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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야기

남강 백희천 시인, 그 추억의 편린들

by 남전 南田 2010. 3. 12.

-김현우

 

백희천 시인은 남지읍 남포동 남지철교 가까이 횟집을 경영하고 있으면서 1995년인가 우리 창녕문협에 입회를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처음 <나루터횟집> 이란 간판이 붙은 그 집에 가보니 넓은 터에 자리 잡은 가게는 방이 여럿이었고 그 중 눈에 확 띠인 것은 아주 넓고 큰 방이었다. 사람이 5, 60명은 너끈히 들어가 앉을 큰 방으로 창을 통해 낙동강과 철교, 들판이 한 눈에 보이는 그런 방이었다. 나는 그 방이 마음에 들었다.

백 시인은 나중에 그 방에다 시화를 가져다 걸어서 한층 우아하고 운치 있는 방으로 만들었는데 그 시화들은 주로 우리 창녕문협 회원들의 시화로 비사벌예술제 시화전 때 전시를 하고 철거해 둔 작품들이었다. 보관하기에도 어려웠던 시화전 작품을 재활용하여 우리 문협 회원들의 작품을 회를 먹으러 오는 손님들에게 다시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여 주게 되니 이건 꿩 먹고 알 먹고 하는 격이 아닐 수 없어 나는 참 좋은 착상이었다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훗날 백 시인은 낙동강연안개발 사업 추진 때문에 남포동에 있던 횟집을 하는 수 없이 철거하고 횟집 영업장소를 도천면 송진으로 옮겼을 때도 모든 작품을 떠안고 송진 새 보금자리로 가져가 <시가 있는 별장>(?)인가 방인가 현판까지 붙이고 전시하는 열성을 보였는데 우리 시화전 작품도 보존할 수 있고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보이는 전시공간도 되어 일거양득이 아닐 수 없어 그 공을 잊을 수가 없다.

처음 만난 횟집 주인이라는 백 시인도 첫 인상이 정열적이고 화끈한 성격의 사나이 같았는데 그 풍모에서 뱃사람 냄새가 풍겨져 나오는 것이었다. 흔히 ‘보물섬’에 등장하는 해적들이나 아니면 난폭한 선원들의 그 꾸미지도 않고 럼주를 낮부터 마시고 술에 취해 벌게진 얼굴로 사람 좋게 웃고 있는 그런 모습. 그는 장발에다 얼굴마저 험한 파도와 불어 닥치는 바다 바람에 씻기고 다져진 것처럼 검으스레 하여 정말 해적과 방불하였다. 내 기억으로는 명확하지 않는데 그때 장발을 묶어 꽁지머리를 하고 있었는지 그 후에 그랬는지는 모르겠는데 여하튼 그 유별난 장발과 꽁지머리만이 내게 각인되어 있다.

그래서 “백희천 시인.” 하면 맨 먼저 떠오르는 것이 그 꽁지머리, 색다른 사내 모습이다. 얼굴이나 작고 예쁘장하였으면 그 머리가 연예인 스타일처럼 어울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근육질이고 얼굴은 사각형이거나 커고 얼굴색마저 검으스레 바닷바람에 그을린 듯해 잘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한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 보니까 나중에는 그 모습이 바로 백희천표 트레이드마크처럼 여겨져 보기가 괜찮아졌다.

앞서 말했지만 그는 정열적이고 다혈질적인 성격의 소유자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그의 행동은 항상 직설적이고 망설임이 없고 막힘이 없었다. 말이 떨어지면 행동에 옮겨버리는 버릇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살아 온 역정 또한 파란만장하고 직업도 다양하였다. 나는 소심하고 의심하고 한번 마음먹은 결심도 행동에 옮기려면 수십 번 망설이는 게 내 나쁜 버릇인데 백 시인은 판단도 빨랐고 행동 또한 신속해서 내가 도저히 따라 잡을 수 없었다. 나는 마산에 살았고 전화 통화도 자주 할 수 없었지만 간혹 남지를 지나면서 그의 횟집을 방문해서 이러저러 창녕문협 얘기를 나누다보면 성질 급한 그는 나의 우유부단을 탓하며 과감한 행동을 요청하기도 했다.

남지에 횟집을 경영하는 동안 으레 문협 모임은 그의 횟집에서 하게 마련이었다. 회원이 많이 모이는 날도 있었고 적게 모이는 날도 있었는데 언제나 회는 푸짐하게 내놔서 항상 손해가 났을 만한데 생전 그런 내색을 않았다.

 

그는 행사 때마다 그의 차를 이용하게 되었다. 봉고형으로 짐도 많이 실고 사람도 어려 명 탈 수 있는 차로 주로 시화전이 있을 때는 작품들을 실어 나른다고 고생이 많았다. 시화전 작품을 전시장까지 담아 실고 오는 것만도 보통 일이 아닌데 문화원 2층인가 3층 전시장까지 져다 올리려면 힘이 들었다. 그런데 매번 나와서 그 일을 도와주는 회원은 아무도 없었으니 혼자 감당하기에는 벅찼다. 그래도 그는 별 말이 없었다.

“내가 고생했지요?”

하면 그는 당연지사인 듯 했다. 체력이 좋으니 그 일을 감당하기에 별 무리가 없으리란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때에 따라 회원들이 많이 나와서 그를 도와주지 않아 내가 속상해 했다.

그의 부모 모두 치매로 고생하고 있었다. 장남인 그는 그 뒷바라지를 도맡아 하고 있음을 남지에서 도천으로 이사를 간 후에서야 나는 알게 되었다. 그의 모친께서 수년간 반신불수 치매로 고생을 하는데 그의 부친마저 또 치매에 걸려 앓게 되니 그의 마음이 오죽 상하고 아팠겠나? 그런 내색을 통 않았지만 가까운 친구들에게는 하소연했던 모양으로 나도 그걸 전해 듣고 말 위안 말고는 아무 것도 도울 수 없는 내가 답답했다.

나중에는 부친을 그의 횟집 가까운 도천 송진의 아파트로 모셔와 간병을 도맡다시피 했다. 그런데 부친은 사흘이 멀다 하고 집을 뛰쳐나가 들판을 방황하니 백 시인은 아버지를 찾으러 양 사방으로 돌아다니기 일 수였다. 그때쯤 횟집 경영도 부진했던 모양이었다.

사실 나야 영업 같은 것에 신경을 써 본 적이 없는 월급쟁이 생활을 평생 한 사람이라 횟집 경영에는 더더구나 보태 줄 말이 없었지만 낙동강연안개발 사업으로 잘 나가던 횟집이 뜯기고 어디론가 이전을 해야 할 판국에 다달아았다. 결국 그는 남지읍에 머물러 영업을 계속할 생각을 접고 도천면의 송진으로 이전을 했는데 그게 큰 오산이었던 모양이었다. 사실 남지에서 새로운 상점을 사서 영업을 계속했더라면 더 형편이 나빠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나는 갖고 있었지만 나는 사업에는 문외한이라 조언을 할 수조차 없었다.

양친의 와병, 예상치 못한 영업 부진, 거기다 그는 의욕적으로 창신대학에 입학해서 주경야독, 오후 늦게 마산을 오가며 무리를 해 가면서 문학 공부에 매진했다. 그 사이 시집을 두 권이나 펴냈다.

아마 도천 집을 사는데 빚도 지게 된 모양이었다. 그게 이자에 이자 새끼를 쳐서 불어나기도 했겠지.

그는 창신대학을 졸업한 후 횟집 경영은 부인에게 맡기고 어딘가에 취직을 해서 밤늦게 출퇴근을 했다.

그러던 중 폭풍우가 쏟아지던 2006년 7월 어느날 밤(아마 태풍이었을 것이다), 함안 칠서공단을 지나오면서 가드레일을 들이받는 사고를 당했다. 그 아드님 얘기를 들어보면 사고 후 마산 삼성병원에 입원했을 때 만나 뵈니 의식이 또렷했다고 한다. 그런데 얼마 못가 혼수상태에 빠진 후 영영 깨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이럴 때 흔히 인명재천이란 말을 쓰는데 그게 딱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한창 펄펄 꽁지머리 날리며 일할 나이,

밤낮을 거듭하며 문학공부를 해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시를 써 발표할 한창의 시기에 그는 갑자기 저 세상으로 간 것이었다.

급서 소식은 둘러 둘러 알게 되었다. 그게 또 묘한 것이 경남문협 사무국에서 먼저 알고(고인의 가족이 그쪽에다 연락을 한 모양이었다) 나에게 문의 확인하는 전화가 왔다.

“백희천 시인이 갑자기 별세했다는데·······오늘이 장례날이라는데 알고 있습니까? 장지가 어딘지, 어디로 가야할 지 몰라서요.”

그때까지 나는 까마득하게 모르고 있다가 그 전화에 기가 막히고 믿기지 않았다. 급하게  남지에 사는 지인 몇 곳에 연락을 해 확인을 하였더니 바로 그 날이 고인을 화장하는 장례식 날이었다. 부랴부랴 오후 늦게 송진 싱싱회타운 나루터횟집 상가를 찾아 조문했지만 끝내 그의 꽁지머리는 찾아볼 수조차 없어 마음이 몹시 무거웠다.

그는 창녕에서 태어난 사람이 아니었다. 강원도 인제가 고향이다. 그렇지만 그의 영혼과 그의 몸을 태운 재는 창녕 산하에 묻혔으니 그는 살아서도 창녕사람이고 죽어서도 여전히 창녕사람임에 틀림없었다.

고인의 명복을 빌면서 조금만 더 살았으면 더 좋은 그의 시를 만날 수 있었으리란 아쉬움에 젖는다. ****

 

 

 

 

 

 

백희천((白熙天)

* 호 남강(南江)

* 1953년 강원도 인제군 원통 출생

* 2006년 7월 11일 경남 창녕에서 작고

* 1966년 부산으로 이주 수학

* 1972년 해동고등학교 졸업, 그 시절부터 문학 활동

* 창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 1996년 창녕문학 20집에 시 ‘고향무정’, ‘꽃밭에서’, ‘빈 바다’, ‘가는 세월에’, ‘밤배’ 등 발표로 활동 시작.

* 1997년 <문예한국> 시 부문 신인상으로 등단

* 1978~1984년 제주도 서귀포에서 파인애플 농장경영

* 1985~1988년 아프리카 인도양 소말리아 해협에서 선상 생활

* 경남 창녕군 남지읍 남지리 남포동835-74에서 나루터횟집 경영

* 2001년 창녕군 도천면 송진리 ‘시가 있는 별장’에서 싱싱나룻터횟집 경영

* 한국요식업조합중앙회 창녕군 부지부장

* 한국문인협회, 공간시인협회 회원, 경남문인협회 이사(역임), 창녕문인협회 감사, 부회장(역임), 시 전문지 <시도> 동인

* 2001년 시집 <세월의 언덕에 서서>(도서출판시도) 발간

* 2004년 시집 <눈물꽃>(문예촌) 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