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야기-창녕인물비사(30)
천둥소리 모정 배대유, 화왕산성 수성전 장서기로 활약
정유재란 때 큰 전투 없이 지켰던 화왕산성.
방어사 곽재우의 눈부신 수성전 전략에는 도천의 모정 배대유慕亭 裵大維(1563~1632)의 활약이 컸다. 각처 의기 있는 인사들에게 보낸 화왕산성 수성을 위한 참전격서는 천둥소리와 같았다. 수려한 필체로 쓴 웅장하고도 피 끓는 명문 창의문은 읽은 이들에게 천둥소리로 들렸고 번개를 맞은 것처럼 놀라고 격분하여 산성으로 달려오게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서문에서 북문까지 군사들 사이에 깃발을 든 노인들과 부녀자, 허수아비 의병疑兵까지……촘촘히 성 위에 올라 세워 고함을 치고 나팔과 북, 징, 꽹과리를 치며 깃발을 흔들어 성세를 올리니 왜군에게는 천둥소리로 울려 겁나게 하였다. 이는 장서기 배대유의 위장 전략과 지략있는 현풍현감 신초의 뒷받침이 컸다.
모정은 천성으로 재지가 비범하고 문장이 정확하였으며 18세에 한강 정구 선생을 찾아가서 배웠다. 1590년(선조23)에 사마시에 합격한 진사로 왜란이 발발하자 영산의병군으로 참전하였다.
장서기란 방어사 곁에서 비서 역할을 하는 사람으로 전투에 따른 일록日錄, 각종 문서 작성과 군량의 수급, 군사들의 조직과 배치 등 주요 업무 맡아 처리하는 핵심 부서장이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현풍에서 석문산성을 쌓고 있던 경상좌도 방어사 곽재우가 밀양·현풍·창녕·영산의 군사와 백성, 군량과 각종 무기까지 수습하여 천혜의 요새지인 화왕산성으로 입성하여 방어전을 펼치고자 할 때 통제사 이원익과 도원수 권율이 우려하여 안전지대로 하산하라고 하였으나 곽 장군은 소신대로 했다.
처음 장서기로 발탁한 인물이 임란 초기부터 의병으로 활약한 진사 배대유와 노극홍이었다.
곽재우 방어사가 방어전을 준비하면서 네 고을 수령들을 조방장, 조전장으로, 성안의를 종사관 등으로 지휘 체계를 갖추고 맨 처음 한 일은 예전 의병군으로 싸웠던 각처의 인사들에게 화왕산성 수성을 위해 와달라는 참전 격서를 보냈는데 이 글의 작성자가 배대유와 노극홍이었고 달필과 명필로 이름난 배대유가 창의 격문을 썼는데 그 문장이 천둥소리와 같았다.
훗날 곽원갑이 엮은 「화왕입성동고록」에는 경향 각지의 열읍 인사들이 등재되어 있어 최근 학계에서 참전 여부에 논란이 일고 있다. 화왕산성 방어전과 전혀 관련이 없는 인물들인 영의정 유성룡, 체찰사 이원익까지 있다고 꼬뚜리를 잡아 비난했다. 과연 그럴까? 동고록은 장서기가 작성한 전투 일록이나 주고받은 서신, 군사들이 들고 남을 기록한 초록 등이 근거가 되어 작성되었을 것이므로 그리 틀린 기록은 아닐 것이다. 곧 ‘동고同苦’란 고생, 괴로움을 함께한다는 뜻이지 창칼을 들고 전투에 함께 해 싸웠다는 뜻은 아니다. 산성에 오지 않은 인사들 대부분은 격려 서신이나 군량, 군사들을 보내온 사람들로 장서기의 일록을 참고하였기 때문이라 할 것이다.
곽재우 방어사의 화왕산성 수성전을 최근에 비하하는 학자들이 말하기를 "산성에서 왜적과의 싸움은 아예 없었"고 그저 일주야(하룻밤?)를 가등청정 군사들이 별 할 일 없이 어정거리며 성 아래에서 하루를 머물다 낙동강을 건너 갔다 하면서 “화왕산성 동고록” 기록 자체도 믿을 수가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3~7만이라 추정되는 왜적 대군이 하루아침에 지나갔다는 것은 그 당시 창녕지역의 지형이나 사실을 간과한 궤변이라 할 것이다. 특히 창녕에 와서 왜적이 머물렀던 대지 들판, 말흘리와 자하곡 지형과 화왕산성 요새까지 현장 방문하여 환경을 조사했더라면 그런 주장을 펼칠 수가 없을 것인데.....
3~7만의 대군이 행군하려면 요즘처럼 넓고 평탄한 길이 아니었으므로 정찰 임무를 띈 선발대가 앞서 길을 열고 살피고 또 대장 등 고위 장교가 머물 군영까지 먼저 와서 설치한 다음 이어 본대의 행렬이 수십 리에 걸쳐 행군하여 도착했을 것이며 후미에 군량을 실은 부대와 취사병까지 도착하려면 여러 날이 걸렸을 테니 왜적이 하룻밤을 지내고 본대가 낙동강을 건너갔다니 믿기 어려운 얘기다.
그게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 없다. 출발-정찰-행군-군영(군막) 설치- 본대 도착-군막,무기 철거- 퇴각까지 며칠이 걸렸을 것이다. 가등청정 3~7만 왜병이 하룻밤을 보냈을 리 없다.
그뿐만 아니라 먼저 도착한 선발대는 화왕산성 인근의 수비 정보를 얻기 위해 탐색전을 벌렸을 것이다. 왜적 탐색대를 보고서 조선 군사들이 가만히 있을리 없다. 공격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웃기는 얘기를 한다.
왜적이 싸우지도 않고 하루밤을 지나더니 조용히 물러나 안음 황석산성에 가서야 싸웠으니 곽재우 수성전은 승전이 아니고 그냥 성을 지킨 방어사의 의무를 다 했다고 <곽재우 신화는 "조작"이라>고 하는 자들이 평가 절하하고 있다, 멀리 가서 황석산성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싸우면서 가까이 있는 화왕산성은 없는 듯 그냥 지나갔다니 가등이 곽 방어사가 무서워 싸움을 피한 것일까?
사실 화왕산성이 가까지른 절벽 위에 있어 정면 승부로는 난공불락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자가 싸움이 없다고 했을 것이다. 사실 선발대가 자하골로 와서 서문을 시험 삼아 공격하였을 때 깔딱고개라 불리는 낭떠러지 아래에서 올려다보고 공격하다가 무참하게 전멸당하였다. 가등은 그 사실을 보고받고 서문 공격보다는 남이나 북쪽 외곽 골짜기는 시험 삼아 두드려 보려 하였을 것이다.
소규모 전투는 산성의 남과 북쪽 골짜기에서 여러 번 전개되었으며 북쪽 왜골이 치열한 전투 끝에 왜적을 물리쳐 승전하여 그렇게 불리었다고 전해오고 있다. 또 동문아래 옥천 골짝에서 곽재우를 비롯한 신초 현풍현감, 전재 영산현감이 천여 명 왜적과 사투를 벌였는데 그때 관룡사까지 잔적 일부가 달려가 불을 지른 사실도 있는데 그들은 묵살하고 있다. 또 사상자가 있었다고 “창녕군지”에 기록되어 있다. 창녕현 서리인 하언호 부자 등 여러 명이 이때 전사하였다는 기록은 소규모 전투가 여러 차례 벌어졌음을 증언해 주고 있다. 하언호는 선무원종공신2등으로 녹훈되었고 의령의병군 계전 이천전은 후에 진무종1등공신으로 훈록되었다.
“화왕산성에서는 실제 전투가 벌어지지 않았는데, 동고록의 등장인물 가운데 격전에서 승리한 듯 왜곡되는 현상마저 적지 않다.”고 주장하는 일부 사학자들의 편견이 바로 잡혔으면 한다.
화왕산 전투가 끝나고서 모정은 1602년(임인) 참봉으로 제수되었으나 선무공신 책록에는 빠져버렸다. 노극홍과 함께 문서 담당 장서기였으므로 그들은 싸움터에서 나가 격전을 전개 적의 목을 벤 전투 공적이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참 아쉬움이 크다.
정유재란 막바지 울산 도산성전투에서 영산현감 전제가 크게 모함을 당하여 도원수 권율의 어이없는 판단과 실책으로 진중에서 부하 2명과 함께 처형된 일이 있었다. 이때 모정이 전후 사실을 유려한 필치로 상세히 적어 임금에게 상소하여 전제의 무고함을 밝히는 데 앞장섰다. 사람의 마음을 격동시키는 천둥소리나 다름없는 그 상소는 영의정 서애 류성룡의 동조를 얻어 전제 현감의 역적 혐의를 벗게 하고 복권시켰으며 또 공신 혼록을 받도록 하였다.
모정 배대유(字 자장子張)는 필체가 뛰어나 명필로 소문이 났는데 각처에 모정 명필인 전각 글씨가 서울 광화문 현판 등 아주 많이 전해지고 있다. 임천 배학─배영─배대유─배홍우로 이어지는 도천의 배씨 가문은 선조 때부터 이들에 이르기까지는 영산지역에서 ‘裵․李․辛․宋’이라 할 만큼 첫손가락에 꼽는 명문의 출신이었다.
모정은 1608년(선조41, 광해군 즉위년) 별시 문과에 병과 10위로 급제하여 직장이 되고 광해 때(1612년) 사헌부지평이 되었다. 1610년에 경상도사。이듬해 지평, 정언에 오르고。1613년에 직강, 사예, 이듬해 사성 겸 시강원 필선으로 옮겼는데 곧 사헌부 장령으로 제수되었다.
광해의 난정이 시작되어 영창대군을 죽이려 할 때 망우당 곽재우가 불가함을 상소하였을 때 모정도 이에 찬성하자 왕은 노하여 그를 파직하였다. 그는 망우당을 자주 찾았는데 귀향할 때 명품 벼루와 먹, 좋은 종이를 가져와 선물하였으니 명필가의 자세가 두드러진다.
1615년(을묘)에 직강·사성 겸 필선으로 복귀하여 지제교겸편수관을 지내다가 1618년에 병으로 귀향하였다. 다시 동부승지겸 경연삼참찬관,춘추관수찬관。우부승지。좌부승지。충무위 부사과。1622년 우승지。병조참지。60세이던 1623년 3월, 입직 때 인조반정이 일어나 파직당하자 도천으로 귀향하고 말았다. 그는 어느 쪽 당파에도 휩쓸리지 않았으니 파직이 당연하였다.
인조가 모정이 무고당했음을 뒤늦게 알고서 선공정 겸 지제교 또 부호군에 제수하며 불렀으나 병들었다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그 후에 사립문을 걸어 잠그고 두문불출하고 손님도 받지 않았으며 여러 번 임금이 불렀으나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간혹 아들 홍지, 홍우와 함께 망우정으로 나가 인근 선비들인 조임도, 이도순, 신동망, 성이도 등과 교유하였다.
1632년 70세로 별세하였다. 간송 조임도가 지은 만사에 ‘일흔까지 살아 무슨 유감이 없으리라’ 하고 애도하였다.
―몇 년 은거하다 위험한 조정에서 벼슬하더니 / 幾年沈晦立危朝
하룻저녁에 사립문 닫혀 쓸쓸하네 / 一夕蓬門鎖寂寥
명철하여 당시 화에 걸려들지 않았고 / 明哲當年逃禍網
온전히 돌아간 이날 속세의 시끄러움 멀리하였네 / 全歸此日遠塵囂
-- “모정 배대유의 죽음을 슬퍼하다〔挽裵慕亭 大維〕 조임도
모정은 문장과 명필로 초서·예서에 뛰어났다. 글씨로는 「기자정석각」 등 여러 곳에 그가 쓴 기문, 현판 등이 남아있으며 <망우당문집> 권두에 그가 지은 명문장의 전傳과 『모정집慕亭集』이 있다. 도천리의 도천정사에 배향되고 ”통정대부 행 승정원우승지 겸 경연참찬관 병조참지 지제교 모정배공 묘지명>이라 새긴 면우 곽종석 찬撰 묘도비가 부곡 청암의 묘소에 있다.
* <창녕신문> 2026년 7월 28일 연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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