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남전과 함께
창녕군지명사/남지읍

지명유래/ 창녕군 남지읍

by 남전 南田 2012. 5. 11.

 

창녕군 남지읍을 알리는 고속도로 표지판

 

본 원고는 1992년에 편찬 발간된 창녕군지명사』의 <남지읍> 부분을 저본으로 하여 1999년에 편찬된 남지읍지』와 대조하면서 서술부분이 허술, 부족하였거나 누락, 착오 등을 보완 수정하였습니다.

사진은 『남지읍지 것을 사용하였습니다. 사라진 풍물들을 되돌아 볼 수 있을 듯하고 최근 풍물은 후에 사진 촬영하여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남지읍지>에서 - (남지읍 지명유래를 읽기 전 유의할 내용)

"마을의 역사를 고찰하여 보는 본 이동사는 바로 가장 가까운 역사적 사실이면서도 기록으로 남아 있는 자료가 희소하다는데 기술에 어려움이 많았다.

대체적으로 기록물보다는 촌로의 증언과 탐사로 자료를 수집하고 재구성하여 다음과 같은 방침에 따라 기술토록 하였다.

 

 

법정리 안에 있는 행정리는 1), 2)로 번호를 달았고, 행정리 안에 있는 자연 마을과 뜸, 옛 지명들은 [◎]표를 달았으며, 그 외 작은 지명이나 산, 들, 시내, 늪과 저수지, 도로, 교량, 제방, 고개, 골짜기 등은 가장 가까운 자연마을의 끝에 [◆]를 하고 기술하였다. 또 지명의 어원이나 유래도 가급적으로 상세하게 풀이하려고 하였으나 조사 연구의 부족으로 미비한 점도 많아 이 부문에 대한 후세의 깊은 연구가 더 필요하다." (김현우)

 

** 이 원고를 작성하여 <비화가야사람들> 카페에 올려 놓았는데 그 카페가 소멸될 위기에 봉착하여 하는 수 없이 이곳에 복사하여 올립니다. 지명사 원고를 원고를 보관해 두는 차원에서 하는 작업입니다.(2012. 5. 11 김현우)

 

 

 

二. 남지읍(南旨邑)

 

 

 

 

 

영남의 젖줄 낙동강(洛東江)이 낙동강이라 불리게 된 것이 "동쪽으로 흐르는 강" 이라 한데서 연유되었다면 북에서부터 흘러오던 강이 동으로 그 흐름을 트는 곳이 바로 남지읍이다. 또 지리산에서 흘러오는 남강과 어우러져 강폭과 수심이 더욱 깊고 넓어지는 곳도 여기로 풍요하고 순후한 풍토를 지닌 창녕군의 남부 지역이다.

높거나 가파른 산이 없고 유유히 흐르는 강은 넓고 기름진 들을 살찌우니 일찍이 기술 영농이 발달한 곳이 남지읍이다. 특히 예부터 낙동강 수로를 통한 강 상·하류의 각종 산물의 유통으로 남지리의 웃개나루(上浦津 : 雩浦津, 亐叱浦)를 비롯한 용산리의 거룬강나루 (伽倻津 : 岐音江), 학계리의 도흥진(道興津), 월하리의 박진나루(朴只谷津) 등 이름난 나루터가 많은 곳이었다.

남지 팔경을 흔히 다음과 같다 하였다.

 

 

 

 

洛江七里 岐江斷崖 (낙강칠리 기강단애)

上浦歸帆 白沙落鴻 (상포귀범 백사낙홍)

道草暮雲 靈南沃土 (도초모운 영남옥토)

東步滿月 栗林淸風 (동보만월 율림청풍)

 

 

남지읍 소재지(1999년). 바로 앞 강변의 비닐하우스들이 이제는 사라졌다.

 

 

        1) 옛 지명과 변천

 

 

남지읍은 조선 중기에는 2개 방·면으로 나누어져 있었던 것이 합하여 졌는데 특징이 있는 것은 다른 면들은 통합 될 때 같은 군 · 현내(郡·縣內)의 면과 합하여졌으나 이곳만은 다른 군현 소속의 면들이 합하여 진 것이다.

행정구역이 개편될 당시 남지읍의 북부지역은 창녕군(현) 소속으로 남곡면(南谷面)이라 불리고 있었으며, 남부지역은 영산군(현)의 소속으로 도사면(道沙面)으로 불리고 있었다.

『대동지지』와 『해동여지도(보)』는 서로 기록도 같은데 다음과 같다.

 

 

 

昌寧縣 南谷 西南初二十終四十

靈山縣 道謝 西南上同(初二十終三十

 

 

昌寧縣 南谷面 初境二十里終境四十里

靈山縣 道謝面 初境二十里終境三十里

 

 

 

『호구총수』와 『경상도 읍지』의 창녕, 영산현의 『읍지』에는 도사면이 「道謝」가 아닌 모래 「沙」를 써 「道沙面」으로 기록되어 있다. 아마 「謝」와 「沙」가 혼용되어 쓰였거나 후대에 와서 바뀌었다고 본다.

 

 

 

2) 남곡면(南谷面)

 

 

창녕현(군)의 13번째 면이었던 남곡면은 지금의 남지읍의 북부 지역으로 남부에 비하여 산이 많은 곳이기도 하지만 낙동강을 끼고 있어 토지가 비옥하고 살기 좋은 곳이었다.

『호구총수』(戶口總數 :정조 13년, 1789년)의 기록을 보면 촌리가 15개였는데 호구와 촌리명은 다음과 같다.

 

 

 

호수 526호

인구 남자 1,169명 여자 1,785명 합계 2,954명

촌리 청단촌(靑丹村) 오항촌(烏項村) 신남촌(新南村) 수개촌(樹介村)

금곡촌(金谷村) 고곡촌(鼓谷村) 두곡촌(頭谷村) 본남곡촌(本南谷村)

아지촌(阿枝村) 칠현촌(漆峴村) 담곡촌(淡谷村) 마근촌(麻斤村)

반포촌(泮浦村) 대곡촌(大谷村) 월곡촌(月谷村)

 

 

 

남곡면이라 불리게 된 것은 본남곡촌이 남쪽에 있는 골짜기인데서 왔는데 알려 지기는 본남곡촌이 지금의 아지리로 이곳은 수개리나 고곡리에서는 남쪽, 앞에 있는 마을이므로 앞실이라 불리었는데 앞은 곧 남쪽이므로 남곡(南谷)으로 기사(記寫)한 것이다.

광무 원년(1897년)부터 1914년 남쪽의 도사면과 합하여 지기 전까지 존속하였던 동리는 8개동으로 다음과 같다.

 

 

 

시남동(詩南洞) 아지동(阿支洞) 수개동(樹介洞) 칠현동(漆峴洞)

고곡동(鼓谷洞) 반포동(泮浦洞) 대곡동(大谷洞) 월하동(月下洞)

 

 

 

이때 면사무소는 맨 처음에는 수개리에 있었다고 전해지나 본남곡리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흔히 면명과 같으면서 「본」(本)이 붙은 이동이 면의 소재지였던 것으로 보아 본남곡리인 아지리에 면사무소가 있었지 않나 싶다. 그러나 수개리가 진주 창녕을 통하는 큰길이었음을 고려하여 얼마 후에 아지리에서 수개리로 면사무소가 옮겨졌을 것으로 보인다.

 

 

남곡면의 소재지였던 고곡리 전경

 

 

    3) 도사면(道沙面)

 

 

『대동지지』와 『해동여지도』등에는 도사면(道謝面)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행정관리의 손에 의해 작성되었을 『호구총수』나 『경상도읍지』에는 도사면(道沙面)으로 기록되어 있어 같은 시대에 두 명칭이 다 쓰였으나 행정관청에서는 모래 사(沙)를 많이 사용한 것으로 보이다. 「謝」나 「沙」는 서로 음이 같으므로 두루 쓰여 상통한 것이라 하겠다.

도사면의 「道」는 평평한 넓은 들을 뜻하는 자로 쓰여 졌으며,

「沙」는 서(西), 색(索), 해(奚), 신(新), 사(沙), 살(薩), 차(嵯), 사(斯)와 같이 쓰였는데 평연(平衍)한 광원(廣原)을 뜻하는 것인데, 우리 예전에 평평하고 넓은 들의 방면이란 뜻으로 쓰여졌으니 곧 마을을 지칭하는데 그때 이곳 촌리명에는 도사라는 마을이 없었다.

단지 성사리 매전에 도삿골이란 뜸과 골짜기 이름은 남아 있음을 볼 때 남지읍의 남부 일대가 넓고 평평한 들이므로 도사(道沙)로 불리어 진 듯 하다.

『호구총수』의 호구와 6개리를 보면 다음과 같다.

 

 

 

호수 535호

인구 남자 1,249명 여자 1,249명 합계 2,498명

촌리 형사리(荊士里) 차의동(車衣洞) 용산리(龍山里)

조곡리(鳥谷里) 산정리(山亭里) 남지리(南旨里)

 

 

 

조선 말(1897년)부터 도사면이 남곡면과 합하여지는 1914년까지 있었던 동리는 8개동으로 다음과 같다.

 

 

 

성사동(成士洞) 차의동(車衣洞) 용산동(龍山洞) 학계동(鶴桂洞)

마산동(馬山洞) 남지동(南旨洞) 아곡동(鵝谷洞) 당포동(唐浦洞)

 

 

 

도사면의 면사무소는 도산서원(道山書院)이 있었던 마산리에 있었으며, 초대 면장은 김기우(1910.9.1~1914.2.28 재직)였다 하는 기록이 남아 있다.

1914년 4월 1일, 부·군·면 폐치 분합에 의거 남곡면과 합하여지면서 도사면이란 이름도 사라지고, 면사무소도 남지리로 옮겨지게 되었다.

 

 

 

        4) 합면(合面)된 남곡면(南谷面)

 

 

행정구역의 개편이 1910년 일제의 총독정치가 시작될 때 먼저 동리의 개편이 있었으며, 1914년 4월 1일, 부령 제111호로 부·군·면 폐치 분합시에 창녕군과 영산군이 합하여 지게 되었을 때 창녕군의 남곡면과 영산군의 도사면이 합하여지면서 면의 이름은 남곡면으로 되었다.

공식적인 합면이 되기 전인 3월 1일부터 사실상 두 면이 합해져 일을 보기 시작하였으며, 남곡면의 법정 리는 8개리가 되고 영산군 도사면은 6개리로 통폐합되면서 새로 탄생한 남곡면의 법정 리 수는 14개리가 되었으니 지금 현재까지 변동이 없다.

 

 

 

남지리(南旨里) 마산리(馬山里) 학계리(鶴桂里) 용산리(龍山里)

신전리(新田里) 성사리(成士里) 아지리(阿支里) 고곡리(鼓谷里)

수개리(樹介里) 시남리(詩南里) 칠현리(漆峴里) 반포리(泮浦里)

대곡리(大谷里) 월하리(月下里)

 

 

 

2개 면이 합하여지면서 당시 웃개나루(上浦津)로 불리면서 마을이 급속도로 커지고 있었던 남지리 웃개에 면사무소가 옮기게 되니 그 자리가 지금의 남지지서가 있는 곳 남쪽으로 남지리 본동 618- 1번지이다. 이 부근에 주재소를 비롯한 우편국, 소방대, 금융조합 등이 들어서게 되어 면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나 수침을 자주 당하는 곳이므로 면사무소는 1938년에 남지리 서동으로 옮기게 되었다. 면사무소가 옮겨지기 2년전 면의 이름이 남지면으로 바뀌게 되었다.

 

 

 

        5) 남지면(南旨面)

 

 

남지면의 명칭은 면소재였던 남지리에서 비롯되었다.

1936년 4월 1일자로 남곡면이 남지면으로 면의 명칭이 바뀌게 된 것은 우편, 교통의 발달과 발맞추기 위해서였다. 남곡면 안에 남곡이라는 법정 리가 없기도 하였지만 편지의 수발, 당시 개통된 전신 전화의 소통에 큰 지장을 주었고, 면 소재지는 남지리인데 이곳을 찾아오기가 타지에서는 어려워서 혼란을 가중시키고 거기다 남지리가 급속도로 성장, 면세(面勢)가 커졌기 때문에 면 소재지와 면명의 일치가 필요해졌던 것이다.

남지는 웃개나루를 중심으로 한 마을의 이름이 웃개라 불리기도 하였지만 남마라 불리었는 데서「남마」가 남지(南旨)로 기사(記寫)된 것이다.

 

 

 

        6) 남지읍(南旨邑)

 

 

남지면은 해방을 맞기까지 행정 구역의 변화는 없었다. 단지 구 남곡면의 지역 편의를 위하여 호적사무만을 관장하는 고곡출장소를 1944년 개설하였으며, 지금은 고곡출장소를 개축하여 직원수를 늘이고 농협출장소, 지서, 우체국 등도 들어서게 되어 불편이 많이 해소되었다.

1963년 1월 1일 , 면세가 커지자 읍으로 승격을 하게 되었으며, 1970년대의 새마을 사업소도시 정비사업과 비닐하우스의 시설재배의 확대로 가난한 농촌이 모습을 일신하여 부유한 소도시로 탈바꿈하였다.

1938년에 지어진 청사가 노후하고 협소하자 1979년 7월, 새 건물을 개축하게 되었으며, 지금은 14개 법정 리에 38개 행정 리를 가진 읍으로 창녕군에서 두 번 째의 읍으로 자리 잡고 있다.

1990년 말 현재 가구수는 3,850호이며 인구수는 12,682명(남 6,171명, 여 6,511명)이다.

「창녕군 이장 정수 조례」에 의하면, 법정 리와 행정 리는 다음과 같다.

 

 

 

남지리(南旨里) - 본동(本洞) 동포(東浦) 남포(南浦) 서동(西洞)

대신(大新) 상남(上南) 신남(新南)

마산리(馬山里) - 마산(馬山) 홍포(鴻浦) 당포(唐浦)

학계리(鶴桂里) - 학계(鶴桂) 홍정(鴻汀) 명지(明旨) 옥산(玉山)

용산리(龍山里) - 용산(龍山)

신전리(新田里) - 신전(新田) 상대포(上大浦) 영아지(靈阿支)

성사리(成士里) - 성사(成士) 관동(冠洞) 매전(梅田) 학암(鶴岩) 대성(大成)

아지리(阿支里) - 아지(阿支) 창아지(昌阿支)

고곡리(鼓谷里) - 고곡(鼓谷) 두곡(頭谷)

수개리(樹介里) - 수개(樹介)

시남리(詩南里) - 시남(詩南) 청단(靑丹)

칠현리(漆峴里) - 칠현(漆峴)

반포리(泮浦里) - 반포(泮浦) 담곡(淡谷) 마근(麻根)

대곡리(大谷里) - 대곡(大谷)

월하리(月下里) - 월상(月上) 월하(月下) 월평(月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