / 계성 태백산 장군골과 대금황제 이징옥

by 남전 南田 2026. 1. 6.

이야기-창녕인물비사(17)

계성 태백산 장군골과 대금황제 이징옥

 

 

계성면 계성리 북쪽으로 들을 건너 지동池洞(못골안) 동쪽 태백산 아래는 장군골이라 불리는 골짜기가 있어 세인의 관심을 끌고 있다. 이 골짜기가 장군골이라 불리게 된 연유는 조선 건국 이후 최초로 황제를 칭한(?) 인물과 인연이 있다. 장군골 아래는 못골(지동)이란 마을이 있는데 장군들이 살았던 동리라 전해 온다.

대금황제라 자칭하며 대동강을 건너 만주 벌판에서 여진족을 아우르며 금나라를 세우려 했던 원봉 이징옥圓峰李澄玉(1399~단종 계유:1453)이 곧 지동(못골)에 살았던 것이다. 장군골에는 이징옥의 조부 이만영 부부, 아버지 이전생李全生(1352~1450)과 부인, 그리고 형제들의 묘가 있다. 곧 이징옥, 그의 형 이징석李澄石, 아우 이징규李澄珪 3형제가 다 장군이었기에 장군골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지동 또는 못골이라 불리게 된 것은 이징옥의 모반 이후 역적이 살았던 집이라 하여 저택 형벌로 집을 훼철하고 집터에 못을 팠기 때문이며 그때 이징옥의 전장田莊은 공을 세운 이에게 상으로 하사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아버지 이전생은 장수가 태어날 곳이란 명지明地를 찾아서 계성에서 전국을 답사하려고 다니다가 양산 어느 골짜기가 장사가 태어날 명당이란 풍수 말을 들었다. 이전생은 산수를 둘러본 결과 장사가 태어날 곳임을 확인하고 양산 하북면 삼수리로 이사를 하였다.

명당이라 불린 그곳에서 3형제가 태어났다. 3형제는 모두 무예가 뛰어나고 담력이 대단했으니 모두 장사가 틀림없었다. 그중 이징옥이 무예와 용맹, 재주가 가장 출중하였는데 야사에 여러 이야기가 전해 온다. 3형제가 모두 용명을 떨쳤는데 어느 날 병든 어머니가 이징석과 이징옥을 불러,

"내가 살아있는 멧돼지가 보고 싶구나.“

하고 소원하자 형 징석은 활로 멧돼지를 쏴서 가져왔는데 동생 징옥은 며칠 후 살아있는 멧돼지를 마당까지 몰아와서 어머니께 보여주었다고 한다. 10대 시절에 호랑이를 맨손으로 때려잡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3형제가 태어난 후 얼마 지난 후에 이전생은 도로 고향으로 돌아와 살았다. 따라서 3형제는 양산 삼수리와 계성 지동을 오가며 성장했을 것이다.

이징옥은 고을에서 뽑힌 갑사(위흥위 군사)1414년 출사하였다. 궁술에 능하여 화살은 항상 명중시켰고 기마술, 창던지기에도 능했다. 1416(태종 16)에 무과 급제했을 때가 17세였다고 전해 온다. 2년 후에는 임금이 주관하는 친시 무과에 1등으로 급제하여 젊은 나이에 영북진 첨절제사가 되었는데 사람들이 '소년 절제사'라 불렀다.

이징옥은 1424년 경원진 첨절제사로 출발해 절제사, 1449(세종 31)에 김종서를 따라 20여 년간 회령부판사, 경흥도호부판사를 거쳐 함길도 도절제사로 오로지 4군의 설치와 6진의 개척, 여진 토벌 등에 참여 진력하여 평안도와 함경도 일대의 변방 수비에 공이 많았다.

 

그는 상당한 거구여서 야인들이 매우 그를 두려워하고 꺼려서 감히 침범하지 못하고, 그를 '어금니가 있는 돼지'라고 불렀다고 한다. 매우 청렴하고 성실한 인물로 평가되는데 보다 못한 부하 무관이,

"우리 장군님께서는 추운 겨울날 입을 옷이 한 벌밖에 없습니다.“

라고 문종 임금께 직소했다고 한다. 이에 문종은 좋은 털옷을 이징옥에게 보내주기도 했다.

 

세종, 문종, 단종을 거치며 평생 조선의 정수리를 감싸안은 곳 북방에서 수십 년간 근무했는데도 불만 하나 없었다고 한다. 함경도의 6진이 완성되어 두만강 이남은 완전히 조선의 영역으로 자리 잡게 하는데 이징옥의 공이 컸으므로 지중추원사, 숭정대부 판중추원사로 승진하였다.

1453(단종 1) 김종서의 추천으로 함길도 도절제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해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계유정난을 일으킨 수양대군이 김종서 황보인 등을 살해하고 정권을 잡았다. 이어 이징옥이 김종서의 부하였음을 이유로 비밀리에 그를 파면하고 은밀하게 박호문을 후임으로 보냈다. 박호문은 시치미를 뚝 떼고,

임금께서 돌아오라 하였소. 아마 조정의 중신으로 중용할 듯하오.”

하고 거짓말을 하였다. 계유정난 소식을 몰랐던 이징옥은 이튿날 한양으로 60리쯤 돌아갔을 때에야 부하의 귀뜸으로 김종서가 참살당한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속은 것을 안 그는 분개하여 되돌아가 자신을 속인 박호문을 단칼에 죽여버렸다. 이어 왕권을 차지하려는 수양대군을 몰아내고 단종 복위를 꾀하고자 계획하였다.

그는 10월에 병마를 일으켜 대금황제라 자칭하며 종성으로 가서 여진족의 후원을 얻어 변란을 일으키고자 하였다. 오국산성(회령의 고구려 성)을 군사 지휘소로 정하고 단종 복위를 위해 거병을 하였다는 격문을 돌려 여진족과 변방의 각 읍이 동조하기를 청하였다.

그가 두만강을 건너기 위해 종성에 머물던 중인 이듬해 1, 변절한 종성부사 정종과 호군 이행검 등이 이징옥을 야밤에 습격하였다. 그로 말미암아 두 아들과 함께 피살당하니 그의 나이 55세였다. 야사에 그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여러 가지 전한다.

3개월 만에 대금이란 나라 건국이나 단종 복위는 무산되어 버렸고 모반한 역적으로만 몰리고 말았다.

 

1698(숙종 24) 장릉지에 이징옥이 역모가 아니라 단종 복위를 꾀하였다는 신원 상소가 올려졌다.

그 후 정조 때에 이르러 명재상 채제공蔡濟恭<번암집>에서 이징옥이 칭제稱帝 건원한 반역이 아니라 세조의 불법성을 명나라에 직소하여 단종 복위와 계유정난을 일으킨 세조에 반항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단종실록>에 기록된 것처럼 대금황제가 되기 위한 것이 아니었므로 반역이 아니라 충신이라고 한 것이었다. 논의 끝에 340여 년 후인 1791(정조 15) 이징옥의 관작이 회복되고 충강忠剛의 시호가 내려졌다. 양산부원군에 봉해지고 영월 단종의 장릉배식단에 배향되었다.

 

그가 경상우도 도절제사가 되었을 때 고향 계성에 있는 98세가 된 아버지 이전생을 봉양하였다고 한다. 아버지가 별세하자 동생 징옥은 선산인 장군골에 장사 지내자 하였으나 형 징석이 자신의 토지가 많은 태백산 골짜기에 무덤을 쓰는 것을 반대하였다. 형제는 서로 자기 주장을 하며 주먹질이 오가는 대판 싸운 끝에 조부 묘 아래에 조성했고 그 후부터 그들의 사이가 아주 좋지 않았다고 한다.

아버지의 상중에 징옥을 구타하여 비난을 받을 정도로 성질이 난폭했던 형 징석은 17세에 무과에 급제, 내금위장·병마절도사·가정대부동지중추원사(2) 등을 지냈으며 세조가 숭록대부(1) 양산군으로 봉했다.

동생 이징규는 1420(세종 2) 18세 때 무과에 급제해 판관 감찰직을 시작으로 중추원사·진화사·병조판서 등을 역임하는 등 무인의 최고 품계인 종1품의 자리까지 올랐다.

형과 동생은 계유정난에 참여하여 세조의 편에 섰으므로 이징옥의 모반에도 불구하고 무사하였다.

 

<창녕신문> 2025년 12월 26일 연재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