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창녕군 남지읍 용산리 지명유래를 올립니다.
함안땅에서 바라본 거룬강(기음강)- 저 멀리에서 흘러온 낙동강이 왼쪽 남강 물줄기와 만난다.
오른쪽 백사장, 들판이 바로 용산리 땅이다. 나룻배가 다녔다. 왼쪽이 의령 지정면.
4. 용산리(龍山里)
용산리(龍山里)는 남지읍의 남서부에 있는 마을로 낙동강과 남강이 합류하는 지점의 동쪽에 있는 법정 리이다. 큰마을은 용산 본동이며 그 외 작은 망을로 아곡, 창날, 안골 등이 있다.
동서양의 문명이 다 큰 강의 유역에서 시작되었는데 옛 변한(弁韓) 또는 가야(伽倻)가 강유역에서 시작되었으며 바로「가야, 가라」라는 나라 이름이「가라」「가람」이라 불리는 강(江), 강의 분류(分流), 강의 갈라짐에서 기인되었다고 한다.
용산리의 서쪽, 낙동강과 남강이 만나는 곳의 옛 지명은 바로「가라」라는 나라 이름의 발상지, 발원지라 할 수 있으니 이곳을 이두식으로 기음강(岐音江), 가야진(伽倻津)이라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기음(岐音)」을 「가」로 읽으니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기음강과 용단(가야진 명소) 등 이곳의 지명을 찾아볼 수 있는데 기록은 다음과 같다.
岐音江 在縣西二十八里昌寧縣甘勿倉津下流與宜寧縣 鼎岩津合處古稱伽倻津
「기음강 (영산)현의 서쪽 이십팔리에 있다. 창녕현 감물창진 하류인데 의령현 정암진과 합쳐지는 곳이니 옛날에는 가야진이라 일컬었다.
岐音江龍壇 祀典稱伽倻津溟所春秋本邑致祭
「기음강용단 사전(祀典)에는 가야진 명소라고 하여 봄 가을로 본읍(本邑-영산현감)에서 제사를 지낸다고 쓰여 있다.」
(신증 동국여지승람 권24 영산현 산천)
‘가야진’「伽倻津」 또는 ‘가야진 명소’「伽倻津 溟所」등의 ‘가야’「伽倻」란 지명과 ‘기음강’「岐音江」의 ‘기음’「岐音」은 같은 말인 「가라」 「갈」의 차자(借字)이다. 「갈, 곳갈」(관·冠)로 쓰여 지면서 ‘변’「弁」으로 기사 되어 변한(弁韓」의 어원이 되며, 「가라」의 차자로 ‘가야, 가락’「加倻, 駕洛」으로 쓰여 나라 이름이 되었다.(고가정주·양주동 p348~349)
『삼국유사』에 보면 후기 육가야로 창녕이 비화가야(非火伽倻)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가야 가락」이 「가라, 」의 음 훈차(音訓借)인데 그 뜻은 「分 · 岐」의 뜻이라 하였다. 변한을 「가르한」으로 읽으며, 낙동강 하류 분기지대(分岐地帶)에 있으므로 이 칭호를 얻은 것이라 하였다. 낙동강 하류는 강류(江流)가 여러 갈래로 분기(分岐)되므로 기음강(岐音江)으로 기사(記寫)되었으니 기음강은 「가」, 강의 고훈 「」은 이에 연원(淵源)이 되었다.
또 세종 때 편찬된 『경상도지리지』「계성현」란에 낙동강이 남강과 합치는 곳을 기음강이라 한다고 하였고, 기음강에 가야진 명소(溟所)가 있어 수령이 제사를 지내던 곳이라 하였다. 『세종실록 지리지· 경상도지지』「계성현·桂城縣」란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어 위의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洛東江 流過縣西與宜寧來大川合流稱岐音江
守令行祭所一 岐音江 伽倻津溟所之神 在縣相去二十八里
(고가정주·양주동 p348~349)
가야진은 곧 가라, 가야의 나루이니 창녕의 비화가야의 군사들이 주둔해 있었을 곳이며, 변방을 지키며 싸워 전사하는 군사들도 많았을 것이다. 따라서 이 가야진은 수비하는 장병들의 무운을 빌기 위해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올리게 한 곳이라 였다. 이곳에 그 전통이 신라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그대로 남아 영산현감으로 하여금 춘추로 제사를 드리게 하니 곧 기음강 용단, 가야진 명소이다.
예전 육상 교통이 어렵고 길이 험하여 자연히 강을 이용하여 화물을 운송하였는데 이곳 기음강 가야진은 강을 이용하는 수상교통의 요충지로 비화가야시대부터 아니, 그 이전, 오래 전부터 취락이 형성되었을 것이므로 세종조의 기록에 나타나는 남지읍의 가장 오래된 지명이다. 비화가야가 멸망당하고 나서는 이곳은 초기 신라의 가장 서쪽 변방으로 신라와 백제와 마주치는 경계이기도 하였고, 그 후 고려 때는 바다를 건너와 해적질을 하던 왜구들을 막는 병사들의 주둔지, 전초기지였을 것이다.
그러한 연유로 인하여 기음강 용단은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낙동강의 순조로운 수운(水運)과 범람을 예방하기 위해 계성현감(나중에는 영산현감)이 직접 나와 제사를 지내며, 날이 가물면 용단에 와서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기도 하였다. 제사가 있는 봄과 가을에 나라에서는 향촉과 사람을 보내왔다고 한다.
이 기음강은 또한 임진왜란 때 홍의장군 망우당 곽재우 장군의 의병군이 첫 승리를 거둔 곳이기도 하여 그 종요로움을 더한다. 이 기음강전투는 선조 25년(1592년) 5월 4일에 있었는데 임진왜란이 터진지 21일 후의 싸움이었고 조선군의 첫 승리였다. 이때 강 연안에 매복하여 있던 의병들은 강을 올라오는 왜선(倭船) 14척을 쫓고 승리를 거두었다.
기음강의 북쪽 산등에 곽재우 장군이 타던 말을 묻었다는 말무덤(실은 의병들의 무덤으로 추정됨)이라는 고분이 있어 마분산(馬墳山)이라 불리니 이 일대는 역사적으로 뜻있는 곳이다.
행정 리는 단일 리로 용산 1개 리가 있다.
용산리 마을 전경
◉ 4-1 용산(龍山)
‘용’「龍」은 풍수지리에서는 산줄기가 구불구불 힘차게 뻗어 내려오는 것을 지칭하는데 마을을 감싸고 있는 용암산이 용과 같으며, 마을 앞 똥메는 용의 알 곧 여의주(如意珠)라 하는 등 용과 관련되는 곳이므로 용이 사는 마을이라 하여 용산이라 불리었다고 한다.
용은 물이 깊은 곳에 사는 영물이니 마을 앞은 낙동강이 흐르는 곳이며, 가야진 용단이 있으니 용산이라 불릴 만한 곳이다.
1500여년에 진양 강씨, 영산 신씨 등이 살게 되었다 한다.
망모암(望慕庵 : 咸安趙任道 所築 祭閣)이 있다. 이 재실은 조선시대의 큰선비 간송(澗松) 선생의 종가로 이곳에 백일홍 고목이 있는데 간송 조임도 선생이 심은 나무로 종가의 운이 쇠하면 말라 죽어 원줄기나 가지 잎이 없어졌다가 몇 년 후 가운이 돌아오면 움이 터져 옛날처럼 꽃이 핀다고 『축산군지』 이사(異事)에 기록되어 있다.
趙澗松先生祠宇內 有紫微一樹 本先生稙而 累世經驗則 其宗家運否則其木死
幾年間之無枝葉 幾年後其家運得則 或一邊生芽 依舊立云云而
이곳 경치를 읊은 간송 선생의 시가 『축산군지』에 실려 있는데 다음과 같다.
玉川洞
溪流如玉石如枰 水弄潺湲坐濯纓
安得移家專一壑 薛蘿烟月送餘生
흐르는 시내는 옥(玉)같이 맑고 반석(盤石)은 장기판처럼 반듯한데
손끝으로 물소리 내며 갓끈을 씻노라
어찌하여 집을 옮겨 이 구럭에 온전히 잠겨
설라연월(薛蘿烟月)속에서 한 세상을 지낼꼬.
◎ 안골[內谷]
용산리 본동 동쪽 골짜기 안에 있는 뜸이므로 안골이라 한다.
영산 신씨가 많이 산다.
◎ 알개실[鵝谷, 阿谷]
용산리 서쪽 골짜기 안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 앞에 낙동강 물이 드나들었고 최근까지 늪이 있었는데 이곳에 오리 거위들이 많이 날아와 살아 알개실이라 불리었다고 한다. 그러나 알개실을 한자로 ‘鵝谷‘ 거위 아(鵝)를 씀에 따른 부회로 보이며 골짜기 안의 늪, 또는 개의 안에 있는 마을, 안개[內浦]실이라 불린 것이 ‘알개실’로 변한 것으로 보인다. 또 지형에서 온 이름으로 알처럼 둥근 골짜기, 개이므로 알개에다 골짜기 마을이니까 ‘실’이 붙어 알개실이 되었다고도 한다. ‘실’은 골짜기, 마을이다.
조선조 말에 아곡동(鵝谷洞)으로 관가에서 사용하였으나 최근에는 ‘鵝’자가 복잡하므로 간편하게 ‘아곡·阿谷’으로 사용하고 있다.
◎ 창날[倉津, 創津]
알개실 입구 마을인데 옛지명은 기음강 나루, 가야진으로 불리었다. 요새는 창나루, 창나리로도 불리는데 나리(나루)의 축약으로 창날이라 변한 것이다. 이 나루터에는 창고가 있어 ‘창고가 있는 나루‘ 곧 창날, 한자로 쓰기는 창진(倉津)이라 했다 한다. 그러나 또 다른 이는 마을 산이 전도산(前刀山)이고 이곳 지형이 강을 향해 창처럼 생겨서 창진(槍津)이라 하는 이도 있다.
예전에 낙동강 강물이 지금 마을이 있는 산협(山峽)에 붙어 흘렀을 것이며 따라서 나루터도 마을이 있는 산자락에 있었을 것이다.
이 나루를 건너면 의령군 지정면 성산리이다. 이 나루도 선객이 드물어 폐지 일보 직전에 있다. 창날 마을에 정자나무가 있어 그 근처를 정자나무터라 한다.
# 지금은? -- 강을 다니던 나룻배는 없어졌고, 나루터와 주막집도 사라졌으며, 1990년대에 제방이 생겼고, 최근 4대강 살리기 공사가 한창이다.
기음강에, 낙동강을 가로질러 만들어진 공사용 임시 다리- 용산에서 의령 지정으로 통한다.
◆ 기음강(岐音江)
창날의 옛지명으로 지금은 단순한 나루터 정도로 거름강, 거룬강이라 부르고 있는데 이것은 기음강의 와음이다. 기음강은 낙동강과 남강의 합류지점으로 가야, 신라시대뿐만 아니라 조선 선조 임진왜란 때도 곽망우당의 첫 전승지로도 유명하다.
기음강은 분기(分岐), 강을 가리키는 고어 「가, 가라」가 기음(岐音)으로 차자되고 이것이 기음강으로 불리어 지면서 세월에 따라 와전 변화되면서 거룬강, 거름강, 지름강 등으로 변하였다. 이 모두 ‘가’이 ‘그름’으로 와전된 것이다.
또 어떤 이는「걸어온 강」이란 뜻이 있다고 하였으나 신라 이전부터 기음강, 가라로 불린 것이 변화되었음이 확실하므로 틀린 해석이라 하겠다. 그것은 가야진(伽倻津)이란 지명이 있어 더욱 명확하다.
임진란 때 의병을 일으킨 곽재우장군은 여기에서 서쪽으로 5리 정도 떨어진 의령군 지정면 돈지에 살고 있다가 의병장으로 나섰으며, 낙동강으로 올라오는 왜군을 맞아 싸우기 위해 기음강으로 나와 매복하고 기다리고 있다가 첫 승리를 거두게 된 역사 깊은 장소이다. 홍의장군 곽재우는 임진란 발발 이후 계속 상·하류를 장악하면서 낙동강을 통하여 상류로 올라가고자 하는 왜군과 군수물자의 보급을 저지 방해하는 작전을 펼쳐 크게 승전고를 울렸던 것이다. 그래서 전후(戰後)에 망우당 곽재우는 남지의 동쪽인 도천면 우강리의 청암에서 한평생을 살면서 강과 함께 나라를 지켰던 것이다.
간송 조임도의 ‘망모암’ 기문에 의하면 조간송 선생이 ‘숭정 계유년(1633) 봄에 함안 내내에서 기강으로 옮겨 살게 되었다.’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기음강, 기강이 용산리의 옛 지명으로도 사용된 듯하다.
◆ 주막걸
용산 본동에서 창날로 가는 도로변에 주막이 있었던 곳이다. 지금은 마을회관이 있고 들로 나가는 요지로 항상 사람이 많이 모인다.
◆ 용암산(龍岩山)
용산리의 북쪽을 감아 싸고 있는 산으로 높이가 90m인데 도초산의 서쪽 줄기이다. 산 줄기가 서쪽으로 흐르다가 남으로 굽어들어 강을 두고 멈추니 용의 여의주라 하는 똥뫼[獨山]가 마을 앞에 있으며 용이 강물에 사는 형상이라 마을이 흥한다고 한다. 강 건너 용화산과 대응하여 어느 쪽은 암용[雌龍]이요 어느 쪽은 숫용[雄龍]이라는 말이 전해온다.
◆ 용제단(龍祭檀)
용의 알[龍卵]이라 불리는 동그란 독산이 마을 앞에 있는데 이곳에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가야진명소가 있었다고 한다. 이곳에 제단이 있어 봄 가을에 고을 원이 와서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낙동강의 평안한 수운(水運)과 홍수, 그리고 가야진에서 주둔하였던 군사들의 무운 등을 비는 제단이었다. 후에 날이 가물면 기우제도 지내기도 하였다.
◆ 용지덤[龍池山]
마을 서남쪽 작은 똥뫼로 가야진 명소가 잇는 용제단 동쪽 아래로 역시 용과 관련된 늪(용지)이 있어 용지덤이라 부른다.
◆ 용지(龍池)
용지덤 동편 마을 앞에 있는 늪으로 상당 부분dll 논으로 개간되어 전보다 축소되었다.
◆ 말무덤산[馬墳山]
용산리 서편 강가에 있는 산으로 산의 동편은 알개실이고 서편은 낙동강이 흐른다.
170m 되는 산의 정상의 아래봉우리에 곽재우 장군 말의 무덤이라 전해오는 불리는 거대한 고분이 있어 말무덤산, 마분산(馬墳山)으로 불린다.
임진왜란 때 산위로 올라오는 왜군을 맞아 의병들이 말의 꽁무니에 벌통을 달아 산 아래로 쫓아 보내 적진을 교란시키고 의병군이 돌진하여 승리를 거두었으나 그 말은 그만 죽고 말았으므로 이곳에 묻어 주었다고 전해 온다.
그러나 전해오는 얘기와는 달리 말무덤의 ‘말’은 말(馬)이 아니라 어떤 명사의 앞에 붙어 ‘크다, 큰’을 나타내는 접두사 ‘말’로 ‘말매미’, ‘말벌’ 등등의 용례와 같이 ‘큰 무덤’이란 뜻이라고 본다. 즉 커다란 무덤으로 불리어지는 이곳에 있는 고분을 말무덤이라 한 것이다. 아마 임진왜란 때 전사한 의병들을 합장한 큰 무덤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말무덤’에 관련된 말 이야기는 후대의 창작으로 보인다. 고곡리에도 구진산성과 관련 이와 같은 이야기가 전해 온다.
이 산 아래 강변 절벽에 양수장이 있다. 용산리에서부터 동쪽으로 동갯들에 이르기까지 남지들 일대의 논에 용수를 공급하는 농지개량조합 양수장과 남지 상수도 양수장이 있었는데 상수도 양수장은 강 건너 칠서 상수도 물을 공급 받게 됨에 따라 폐쇄되었다.
창아지 앞에서 남쪽으로 바라본 개비리- 멀리 보이는 강가 하얀 구조물이 용산양수장이다.
◆ 개비리
창날 마을 서쪽에서부터 마분산 아래 일대에 낙동강을 따라 북쪽으로 영아지와 창아지까지 이어지는 절벽이다. 낙동강 강변을 따라 아슬아슬한 절벽의 길이 10여리 계속되는데 이곳을 개비리라 한다.
흔히 이곳을 개나 다닐 수 있었던 벼랑이라 하여 개비리라 불리었다고 하는데 실은 그렇지 않다. 개비리의 ‘개’는 ‘갯가’ ‘강변’ ‘물가’를 지칭하는 말인 ‘개[浦]이며 ’비리‘는 벼랑, 낭떠러지, 절벽의 이곳 토박이말이다. 그런데 얘기를 좋아하는 이들이 개와 관련된 듯한 얘기를 지어내 말하기도 하는데 모두 잘못 전해진 얘기일 뿐이다.
용산리에서 창아지 - 칠현리로 이어지는 길로 1969년에 확장공사를 하였으나 아직도 미완이 상태로 있었으며 인적이 끊겨 수목이 길을 가로 막아버렸다. 다만 창날서 양수장까지만 차가 들어갈 수 있다.
# 지금은? -- 개비리의 아름다운 경치를 보려고 찾아오는 사람이 늘어 길이 조금 틔였다. 그러나 전에는 자전거가 다녔으나 아직 통행에 지장이 많아 도보로 다녀야 한다.
◆ 용산양수장(揚水場)
마분산 서쪽 개비리에 있는 창녕농지개량조합 용산양수장이 있는 곳을 말한다. 이곳에 거대한 양수장이 있는데 용산리, 학계리, 마산리, 남지리 일대 들에 물을 공급한다. 양수장에 딸린 집이 있고, 염소를 키우던 목장의 관리사가 있었다. 남지상수도 양수장도 있었으나 몇 년 전 폐쇄되었다.
◆ 알개실 산
도초산 줄기로 알개실 북쪽에 있는 산으로 높이는 136m이다. 이 산을 넘으면 신전리이다.
◆ 창날 뒷산
창날 북쪽에 있는 야산으로 마분산의 남쪽 줄기인데 높이는 89m이다. 6·25때 유엔군이 진지를 구축하고 공산군과 싸운 곳이다. 한자로 전도산이라 기록되었다.
◆ 알개실고개
알개실에서 북쪽으로 신전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알개실 고개라 부른다.
◆ 금장골(金場谷)
알개실 동북쪽 골짜기로 1934년 경 이곳에 금광이 발견되어 금을 캤던 골짜기이다. 금장은 곧 금광을 말한다. 이 광산은 금의 생산량이 적어지자 폐광되었다.
◆ 알개실 늪[鵝谷池]
알개실 마을 남쪽에 있었던 늪인데 예전에는 강물이 드나들었다고 한다. 최근 논으로 개답하여 그 면적이 줄어들었다. 그러나 개간된 논도 자주 침수가 되어 버려져 있는 곳이 많았다.
◆ 용산늪(龍山池)
용산 마을 앞에 있는 늪으로 알개실 늪과 마찬가지로 침수가 자주 되던 곳이었으나 용산제방의 축조로 피해가 줄어들었다.
◆ 용산제방
창날 앞에서 수로와 함께 시작되어 옥산 앞에 이르는 제방으로 마을 앞에서는 남지 - 의령간 도로로 겸용되고 있다.
◆ 청송(靑松) 앞들
용산 동남쪽 낙동강변의 들을 말하는데 ‘청송’은 강 건너 함안 땅인데 바로 그곳의 앞이므로 강 건너 지명을 그대로 사용하여 「앞들」이란 어미만 첨가한 것이다.
◆ 합강정(合江亭) 앞들
합강정은 강 건너 절벽에 있는 정자로 유학자 간송 조임도가 용산리에 살면서 세운 집으로 함안군 대산면 장암리에 있다. 이곳은 낙동강과 남강이 만나는 곳이므로 합강(合江)이라 하였다.
강 이쪽의 지명을 합강정 앞들이라 그대로 쓴 것은 용산리 사람들이 강 건너로 내왕이 잦았기 때문이다. 청송 앞들의 서편이다.
# 지금은? -- 청송 앞들이나 합강정 앞들은 모두 1990년대 낙동강연안개발사업 추진으로 농사를 짓지 못하는 하천부지로 편입되었다.
** 다음은 남지읍 신전리 지명유래를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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