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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군지명사/남지읍

지명유래/ 남지읍 남지리(2-2)

by 남전 南田 2012. 5. 11.

남지읍 남지리(2-1)에 이어서 남포동, 서동, 대신동, 상남동, 신남동 등의 지명유래를 올립니다.

 

 

남포동 앞 강 건너 낙동강변의 경치 좋기로 소문난 제왕담(경양대) - 왼쪽이 웃개나루터다.

 

 

◉ 1-3 남포동(南浦洞)

 

 

본동의 서편이며, 동포동의 남쪽으로 남지리의 남쪽 마을이므로 본동에서 분동되면서 남포동이라 행정리 명칭으로 불린다. 웃개나루터가 있는 곳이라 횟집이 많고 고기잡이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강물이 오염 폐수화되어 잉어가 잡히지 않자 양식한 고기로 하는 횟집만이 성황을 이루고 있다.

남지지서앞 로타리 남쪽에서 선창가로 이어지는 길이 본동과 남포동간의 경계이며 북쪽은 남지둘(피수대), 서쪽은 학계리와 마산리에 닿은데 강가의 들판이다.

왜정 때 이곳에는 거대한 면화공장과 정미공장이 있었는데 면화공장은 군내의 목화를 다 모아 들여 타면(打綿)하였다.

# 지금은? --- 1990년대 낙동강연안 개발사업의 추진으로 나루터부터 철교까지의 강변 인가가 대부분 철거되고 제방이 축조되어 동세(洞勢)가 크게 줄어들었다.

 

 

 

남지철교 쪽으로 바라본 남포동, 지금은 왼쪽 인가들이 대부분 철거되고 제방이 축조되었다.

 

◎ 남포동 굼티기

남포동의 남쪽 강가 선창가로 나가는 길에 있는 깊이 파진 굼턱진 강가 일대 마을이다. 이곳은 옛날 강물이 드나들었던 개(浦)로 최근까지도 낮은 곳에 물이 늪처럼 괴어 있었던 곳으로 아직도 그 흔적이 역력하다. 남포동의 물이 이리로 빠져 나간다.

아마 이곳은 동포와 대칭하여 남쪽에 있는 개라 하여 남포(南浦), 남마라 하는 지명의 근원이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 지금은? ---한동안 지대를 높혀 주차장으로 사용했으나 1990년대 인가가 철거되고 하천부지가 되면서 흔적 없이 사라졌다.

 

 

 

◆ 지서앞 새미껄

본동 새미껄에 대칭되어 지서앞 새미껄이라 불리는데 남지지서앞 지금의 로터리 서북쪽에 공동 우물이 있었다. 남포동 사람들이 물을 길어다 먹은 공동우물로 수량이 풍부하고 물맛도 좋았다. 이 우물 역시 상수도와 개인 펌프시설에 밀려 폐쇄되었다.

 

 

(1970년대 남지지서앞에서 동포동 쪽으로)

 

◆ 기뭉조합(金融組合) 앞

지서앞 새미껄 남쪽으로 금융조합사무실이 있었던 곳이다. 금융조합이 기뭉조합으로 와전되었다. 장날이면 잡화전과 농기구와 죽세품전이 열리던 곳이었는데 지금은 반찬, 소채를 파는 저잣거리로 바뀌어 이제는 흔히 저자껄, 지자껄이라 불린다. 금융조합 건물은 농협으로 되었다가 헐려 버리고, 지금은 상가아파트가 들어섰다.

 

 

 

(1999년, 남지지서 앞에서 철교쪽으로)

◆ 소전걸(牛市場)

남포동에는 예전부터 소와 가축들을 사고팔던 우시장이 있었다. 우시장이 있었던 곳은 3곳인데 모두 소전걸이라 부른다.

제일 오래된 소전껄은 남포동 동리 복판으로 우시장 개설 당시는 동리의 바깥이었겠으나 인가가 점차 모여드니 동리 밖으로 나갔다. 지금 정부도정공장(이곳도 2000년대에 아파트가 들어섰다)이 있는 동쪽의 터였는데 6.25동란 몇 년 후에 도정공장과 제재소의 서쪽으로 옮겼다.

그러나 이곳도 인가가 들어서자 다시 남포동의 서단(西端)인 상남동 들(철교땀 북쪽)에다 우시장을 옮겼다. 이 근처에 장꾼을 상대하는 음식점과 인가가 들어 서 있었는데 그 우시장도 이제는 폐시되고 말았다.

옛 우시장을 ‘묵은 소전껄’이라 구분하여 부르기도 하였다.

 

 

◆ 공동산(共同山) 비탈

남포동 굼티기의 서편으로 마을과 들이 만나는 지대로 이곳은 예전에 남지리의 공동묘지가 있었던 지대였으므로 공동산 비탈이라 하였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남지철교와 학계리, 용산리에 이르기까지 강 연안에는 솔이 무성하게 자라는 솔밭이었다.

이곳 공동묘지는 인근 솔밭이 개간되면서 학계리 지금의 남지공동묘지로 이전 되었다. 지금도 소채 재배를 하는 밭이 있으며, 인가가 촘촘히 들어섰다.

# 지금은? --- 1990년대에 하천부지화하면서 농토는 사라졌다.

 

 

◆ 욱개둑(上浦-)

공동산 비탈 서편에서 남지철교 너머까지 들판이다. 밭으로 개간되기전에는 솔밭이라 한다. 개간후 땅콩을 많이 심어 ‘남지땅콩’이란 명성을 얻었다. 처녀무덤이 있다.

 

 

◆ 욱개둑 처녀무덤

남지철교 동쪽편의 강가에 네모난 무덤이 하나 있는데 이것을 욱개둑 처녀무덤이라 부른다.

예전에 남지에 김참봉이란 사람이 살았는데 그가 젊었을 때, 어느 해 큰 홍수가 났는데 밭에 나가보니 강물에 밀려 시체가 떠내려 왔는데 여인의 시체였다. 불쌍하게 여겨 그 자리에 묻어 주었는데 며칠 후 꿈에 그 여인이 나타나 백배 치사를 하면서,

" 저는 처녀인데 어르신은 앞으로 고추농사를 잘 하시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김참봉은 자손이 귀한 집안으로 아들 얻기를 항상 바랐는데 그 후 처녀의 예언대로 두 아들을 얻고 또 손자를 여러 명 보게 되었는데 다 처녀의 덕이라 한다.

이 전설이 점점 발전하여 지금 남지에 비닐하우스 고추농사가 잘 되는 것도 김창봉과 이 처녀의 덕이라 하니 강가의 처녀무덤은 예전 홍수 피해를 새삼 알려 주는 것이기도 하다.

# 지금은? --- 1990년대 들판이 하천부지화 하면서 강변 무덤도 흔적 없이 사라졌다.

 

 

 

◆ 선창(船艙)가

강가 웃개나루터를 선창가 또는 남지 지앙담(帝王潭)앞이라 부르기도 한다. 강 상하류에서 싣고 오는 화물들이 많아 객주집이 있었고, 집들이 많았다. 또 땔감인 장작과 솔가지, 숯 등이 배로 실려와 선창가에 빈틈없이 쌓아져 있곤 하였다.

강 건너있는 절벽 제왕담은 경양대라고도 하는데 이곳 절벽은 강이 아주 깊어 소를 이루며 회수(回水)가 도는 위험한 곳으로 소문나 있고, 절벽 아래로 용왕이 살고 있다는 전설이 전해오는데 음력 2월에 치성을 드리는 사람이 많았다.

최근 나룻배를 이용, 강을 건너려는 사람들이 줄어들어서 나룻배가 다니지 않게 되었다. 그렇지만 강 건너 제왕담과 푸른 강물이 어울려 자아내는 운치와 절경은 횟집을 찾는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고기잡이 하는 어선들도 많았다.

# 지금은? --- 1990년대 낙동강연안개발사업으로 나루터 인가가 철거되고 하천부지로 변하면서 그 흔적은 사라졌다. 현재 유채밭과 간이골프장이 조성되었다.

 

 

6·25때 파손된 남지철교

 

◆ 남지철교(南旨鐵橋)

남지리의 서남쪽에 낙동강 위에 걸려 있는 철교로 1933년에 준공된 것이다. 마구선을 연결하는데 길이는 340m이다. 강 남쪽 용화산과 어울려 아름다운 절경을 이루었으며, 강 건너 남지의 선비 간송(澗松) 조임도(趙任道)가 심었다는 절벽위의 은행나무와 함께 이 인근은 남지면 소유의 공원으로 남지공원이 조성되었던 곳이다.

 

『빛벌문화 』에 이곳 경치를 노래한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洛江長流 南旨橋는 現代 文明 자랑이라

굽어본 千尋綠水(천심녹수) 바라보니 錦繡屛(금수병)

一帶 淸江은 長天에 一色이고

潭心岩影(담심암영)은 船遊(선유) 놀이 좋을시고

 

 

 

 

◆ 낙동강(洛東江)

남지읍을 감싸고 흐르는 강으로 낙동강은 북쪽에서 흘러오다 동쪽으로 머리를 틀어 흐르는데 낙동강이라 불리게 된 것이 동쪽으로 흐른다 하여 불리게 되었다 하니 그 시작이 바로 남지읍에서 비롯되었다 할 것이다. 낙강(洛江)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창녕군지』에 승지 성안의(成安義)가 지은 「洛江詠」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洛江詠 (낙강영)

 

薄言作勝遊 于彼碧江頭

西洞紅花老 南郊綠草柔

神淸風外笛 興溢鏡中舟

惜景歸來晩 荊門月色浮

 

 

잠간 뛰어난 놀이를 말하노니 저 푸른 강 머리였노라

西洞에는 꽃들이 다 지는데 南쪽들엔 푸른 풀이 부드럽도다.

들려오는 젓소리에 마음은 더욱 맑고 맑은 물 배위에선 흥이 더욱 넘치네

풍경에 마음 홀려 돌아옴이 늦었더니 내 집 사립문에 달빛 높이 떠 있노라

 

 

 

 

 

 

옛 피수대위에서 바라본 서동

 

◉ 1-4 서동(西洞)

 

 

남지읍사무소가 있는 마을로 예전에는 본동, 동포, 남포동이 ‘웃개=남지’라는 한 마을이었다면, 이곳은 그 마을들과는 뚝 떨어져 들 가운데 생긴 마을로 ‘모래에=백암’이라불리던 곳이었다.

예전에 불리어 지기는 모래밭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모래에, 백암(白岩)이라 하였던 것이 행정리 명칭으로는 남지리의 서쪽 마을이라 하여 서동이라 하였다. 1930년대에 30여호가 살았다고 하며 해방될 무렵에는 100여호가 되었다. 남지읍사무소가 이 마을에 오면서 큰 동리로 발전했다.

마을 가운데 큰 정자나무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도 오래된 마을임을 알 수 있게 한다. 동편은 동포동과 남으로는 신남동, 상남동 등과 골목들을 경계로 하며 서쪽은 대신동과 북쪽은 들을 사이에 두고 마산리 홍포와 마주하고 있다. 전에는 130여호였으나 지금은 230호가 된다.

 

 

◎ 모래에(白岩)

남지에서 용산리와 마산리로 가는 삼거리길 들 가운데 있었던 마을로 모래밭 동리라 하여 모래에라 불리었다. 이를 백암(白岩)으로 기사(記寫)하였으니 그 뜻이 흰바위이니 바위가 부스러져 모래가 되었으므로 비슷한 뜻이라 하겠다.

후일 사람들은 백암을 흰더미라 부르기도 하였다. 1930년대에 30여호가 살았다고 한다.

 

 

◆ 정자나무걸

옛 백암 최초 뜸이 형성된 곳으로 정자나무가 있어 불리어진 지명이다. 예전에는 여기를 지나 홍정으로 가는 옛길이 있엇다고 한다.

 

 

◆ 읍사무소 앞

남지읍사무소 앞을 가리킨다.

 

 

 

 

홍정앞 아파트에서 바라본 대신동

 

◉ 1-5 대신동(大新洞)

 

 

서동의 서쪽 마을로 그 일부는 마산리의 지번을 가졌는데 서동에서 분동되었다. 서동에서 분동되면서 새롭게 된 큰 동리라 하는 뜻에서 대신동이라 하였다.

남지국민학교, 남지중학교, 남지여자중학교가 있으며, 남쪽 편에 남지고등학교가 있다.

그 외 남지우체국, 남지전화국과 남지농협대신지소와 공판장, 창녕농지개량조합남지사무소(옛 영남수리조합)등이 있다.

 

 

◆ 대신동 네거리

남지철교에서 북쪽으로 뻗은 거리와 동포동쪽에서 용산리로 가는 지방도가 만나 이루는 사거리로 농지개량조합 앞에서 서쪽편 거리이다.

 

 

◆ 주택(住宅)

1970년대 새마을 사업의 일환으로 새로운 주택단지를 동리 끝인 남지국민학교 앞에 조성하여 새로운 마을이 생겼는데 약칭하여 주택이라 한다.

 

 

◆ 국민학교 앞

남지국민학교 앞은 지칭하는데 남지 - 의령간의 도로가 지나간다.

 

 

◆ 중학교 앞

남지중학교가 있는 지역으로 이곳은 남지리 구역이 아니라 마산리 구역이지만 행정적으로는 대신동에 속한다. 중학교가 옮겨오면서 형성된 마을로 지금은 농협 공판장이 들어서는 등 비닐하우스 재배농민들이 모여들어 새로운 상권을 형성하였다

남지중학교가 옮겨오기 전에는 남지고등학교가 있었다.

 

철교산에서 바라본 상남동 일대, 바로 앞은 이제 인가나 들이 없어지고 체육공원이 들어섰다.

 

 

◉ 1-6 상남동(上南洞)

 

 

동포동 서쪽으로 북쪽은 신남동, 서동과 마주하고 있는데 서쪽은 들판으로 마산리, 학계리로 이어진다. 동포동으로 부터 분동되었다. 남지리의 윗쪽이라 하여 상남동이라 하였다. 땅콩의 집산지이며 가공 출하로 유명한 마을이다. 전에 호밀(대맥)과 땅콩을 많이 심었던 들판을 마을 앞에 끼고 있어 예전부터 남지의 명산물로 땅콩을 꼽게 하는데 공헌한 마을이다. 지금도 땅콩을 까는 공장이 여러 곳 있다.

남지고등학교가 마을 서편 끝에 있다.

 

 

◎ 철교땀

남지철교 머리 길이 굽어드는 양편 길가에 있었던 뜸으로 5, 6호가 길 양쪽에 흩어져 살았다. 큰 술집도 있어 색주가로도 유명하였다. 6.25 동란이후 한두 집씩 떠나 한 동안 빈터가 되었으나 최근에는 주유소와 음식점과 횟집들이 들어섰다.

# 지금은? --- 1990년대 인가가 모두 철거되고 제방과 하천부지가 되었다.

 

 

◆ 밤숲(栗林)

상남동 북쪽, 남지 우체국 남쪽 사이에 예전에 인가는 없었고 밤나무 숲이 있어 이 일대를 밤숲이라 불렀다. 그 후 일본인들이 살기 시작하여 밤숲이 사라졌으나 해방 전까지 밤나무 고목이 많이 있었다고 한다.

 

 

◆ 활터(弓道場)

새 소전껄의 동편으로 활터였다. 강남정이 있었는데 주위에 인가가 들어서고 사람의 왕래가 많아지자 남지철교 건너 칠서면 계내리로 옮겼다.

# 지금은? --- 1990년대 남지철교 옆 하천부지 체육공원 동쪽 편으로 궁도장이 옮겨왔다.

 

남지제일교회에서 바라본 신남동

 

 

◉ 1-7 신남동(新南洞)

 

 

1965년, 남지리 시가지 전부가 물에 잠기는 대홍수가 있었다. 이때 침수지역의 오래된 가옥들이 무너지는 피해를 많이 보았는데 특히 피해가 컸던 지역은 본동과 남포동이었다. 이들 이재민이 수해 안전지역으로 집단 이주한 곳이 바로 신남동이다. 원래 이곳은 남지공설운동장이 있었던 곳으로 운동장을 본동 북쪽 밭을 사서 이전하고 세멘 불록 가옥을 54동 건립하였던 것이다.

 

당시 운동장에 헬리콥터를 타고와 내려 마중나온 인사들과

악수하고 있다.

본동 둘끝에서 황토물이 넘쳐 흐르는 낙동강을

바라보며 현황보고를 받고 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다녀갔으며 이 사실들을 새긴 유래비가 마을 남쪽에 있다. 전에 운동장이었을 때 남쪽에 무덤이 있는 솔밭이 있어 사람들의 휴식공간으로 인가가 있었다.

 

 

솔밭

남쪽에 있었던 솔밭으로 운동장에서 경기나 행사가 벌어졌을 때 쉼터가 되었다.

 

 

구 공설운동장 터

신남 마을이 생기기 전에는 이곳에 남지공설운동장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