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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전과 함께
창녕군지명사/남지읍

지명유래/ 남지읍 남지리(2-1)

by 남전 南田 2012. 5. 11.

 

남지대교에서 바라본 남지 시가지

 

 

 

** 창녕군 남지읍 남지리는 내용이 많아 2회로 나누어 올립니다.

 

 

 

1. 남지리(南旨里)

 

 

 

낙동강의 동안(東岸)을 끼고 있는 남지리는 산이 없는 지대로 돌을 전연 볼 수 없는 특징이 있는 강촌(江村)이다. 어디를 봐도 모래뿐인 지대가 남지리인 것이다. 남지리라는 지명은 영산현 남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남마’라 불리었던 강마을(江村)의 기사(記寫)인데 이 마을에 있는 웃개나루(上浦津)가 오래 전부터 유명하여 ‘남마’보다는 ‘웃개’로 더 알려져 있었다.

‘남지리’라는 지명이 처음 보이는 곳은 『호구총수』란 책에서이다. 『호구총수』는 조선 정조 때(1789)의 기록으로 각 방·면의 이름과 인구와 호수를 기록한 책으로 그때 「南旨里」로 기록되어 있음을 보아 사용된 오래 된 지명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일정초기 일본 관리들에 의해 작명된 것으로 알고 있는 이가 많았다.

「南旨」는 ‘남마’의 기사로 남마의 뜻은 ‘남쪽 마을’이란 것이다. 새마을이 새말 - 새마 등으로, 윗마을이 웃말 - 웃마로 변하듯 남마을이 남말 - 남마로 변한 것이다. 남지의 「旨」자는 오래전부터 마을, 말을 나타내는 차자(借字)로 쓰여 왔다. 또 「旨」는 「池. 知. 遲」등과 함께 고원(高原)의 뜻 「티」(峙)의 차자로도 쓰였으며, 터(址)의 뜻으로도 사용되어 왔다.

군내에서 「旨」를 쓰는 마을이 여럿 있으니 장마면의 산지(山旨), 대합면의 평지(坪旨), 모지(茅芝), 등지(燈旨) 등이다.

남지의 대명사로 사용되는 ‘웃개나루’는 『동국여지승람』「영산현」에는 칠원현(漆原縣)의 우질포(亐叱浦)로 기록되어 있다.

 

 

「매포진(買浦津)이 (靈山)현의 남쪽 23리에 있다. 또한 멸포(蔑浦)라고도 하는데 곧 칠원현 우질포 하류다. 」

(買浦津 在縣南二十三里一名蔑浦卽漆原縣亐叱浦下流)

*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7 영산현 산천

 

 

라 하여 매포진의 설명에 우질포가 나오는데 영산현의 땅이 아니라 칠원현의 땅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보통 나루터가 강 좌우안에 있어 그 명칭에 있어서는 양쪽에 같이 불리어짐에 따라 칠원현 쪽에 기록되어 그렇지 이쪽에 인가가 없어 그런 것이 아니다.

따라서 칠원 웃개, 영산 웃개로 구분하는 지명이 동시에 불리어 지고 있었다. 웃개의 ‘개’는 강이나 냇물이 드나드는 물가를 말하는데 대체적으로 우리 지방에서는 벌, 늪, 저습지 등 갯가 물가와 그 주변의 들판까지 퍼함하여 광범위하게 ‘개’란 망르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웃개는 곧 ‘위에 있는 물이 드나드는 물가(강가)의 들’이라 하겠다. 계성천이 낙동강에 유입되는 곳을 한개(大浦)라하고 웃개는 그 서편 상류 쪽 개(浦)이었으므로 그렇게 불리어진 것이다.

칠원현 란에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으니 칠원 북쪽의 나루임을 알 수 있다.

 

 

 

漆原縣 - 「亐叱浦 在縣北三十里 卽靈山縣岐音江下流 」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7 칠원현 산천)

宜寧縣 - 「亐叱浦 在新繁縣東十五里 世于川及洛東江交流處 」

 

 

 

또 『동국여지승람』 권31 의령현의 산천란에도 우질포가 나오니 칠원현과 함께 낙동강 연안에 웃개가 두 곳 있었던 것이다.

우질포(亐叱浦)는 웃개의 음차(音借)로 「亐」는 그 음이 「우」이며, 「叱 」은 약음차(略音借)로 「ㅅ 」이며, 「浦 」는 그 훈(訓)이 개 포이니 「亐叱浦」는 바로 ‘웃개’로 읽는 것이다. 또 ‘영남지도’에는 「亐浦津 」으로 나오니 이것도 일음일훈차(一

낙동강과 웃개나루

音一訓借)로 「우개 - 위개- 웃개 」로 읽는다.

『대동여지도 』에는 ‘상포’(上浦)와 ‘우질포’(亐叱浦)가 다 나오는데 상포는 강 건너 칠원 땅으로 표시되어 있어 어느 정도 근사하나 우질포는 동보포(同步浦 : 지금의 동갯들)와 함께 상당히 북부에다 표시되어 마치 영산 서쪽으로 보이게 하고 있다. 의령현의 우질포는 유어면 가항리 웃등대앞의 나루인 의령군 낙서면 아근리의 윗개를 가리키는데 이 윗개나루는 옛 신번현의 지역으로 이곳도 남지의 웃개와 지명이 같았으므로 우질포로 사용된 것이다. 따라서 두 곳의 우질포는 곧 웃개, 상포를 뜻하는데 남지 웃개와 지명이 같았던 것이다. 그런데 김정호는 『대동여지도 』에서 이를 박진나루 근처로 표시하면서 창녕 땅에 속하는 듯 경계 표시를 해 놓았다.

우질포 외에 웃개를 우포(雩浦)로 기사한 것이 있으니 『경상도지지』「영산현읍지」와 『축산군지』에는 웃개를 음차하여 우포, 우포진으로 기록되어 있다

.

 

 

雩浦津 在治南二十里道興津下流

 

 

 

상포(上浦)는 그 훈을 따라 웃개를 기사한 것이다.

남지리의 고지명으로 우질포와 상포 외에 대포(大浦)와 동보포가 있다. 『해동여지도 』에 남지 지역에 대포라 표시되어 있다.(창녕군지(1984) p67) 이것은 계성천이 낙동강으로 유입되는 지점이 한개라 불리었는데 ‘한개’(큰 개라는 뜻임)가 「大浦」로 기사된 것이다. 또 동보포는 지금의 동갯들(東浦)로 한자로는「同步浦 」로 기사되었다. 뒤에 동보포는 「東步浦」로도 쓰여졌으나 모두 강의 동쪽에 있는 개(東浦), 갯가, 들이라는 뜻으로 되었다.

 

 

따라서 구전되어 오기는 "남지에 개가 다섯 마리 있다." 하였다. 즉 웃개(上浦), 한개(大浦). 동개(東浦, 도는 샛개)를 위시하여 무닝개, 넙개(鴻浦) 등을 말하기도 한다. 이 지명들은 여러 줄기의 샛강과 지류들이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며, 낙동강의 연안 일대로 벌과 갯가임을 말해준다 하겠다.

 

남지리는 구한 말 까지는 100여호 남짓의 강가 마을이었으나 북부 남곡면과 남부 도사면의 합병으로 남곡면 소재지가 됨과 동시에 늪과 저습지로 버려져 있던 영남수리들의 개간과 동갯들, 강가 모래밭의 개간으로 답작지대의 중심지로 되자 급속도로 발전하게 되었다.

 

남지리에는 읍사무소를 비롯한 각종 기관 학교들이 있으며, 구마고속도로 개통과 새마을 사업의 일환인 소도읍 정비로 소도시 면모를 갖추게 되었으며 비닐하우스 시설재배의 확대로 소득이 높은 곳이 되었다.

해방 전후 남지리는 남지와 백암 2개동이었으나 분동되어 행정 리는 7개 리로 본동, 동포, 남포, 서동, 대신, 상남, 신남 등이다.

 

 

 

남지대교위에서 바라본 본동(지금은 강변쪽의 인가가 많이 철거되고 제방이 들어섰다.

 

 

◉ 1-1 본동(本洞)

 

 

 

웃개라 불리던 마을로 남지리의 동쪽 지역으로 행정리 명칭을 정할 때 남지리의 본 마을이라 하여 본동이라 하였다. 웃개장이라 불리는 남지시장이 있는 마을이며, 남지리의 발원지라 할 곳이다.

최초의 웃개 마을은 서낭나무가 있었던 정량걸 근처로 1800년대에 20여 호가 있었다고 한다.

현 남지파출소 남쪽편에 남곡면 사무소가 있다가 지금의 서동으로 옮겨져 갔으며 남지지서가 1911년 10월에 주재소로 설립된 후 지금까지 한 자리에 있으며, 길 건너에 농협의 전신(前身)인 금융조합과 조금 떨어져 우체국 등이 있었다.

 

# 지금은? --- 1990년대 낙동강연안개발사업 시행으로 강변 마을 상당부분이 철거되어 하천부지가 되었고 제방이 축조되었다.

 

 

 

 

◎ 웃개(上浦)

낙동강이 용산리에 이르러 샛강과 지류 등으로 갈라져 흘러 남지리 동쪽에서 계성천을 만나 합류 낙동강에 유입되는 곳을 한 개(大浦)라 하고 그 상류쪽 개(浦)이었으므로 웃개, 상포라 하였다. 웃개를 음차하여 우질포(亐叱浦)라 하였는데 「亐」는 「우」, 「叱」은 약음차로 「ㅅ 」이므로 상포와 똑 같은 뜻이다.

샛강이 낙동강에 흘러 들 때는 모래가 깊게 패어져 굴강을 이루게 되니 그 흔적이 본동 마을 안에 아직도 남아 있으며, 남포동 쪽에도 남아 있어 예전에는 이곳으로 강물이 넘나들었다 한다. 또 본동 동편에 굴강이라 불리는 곳이 있으니 마구선 도로 공사와 동포수리 개간 때 일부는 매몰되기도 하였으나 상당부분이 깊게 파인 채 남아 있다.

낙원재(洛原齋 : 瑞興金奎煥 書塾, 今無)가 있었다.

 

 

 

◎ 아래깍딴 웃깍딴

본동의 남쪽 강변으로 강과 샛강이 만나면서 지대가 푹 꺼진 곳이므로 굼티기라 한다. 이곳 서편에 예전에 웃개 나루터가 있었던 곳으로 동편 땀을 아래깍딴, 서편(남포동쪽)을 웃깍딴이라 불렀다.

 

 

 

 

◆ 웃개장(南旨市場)

보통 사람들이 웃개의 장을 욱개장이라 발음하는데, 위치는 본동과 남포동에 걸쳐 있다. 닷새에 한번씩 서는 장으로 웃개나루의 번창으로 예전부터 강 상·하류의 물화(物貨)가 많이 거래되던 장이었다. 많은 배가 상하류로 다녔는데 소금을 실으면 큰 배는 600가마, 작은 배는 200가마를 싣고 다녔으며, 강을 이용한 교통의 발달로 웃개나루는 크게 번창하여 한때는 선창가의 주막들만도 수 십개가 있었으며, 마방(馬房)도 여럿 있었다 한다.

욱개장이라 속칭되는 남지시장은 1928년에 허가되어 2일, 7일에 장이 섰다. 그러나 3.1운동 때 남지장날 장터에서 만세를 불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일정 때 정식 허가가 나기 이전 조선시대부터 장이 섰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주로 거래된 상품을 보면, 외래품으로는 소금, 생선류와 해산물, 각종 피륙과 잡화, 농기구, 솥, 칼, 놋그릇 등이었고, 지방 생산품으로는 목재와 땔감나무(장작과 솔가지, 숯) 쌀, 보리, 콩, 곡류와 면화, 고추와 채소 등 여러 가지 농산물이 주류를 이루고 사기그릇과 독, 항아리 등 도기들과 싸리제품과 죽세품(소쿠리, 도리깨) 등이 가근방에서 생산되어 공급되었다. 또한 강과 못을 끼고 있어 민물 고기잡이도 성행하여 수 십 척의 배도 사람을 건네주는 나룻배와 함께 본동 앞 강변 나루터에 항상 정박하여 있었다.

# 지금은? --- 1990년대 낙동강연안개발사업 시행으로 장터의 대부분이 철거되고 남은 곳은 상설시장 건물이 들어섰다.

 

 

 

 

◆ 웃개나루(上浦津)

본동과 남포동에 걸쳐 있는 나루터로 강 양쪽 마을을 다 웃개나루라 불리어서 『동국여지승람 』에는 칠원현 조에 「亐叱浦」로 기록되어 있다. 양쪽 다 웃개라 혼동을 막기 위해 이쪽은 영산현의 웃개라 하여 영산 웃개라 부르고, 저쪽은 칠원 웃개라 부른다.

강 건너 함안군 칠서면 용성리 진동과 통하는데 남지철교를 가설하기 이전에는 강을 건너는 유일한 나루터였다. 또 6.25동란 때는 남지철교의 폭파로 이 나루를 통하여 차와 사람들이 건너 다녀야 했으므로 선창가 일대에는 큰 상권(商權)이 형성되기도 하였다.

이 나루터도 1988년 큰 홍수에 나룻배가 떠내려가 유실되고, 선객(船客)도 줄어들자 폐쇄되고 말았다. 지금은 민물 횟집이 들어서 번창하고 있다.

# 지금은? --- 1990년대 낙동강연안개발사업 시행으로 나루터는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 새미걸

본동의 가운데 남지장 곡물전 남쪽으로 공동 우물이 있었던 거리를 새미걸이라 한다.

이곳 우물은 물맛이 조금 짠데 물이 짜므로 이곳 사람들은 다른 곳에 가서 물을 마셔도 배탈이 잘 나지 않는다 하였다. 해방 전후 오랫동안 본동 200여 가구가 이 우물에 의존하였으므로 식수가 모자라 강물을 길어다 먹기도 하였다.

지금은 상수도 펌프 수도가 각 가정마다 있게 돼 물을 길어다 먹는 이가 없어져 이 우물은 자연히 폐쇄되고 그 흔적만이 시장통 가운데 남아있다.

 

 

 

 

◆ 정량걸(亭廊-)

웃개의 서낭나무가 있는 거리이다. 이곳은 집이 몇 집 없었을 예전에는 동리의 바깥 북쪽이었겠으나 지금은 마을 한가운데 중심부이다. 매년 정월에 동제를 지낸다.

괴목나무 큰 서낭나무가 두 그루 있었으나 6.26가 나던 해에 자연사하여 새로 심었다. 이곳 서편에 낙원재가 있었다.

정량은 정자나무를 말하는데 나무를 이곳에서는 낭구, 낭이라 하는데 따라 정낭의 변화이다.

# 지금은? --- 1990년대 낙동강연안개발사업 시행으로 정량걸도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 쌀전걸(米廛-)

웃개장터 중 입구에 있는데 쌀과 각종 곡류를 사고파는 거리를 쌀전걸이라 한다. 당초의 쌀전걸과 지금의 쌀전걸이 각각 다른데 옛 쌀전걸은 지금의 포목전 근처였다. 지금도 사람들이 쌀전걸이라 그냥 부르면 지금 현재 장소를 말하나 구 쌀전걸이라 하면 지금의 포목전일대를 말한다.

지금 곡물전이 서는 곳은 일제시에 큰 창고가 있었던 곳이다. 지금은 장이 서지 않는 날에는 주차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쌀전걸 이외에 불리어 지고 있는 장터로는 생선을 파는 어물전이 남쪽에 있고, 그 북쪽 넓은 터에 포목전과 옷전이 있으며. 쌀전 초입에 채소전이 있다. 웃개장은 예전부터 골목장이라 하여 왔는데 본동 남포동 일대의 골목골목마다 장꾼들이 전을 벌리고 있어 골목장이라 불린 것이다.

# 지금은? --- 1990년대 낙동강연안개발사업 시행으로 장터는 반쪽이 되었는데 그나마 재래시장의 쇠퇴로 겨우 명맥만 유지되고 있다.

 

 

 

◆ 외똔집 백구마당

남지리의 동북쪽 입구에 있었던 넓은 마당이다.

본동 북쪽 마을과 남지제방(피수대) 사이에 외따로 떨어져 강물에 침수가 되지 않을 만치 높은 돈대(墩臺)를 만들고 그 위에 지은 집이 한 채가 있어 이를 외똔집이라 불렀고 그 집 바깥에 있는 마당이 아주 넓어서 이름이 났는데 키 큰 버드나무가 많아 쉬기도 좋았고 아이들의 놀이터도 되고 동리의 입구였으므로 사람들이 외똔집 백구마당이라 불렀다.

백구마당의 백구는 「바깥」의 이곳 지방말이다. 외똔집은 6.25때 불에 타 없어졌다.

이 앞에 동리의 입구를 알리는 나무로 새를 만들어 붙인 솟대가 서 있었다

이곳 일부가 지금은 남지공설운동장이 되었으니 옛 백구마당의 현대화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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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지공설운동장(南旨公設運動場)

해방 전후에 남지공설 운동장은 지금 신남동 마을이 들어선 곳에 있었는데 1965년 6월 대홍수 때, 본동 남포동 일대 가옥이 침수로 인하여 전파(全破)되자 이들 이재민을 위한 집을 그곳에 짓게 되자 운동장이 현재 위치로 옮겨오게 되었다.

옛 외똔집 백구마당과 근처 논밭을 닦아 운동장을 만들었으니 피수대(남지제방 · 지금은 남지 진입로) 남쪽이다.

# 지금은? --- 1990년대 남지대교와 낙동강연안개발사업 시행으로 운동장 터에 아파트가 들어섰고 그 흔적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운동장은 남지철교 강변으로 옮겨져 아주 넓게 남지체육공원으로 조성되었다.

 

 

 

 

◆ 남지둘(南旨 避水臺)

본동 북쪽에 있는 제방으로 외똔집 백구마당 동북쪽에서 시작하여 서쪽 남포동과 상남동의 경계를 이루고 예전 활터가 있었던 곳에서 끝났는데 이 제방은 낙동강 홍수를 막는다기보다는 홍수가 나서 인가가 침수되면 이곳에 올라와 물피난을 하라는 목적으로 축조되었다. 1939년에 착공, 40년에 완공하였는데 길이는 1,108m이었다. 1950년대에 제방 양쪽끝에서부터 연장하여 제방이 쌓아졌는데 동편은 계성천 남송교까지 축조되어 마구선 국도와 병행하고 있다.

이 둘은 남녀가 데이트를 즐기는 곳으로 동편은 사랑둘이라 하고 서편은 이별둘이라 하기도 한다. 이 제방이 시가지 복판 마구선 도로와 만나는 곳에서 목조다리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6.25동란 이후 무너질 위험성이 있어 이 육교를 철거한 후 지금 까지 육교 가설이 되지 않았다.

# 지금은? --- 1990년대 제방을 헐어내고 도로를 만들기 시작하여 2000년대에는 피수대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제방은 남지철교 부근에서 고속도로까지 인가를 우회하여 새로 만들어졌다. 1992년 본동 동쪽에 새 다리인 남지대교가 건설되었다.

 

 

 

 

◆ 남지 다리걸

남지둘이 마구선 국도와 만나는 곳에 제방길을 잇는 목제의 육교가 있었다. 이 다리 아래는 떡, 엿 등을 파는 장사꾼들이 있었으며, 남지의 번화가이며, 명물로 등장하였던 곳이다. 이 육교는 6.25동란 때 위험하여 철거하였다.

 

 

 

◆ 둘끝

남지둘의 동쪽 끝으로 본동의 입구이기도 하다. 지금은 제방이 동쪽으로 이어지며 마구선 국도와 연결되었지만 전에는 제방과 국도가 삼거리를 이루고 있었다.

이곳에서 삼재배가 성하였던 예전에는 삼솥을 걸고 삼을 삶기도 하였다.

 

 

 

◆ 굴강(堀江)

본동 동쪽 강변으로 예전에 낙동강의 샛강이 동갯들을 거쳐 이곳으로 흘러 강에 유입되었다. 이 샛강은 계성천의 물이 범람하기도 하고 또 학계리와 마산리 앞을 흘렀던 강물이 쏟아졌던 곳이어서 아주 깊게 땅이 파여 있었다. 동갯들을 개발, 동포수리를 만들 때 낮은 수로를 막고 북쪽 계성천으로 물이 흐르도록 하여 지금은 본동 하수(下水)만이 강으로 유입되는 역할만 한다.

# 지금은? --- 1990년대 들판이 하천부지화되고 남지대교가 건설되면서 흔적 없이 사라졌다.

 

 

 

◆ 하천들

본동 동쪽 마구선 국도 남쪽의 낙동강변의 하천부지 들을 하천들이라 부른다. 해마다 홍수 때면 많은 펄이 쌓여 비옥한 토지가 되어 수박, 배추등 소채재배지로 이름났다.

# 지금은? --- 1990년대 들판이 하천부지로 편입되어 농사를 짓지 못한다.

 

 

 

동포동 마을 전경(옛 피수대 위에서)

 

◉ 1-2 동포동(東浦洞)

 

 

 

동갯들이 있는 마을이므로 본동에서 분동되면서 행정리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본동 북쪽 남지 피수대(현재 도로)를 경계로 하여 읍사무소 동편 길을 사이에 두고 서동과 맞닿아 있다. 구한말에는 인가가 없는 들판이었는데 점차 인가가 들어서게 되었는데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였던 지역이다. 동포국민학교 자리에 왜인 자녀만을 위한 남지소학교가 있었고, 양곡 수탈을 위하여 세운 정미소를 겸한 식량영단 창고가 있었다. 초창기 남지국민학교인 남지보통학교가 처음에 이 마을에 섰다가 지금 현재(대신동)의 자리로 옮겨 갔다.

지금은 동포국민학교, 남지농협, 농촌지도소, 축협, 경남은행 남지지점 등이 있다.

 

 

 

◎ 변전소(變電所) 앞

동포동의 북쪽 지역으로 변전소가 있는 근처로 농토가 대부분 이곳을 지나야 있기 때문에 마을 사라들의 내왕이 잦아 지명화 되었다.

인가가 웃개와 뚝 떨어져 3, 4호가 있었던 뜸이었는데 최근에는 도로를 따라 연결되었다. 1987년경 변전소는 철거되었고, 남지지구 택지개발사업 추진으로 이 일대가 무지개아파트 등 상가와 아파트촌으로 변했다.

 

 

 

◎ 솔밭껄

동포국민학교 뒤의 뜸으로 이 근처에 3, 4호가 살았다. 무덤이 있는 솔밭이 있으므로 솔밭걸이라 불리었는데 젊은이들이 많이 놀로 오던 곳이다. 이 근처도 이제는 아파트가 들어서고 인가가 기존 마을과 연결되었다.

 

 

 

 

◎ 뒷땀

흔히 속칭하기를 최호군집뒤라 하였는데 솔밭껄 북쪽에 있었던 뜸으로 들 가운데 조금 높은 곳에 5, 6호가 살았다. 그 중 길가 제일 큰 집이 최호균이라는 부잣집이 있었고 마을 뒤이므로 뒷땀, 들복판집이라 하여 들집 등으로 불리었다. 1960년대부터 한 집씩 이사를 나와서 결국 1집만 남았다.

# 지금은? --- 1990년대 이 일대의 들판이 토지구획정리가 되어 신시가지가 조성되어 새로운 건물과 상가가 들어섰다.

 

 

 

◆ 비석걸

동갯들의 남쪽이며 동포동의 동편입구 거리로 이곳에 동포수리 공사에 공이 컸던 인물인 정대수의 공로비가 서 있었으므로 비석걸이라 한다. 남지둘이 끝나는 지점으로 본동과 동포동의 입구이기도 하다.

마구선 국도와 남지둘이 만나는 끝지점으로 본동과 동포동의 입구이기도 하다. 최근 새로운 낙동강 교량(남지대교) 완공되고 제방을 헐어 도로를 개설하면서 비는 철거되었으며 이 일대가 오거리로 조성된다.

# 지금은? --- 1990년대 남지대교가 건설되고 피수대가 도로가 되면서 이곳은 오거리 교차로가 되었고 시외버스정류소가 북쪽에 들어섰다.

 

 

 

◆ 보통학교(普通學校) 터

남지국민학교가 제일 먼저 세워졌던 터로 동포동의 동편 지역으로 고곡리로 가는 1043번 지방도의 동쪽, 지금 천주교회 근처이다. 이곳의 학교는 1921년 국립 남지보통학교로 개교하였는데 홍수가 들면 피해를 입는 저지대였는데 1933년, 34년 연달아 물이 들어 교사(校舍)가 전복될 위기에 빠져 1936년 봄에 대신동으로 이전하였다.

 

 

 

◆ 방아간 앞

마구선과 1043번 지방도로와 나누어지는 세거리길 근처에 전에 신식 정미소인 방앗간이 있었으므로 방아간 앞이라 한다. 속칭 정대수방아간 앞이라 하기도 하는데 길 양쪽에 큰 정미소가 두 곳이 있었다. 지금은 주유소와 농협 창고가 있다.

 

 

 

◆ 한개들(大浦)

남지리의 동쪽 끝(도천면과 경계지점)에 있는 개(浦)를 한개라 부르는데 아마 예전에는 계성천의 물이 여기에서 남쪽으로 바로 낙동강과 합류되었던 게 아닌가 한다. 이 일대의 들을 한개들이라 한다. 한개는 계성천이 낙동강에 유입되는 지점으로 추정되나, 지금 현재는 계성천이 이곳에서 구부러져 도천면 송진리 앞에 가서야 유입된다.

 

 

◆ 맹경수리

맹건수리라고도 하는데 동포수리 일대를 말하는데 동포수리가 생기기 전에 불리었던 지명이다.

 

 

 

 

◆ 동갯들(東浦 -)

『동국여지승람』 산천 편에 나오는 옛지명으로 동보포(同步浦 在縣西二十里)라 하였다.

동보포(同步浦)의 ‘同’의 훈은 ‘한가지’ ‘步’는 그 훈이 ‘걸을’ 외에 ‘나루터, 물가’이므로 낙동강과 계성천의합류지점이 ‘한개’이니 이를 음훈차 기사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동갯들, 동포(東浦)라 불러 남지리 동쪽편에 있는 개, 들이란 뜻으로 동갯들이라 한 것이다. 늪지와 밭이 많았던 들이었으나 해방 후 개간 경지정리 등으로 논이 되었으며 들판 가운데로 고속도로가 지나가고 남지 진입로가 생겼다.

 

 

 

◆ 남송교(南松橋)

남지리와 도천면 송진리을 잇는 교량으로 계성천 위에 가설된 것이다. 남지 사람들이 영남 수리들에 가려면 꼭 건너야 하는 다리였으므로 이곳 지명으로 항상 불리었다. 남지 쪽에 주막집이 있었다.

6.25 때 다리 가운데 포탄을 맞아 큰 구멍이 나기도 하였는데 1989년 마구선 확포장 때 새로 만들었다.

 

 

 

◆ 한개 물끼장(-揚水場)

남송교 북쪽 동포수리들에 물을 대기 위해 설치한 양수장을 지칭하는데 물끼장은 물퍼는 기계가 있는 장소란 뜻으로 이곳 사람들의 말이다. 제방이 설치되고도 수 십년간 운영되어 오다가 용산리 낙동강변에 대규모의 양수장이 설치되자 폐쇄되었다.

지금은 이곳 서편에 분뇨처리장이 들어섰다.

 

 

 

◆ 개둑

계성천이 흐르는 북쪽 일대의 천변(川邊)을 가리킨다. 목초가 무성하여 소를 먹이러 아이들이 많이 다녔다. 개둑가라 하기도 한다.

 

 

 

◆ 중칫걸

동갯들 들 한가운데를 중칫걸이라 불렀다. 「중」은 가운데 ‘中’이며 「치」는 고개 ‘峙’이니 동갯들 들가운데 가장 높은 지대임을 말해준다. 지금 구마고속도로 휴게소 동쪽 농막이 있는 근처이다. 경지정리 전에는 밭이었다.

중칫걸 동편 한개쪽의 논을 잉어처럼 생긴 지형이기 때문에 잉어 배미라 부른다. 또 그 옆에 물고기를 잡는 살을 매어 놓은 곳이 있어 살매기라 불리었는데 남송교 서쪽 500m쯤 되는 곳이다.

 

 

 

◆ 무닝기

물이 넘어 가는 곳을 물넘기라 하는데 지금 고속도로 진입로가 있는 곳으로 이곳은 계성천의 물이 홍수 때 넘어오는 곳이었다. 또 마산리 홍포에서 흘러오는 물이 이리로 넘어 가기도 하였는데 ‘물넘기’가 물넘개, 무넘기, 무닝기로 변하였다.

경지정리를 하기 전에는 전부 밭이었고 아래쪽은 저습지로 농사를 짓지 못하고 버려져 있었다.

 

 

 

◆ 웃한개

무닝기 북쪽으로 마산리에서 쏟아지는 물이 넘나들었던 계성천 갯가이다. 한개의 위쪽이므로 웃한개라 부른다.(상대포와 무관)

 

 

 

 

◆ 계성천(桂城川)

남지리의 동쪽을 흐르는 큰 내로 창녕읍 옥천리에서 시작하여 계성면과 장마면을 지나 영산면과 남지읍과 경계를 이루며 흘러 도천면 송진리에서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동갯들의 동편을 싸돌아 흐르므로 해마다 침수를 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제방을 축조한 이후 수침이 없어졌는데 예전에는 계성천 본류는 월령앞 - 송진리 북쪽이었으며 지금의 수로는 용산리에서 시작하여 동으로 흘러내린 낙동강의 또 다른 샛강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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