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티나무가 있는 골목
김 현 우
몇 해 전 차가 다닐만한 폭의 마을길이 생기면서 남은 자투리땅에 느티나무를 심고 그 주변에 꽃나무 몇 그루 있는 화단이 만들어졌다. 느티나무 둘레에는 등받이 없는 나무의자 4개를 설치해 누구나 쉴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졌다.
골목의 느티나무는 올 여름 들어서야 좀 깊은 그늘을 만들었고 자연히 마을 늙은이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해 그 아래는 쉼터로 애용되기 시작했다. 토박이 김 영감은 아침 일찍 나와 빗자루 질을 한다. 간밤에 젊은이들이 놀며 버린 담배꽁초, 술병, 통닭 포장지 까지 쓰레기장을 방불케 해 청소를 한다.
느티나무 그늘 아래는 보통 아침 8시 반 쯤 되면 커피를 즐길 늙은이들 서너 명이 늦은 아침을 먹고서 모여 든다. 커피라야 젊은이들이 즐기는 값비싼 이름들의 원두커피가 아니라 참기름 집 옆 모퉁이에 서있는 자판기에서 뽑은 것이라 단돈 300원짜리다. 하지만 그게 맛이 기 막힌다는 토박이 영감의 주장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통한다. 좀 맛이 다른 자판기보다 유별난 게 있을지 모르지만 사실 그게 그거 일 텐데. 내 입에 익은 맛이 제일이라는 영감들의 생각일까? 아니면 관리를 하는 참기름 집 아주머니가 매일 씻고 닦고 맛보고 그래서일까? 하여간 이곳 커피는 다른 곳 자판기의 커피맛과 사뭇 다르게 달지도 쓰지도 않으면서 커피향이 진하고 늙은이들이 수십 년간 길들여졌던 그 맛을 느끼게 만들었다.
인생살이가 대체로 즐거웠다기보다 고달팠던 기억이 많은 마을 늙은이들이라 커피 한 잔 가지고 구시렁거리기 일 수인데 느티나무 아래에 모여드는 그들은 이구동성 제 입맛에 딱 맞는다고 만족해한다. 그러면서 다른 곳 자판기에 가서 빼 먹을 한 잔도 참았다가 참기름 집에 와서야 커피 한 잔을 빼들고서 느티나무 아래로 오곤 한다.
느티나무 아래의 한담(閑談)은 쉴 새 없고 거칠 것이 없다. 선거철이면 당연히 후보자에 대한 지지와 비방이 화제의 첫머리에 오르고 그게 지나가니까 야박한 세상인심에 때늦게 군대 생활 때 겪은 체험담으로 열을 올린다.
보통 화제의 물꼬는 욕지도 영감이 튼다. 그는 쉰이 넘도록 어부로 남해에서 동해로 제주도로 인천 앞바다까지 누비고 다녔던 섬 욕지도가 고향인 사람으로 느지막이 상륙해서 유압파이프 만드는 공장에서 십여 년간 일한 영감이다. 그는 파이프의 녹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염산을 다루는 생산직으로 일했는데 처음에는 정식 사원이었으나 나중에는 일용직으로 일하다 그것도 65세가 되어 그만두었는데 언제나 바다와 힘을 겨루던 얘기로 신명을 낸다. 공장일은 공해로 찌들어 그 독한 염산 냄새에 마스크를 하고서도 견디어 내지 못해 신참이 입사하면 사나흘을 견디지 못해 도망가 버리곤 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그는 10여년을 버티어 냈으니 그 몸이 온전할 리가 없다. 7, 80kg 나가던 거구가 요즘은 60kg을 겨우 넘는다고 한다. 그래도 산업재해 신청 한 번 하지 않았고 돈을 적게 받아도 일 시켜 주는 사장에게 고마워했다고 한다. 하지만 퇴사 후에는 체중은 푹푹 느는데 허리가 아파서, 어깨가 아파서 정형외과를 매일의 일과처럼 드나든다.
그의 맞상대는 박영감이다. 박 영감도 생산직으로 어떤 곳에 근무하다 끝이 난 인생이다. 그는 갑상선 이상으로 고생을 하고 있다. 그 바람에 눈이 툭 불거지고 몸이 바짝 말랐다. 이곳저곳 용하다는 병원 안 다닌 곳이 없다. 지금은 한 달에 한 번 쯤 부산의 대학병원까지 가서 약을 지어다 먹는다. 박 영감은 매일 수 십리 길을 걷는다. 그게 운동이다. 한 곳에 가만히 앉아 있지를 못하고 이리 기웃 저리 기웃거리며 돌아다닌다. 이 작은 도시의 역 광장에 노인네들이 많이 몰려 나와 노는데 거기도 잠간 들리지만 오래 머물지 않는다. 욕지도 영감은 그걸 비꼰다.
“오늘도 돈을 좀 주웠나? 돈이 길에 떨어져 펄펄 날던가?”
3년 전까지 철근 공사를 도급받아 일하다가 중풍이 오는 바람에 다리도 팔도 힘이 빠져버려 반거충이가 돼버린 이 사장은 별로 말이 없다. 아내가 병원의 청소부로 홍합, 굴 까는 작업장에 일하러 다니며 생활비를 벌고 있다. 그는 팔 다리에 힘이 없으니 동사무소에 가면 얻어걸리는 희망근로사업 마을 청소 일도 못하고 있다. 그런데도 2,500원 짜리 담배는 이틀에 한 갑이다.
“중풍으로 고생하는 사람이 담배를 피우다니!” 하면서 담배를 끊어야 된다고 열심히 말리는 배 사장이 있어 이 사장은 영 성가시다. 말이야 옳지만 담배를 안 피우니 심심해서 죽을 맛이라고 구시렁거린다. 배 사장은 전에 이 근처 시장에서 빵집을 했던 사람으로 이제는 사위가 하는 재활용센터 점포에 나가 잔손을 거드는 형편이다. 그는 일요일이면 교회에 나가는 신자다. 그러니 그 옆에서 누구나 담배를 피우는 것은 용납을 못한다. 이 사장도 그걸 아니까 담배를 피우려면 아예 느티나무 곁 의자에서 일어나 멀찍이 보이지 않는 곳에 가서 한 개비 문다.
아내가 2, 3년 전 죽고 홀아비인 배씨는 얼굴이 새까맣다. 아마 간이 나빠서 일거라고 짐작은 가지만 아무도 그걸 내색 않는다. 그는 오후 대여섯 시가 되면 술 생각이 간절한 지 이 사람 저 사람 붙들고 은근 슬쩍 유혹한다. 그러나 모두들 냉담하다. 배 사장이야 당연히 제외되지만 어부였던 욕지도 영감이나 박 영감도 고개를 내어 젓는다. 그러고 보면 중풍으로 절대 금주 선언을 해야 할 이 사장이 배씨에게 손목 잡혀 근처 시장으로 간다.
막걸리 한 병에 부침개 안주 한 접시 시켜 놓고 앉으면 중풍 든 이 사장은 한 잔이고 나머지는 배씨의 몫이다.
저녁, 느티나무 아래로 늙은이들이 모여들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모기 때문에 더 버틸 수가 없다. 이제 그들이 갈 곳이라곤 제 집 밖에 없다. 그래서 자의반 타의반 집으로 돌아간다. 그러면 느티나무 아래는 맥주 캔을 든 젊은이들이 모여든다. 그 이튿날 아침이면 또 그곳은 쓰레기장을 방불케 하는데 청소 담당은 역시 늙은이들이다. ***
이 졸작 수필은
<21세기문학>(2010 가을, 통권 50호)에
실린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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