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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군지명사

이야기-창녕인물비사(16) / 편조왕사 신돈, 귀천 없는 세상 불국토를 꿈꾸다

by 남전 南田 2025. 12. 20.

<이야기 창녕인물비사>

편조왕사 신돈, 귀천 없는 세상 불국토를 꿈꾸다

 
고려 말기 무너져 가는 고려왕조를 일으키려 스님의 신분으로 불국토 귀천 없는 세상을 꿈꾸며 개혁이란 깃발을 들고 정치판에 뛰어들었던 영산현 합문지부 신경원의 아들인 편조 신돈遍照辛旽(?~ 1371)의 굴곡진 생애를 한마디로 이야기할 수가 없다. 특히 단순한 흑백 논리로 접근할 수 없는, 숨겨져 있는 진실을 찾아내는 현명한 탐색과 판단이 필요하다.
최근 역사학계에서 신돈은 이성계의 신왕조 창립에 철저하게 이용되었다는 사실이 정설화하고 있으나 대중은 아직도 요승 신돈, 아버지는 불명이고 옥천사 여종의 아들, 우왕을 낳은 여인 반야는 신돈의 여인이라 공민왕의 씨가 아니고 신돈의 아들이란 <고려사> <고려사절요>의 기록을 그대로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므로  편조왕사 신돈은 재평가가 꼭 필요한 역사적 인물이다.
 
- 사구아師救我 아구사我救師(대사는 과인을 구하고 과인은 대사를 구할 것이다.)
편조대사에게 국정을 맡기면서 자필로 서약한 공민왕의 맹서盟書는 비록 7년이 지나지 않아 휴지 조각이 되고 말았지만, 이 맹서는 결코 허위가 아니었고 공민왕이 그 당시 편조대사를 모든 사회문제와 정치 현안을 해결해 줄 인물로 판단했기 때문에 맺은 공약이었다.
중신들이 왕을 배반해 권력을 휘두르고 역모를 일으키거나 이익을 좇아 정권을 이용하는 권신들을 일거에 척결해 사회 분위기를 일신하여 민심을 추스르기 위해 조정에서 그 부패 세력을 제거하고 나라의 기틀을 바로 잡으려는 공민왕의 의지를 신돈이 받아들여 난맥상이던 국정을 개혁하려 하였던 것이다.
신돈의 혁명적인 개혁은 권력을 쥔 최영과 군부세력을 물리치는 것을 시작으로 기득권 세력을 제거하는 인적 쇄신을 단행하였다. 반발이 극심한 가운데 현량을 등용하여 새로운 관료 신진 세력을 구축하려 하였다. 두 번째 개혁은 민생안정과 민심 수습을 위해 권문세족의 토지를 농민에게 돌려주고 노예를 해방하기 위한 토지개혁을 단행하였다.
형인추정도감은 숙정을 위한 기관이었고 전민변정도감은 토지와 노비제도의 개혁을 위한 기관이었다. 정치세력이 전혀 없는 신돈이어서 처결을 맡길 새 인물로 찬성사 이인임, 이춘부를 중임하고 그는 시중으로 평소에 소망했던 귀천없는 불국토에의 길로 개혁하고자 하였다. 불국토의 길이란 고려 사람은 누구든 부처님을 믿는 불자가 되어 극락 같은 세상이 되어 종이나 상놈, 권세가니 양반이니, 남녀, 귀천없는 신분으로 잘 사는 평등한 나라를 이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신돈의 그 혁명적인 처사를 <고려사>의 기록은 사실을 왜곡하거나 중요한 세부사항을 누락해 버리고 맥락을 무시 진실이 흐려지도록 하고 있다. 곧 그의 아버지가 영산현의 세가 합문지부 신경원의 아들임에도 아비 없는 절의 여종 자식이라고 출생부터 왜곡하기 시작해 부정확하게 기록하므로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그러므로 <고려사>를 읽을 때 세심한 고증과 맥락 이해의 중요성이 요구된다.
신돈 처형 3년 후 공민왕이 죽은 후 우왕이 등극하자 이인임의 주도로 신돈 일당 죄를 사면한다는 사면령을 내렸으니 공민왕이 죽은 지 십여 일 만이었다. 그런데 사면령을 내리면서 사면 사유나 경과 등을 자세하게 밝힌 문서가 있었을 것인데 싹 그 기록을 무시하고 빼버렸다. 그저 왕을 시해하려 했다가 대역죄인으로 몰린 사실이 엉터리였음을 은근히 슬쩍 짤막하게 밝혀 놓기만 하였다.
김속명의 고변과 이인의 왕의 시해 모의 허위 투서 등에 의해 대역죄인으로 몰아 신돈을 죽이며 그 측근들까지 역적 도당으로 몰아 대략 62명이나 유배나 처형을 하면서 재산을 몰수하고 자식이나 처첩은 관노나 관비로 내몰았던 처참한 과거사는 공민왕이 죽자
곧 단 4자 <유 신돈당宥 辛旽黨>으로 “신돈 당여를 사유했다.”로 끝내고 있다.
이는 신돈이 수많은 여인을 농락한 부패하고 황음한 늙은 중이라고 시시콜콜 기록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어물쩍 그쳤다.
이성계 일파의 <폐가입진>의 빌미가 되는 반야의 아들 모니노가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고 신돈의 씨라는 얘기는 허위의 극치라 할 것이다. <신돈전>의 기록대로 아들의 탄생을 알리고 반야를 후궁으로 들이는 공식적인 일을 하지 않은 공민왕의 이해할 수 없는 처신 때문에 의심과 논란의 씨앗을 뿌린 것은 틀림없을 것이다.
우왕 2년 반야가 강씨이며 신돈의 종이나 천녀賤女가 아님이 밝혀졌다. 번듯한 집안인 정3품 사복시 판사 강거실의 질녀이며 역시 신돈의 이부동생이라 기록된 판사인 강성을의 딸임이 <고려사> 우왕조에 기록되었으니 공민왕조에는 감추어 두었다가 우왕 조에 위험을 무릅쓰고 반야의 궁궐 입궐을 도운 판사 강거실의 처형과 함께 그 혈족 반야의 죽음을 밝혀 놓았으니 우왕의 탄생에 대해서도 왜곡이 심하다고 할 것이다.
우왕 등극은 당대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가 우왕을 왕위에서 쫓아내고서 창왕을 조민수의 주도로 세운 1389년(창왕 원년)에 정통성의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러니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의 기록은 중요한 세부사항은 모조리 빼버린 것이다.
신돈의 신분과 명예는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대역죄인으로 치부돼 500년간 회복되지 못했다.
창녕현 사람들의 힘으로 훼철된 옥천사 재건 운동이 벌어져 한창 불당을 짓고 있었는데 조정에서 알고 공사를 중단시켜 버렸다. 이 일은 성종 25년(1494)에 창녕현감 이기담 재직 때로 기록되어 있다. 신돈 사후 120년이 되는 때였지만 그에 대한 반감이 여전했던 모양이다. 옥천사가 신돈이 세우고 살았던 절이라 복원은 안된다고 했는데 참 잘못된 이유였다. 옥천사는 신라 때 의상대사가 세운 화엄십찰 중의 하나였는데.
최치원의 '화엄십찰'  중에 단지 "비슬산 옥천사"라고만 했지 현풍이란 지명을 명기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최근 어떤 이가 화엄십찰을 들먹이면서 옥천사가 현풍에 있었다고 하는 오류를 범했다. 그러면 신돈이 현풍에서 태어났고 옥천사도 그곳에 있었나? 아니다. 창녕현의 옥천마을 이름이 예전에 옥천사가 있었으므로  유래된 지명이니 이설이라곤 없다. 또 <동국여지승람>에도 옥천사가 창녕현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비슬산이 지금 현풍에 있는 산만 세인들에게 널리 알려저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창녕 화왕산 남쪽 말흘리에 산 정상이 닭벼슬 처럼 우뚝우뚝 솟아 벼슬- 비슬로 변하며 높이 717m의 비슬산, 비들재가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글을 쓴 듯하다. 사실 현풍 비슬산에는 옥천사란 절이 없었다. 동국여지승람에도 등재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최근 고성 연화산 옥천사와 청도의 비슬산 용천사가 화업십찰 "옥천사"였다고 주장하는 두 곳이 있으나 학계에서 의문, 부정적이다. 의상의 화엄십찰은 아미타불을 주불로 모시는데 주로 동향의 건물이거나 산 지형이 동향인 경우가 많은데 용천사의 경우 동향이 아니라서 화엄십찰이나 옥천사가 아니라고 한다.(이규순의 풍수이야기 참조)
또 고성에는 비슬산이란 지명이 동국여지승람에도 나오지 않으므로 그곳도 아님이 확실하다..
창녕의 비슬산은 신돈의 일로 산이름 마저 축소 왜곡되어  '비들재'로 되었던 것이며 비들재 너머 옥천쪽 비슬산.동쪽에 옥천사가 있었음이 분명하니 이설이 있을 수 없다.
 
편조 신돈의 천명지민본天命之民本이란 꿈은 최치원, 묘청, 허균, 다산과 남명, 동학으로 이어졌다고 볼 때 공민왕의 배신으로 중흥과 개혁은 좌초되고 그 결과 고려왕조는 비참하게 몰락하게 되었으니 그저 역사의 이면을 눈여겨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창녕신문> 2025. 12. 10 연재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