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신돈과 옥천사(4)
* 불국토(佛國土) 창녕의 산과 사찰
창녕은 산천이 빼어나 불국토(佛國土)라 할만한 국보와 보물 등 절터와 불교 유적이 여기저기 산재해 있다. 지금도 골골마다 사찰이 들어서 독경 소리가 끊이지 않으니 과히 부처님의 가호가 넘쳐나는 고을이라 하겠다.
그 영향으로 일세의 고승으로 고려 때 공민왕의 사부로 왕사로 이름을 떨쳤던 편조대사 신돈의 출현도 가히 고산준령이 즐비한 옥천골짜기의 산들인 화왕산, 비슬산, 영축산의 정기와영험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창녕의 산들과 사찰들이 신돈에게 음으로 양으로 영향을 미쳤을 것이므로 산과 사찰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화왕산에는 관룡사가, 그 북쪽 안심골에는 용흥사, 비슬산에는 옥천사가, 영축산(註1)에는 보림사와 대흥사가 있었다.
(註1) 영축산(靈鷲山)은 한자로 “수리 취鷲”를 쓰지만 발음은 천축(인도)의 부처님이 설법한 산과 같아 영축산으로 발음하는데 양산 통도사의 뒷산도 또한 영축산으로 발음한다.(창녕군지명사)
최상수(崔湘壽) 관룡사 주지께서 일찍이 <창녕문화>(1989. 제10호)에 “창녕지역의 옛 지명과 산명에 관한 소고”에서,
“가야, 비사벌과 영축산, 화왕산, 비슬산, 함박산 등의 산명, 영산 창녕 고암 계성 사리 등의 지명은 …… 불서에서 볼 수 있는 어휘”라 했으며,
“부처님이 계시는 영축산을 중심으로 화왕산은 향공양, 영산 함박산은 꽃공양, 옥천사가 있었던 비슬산은 소리 공양으로 구조시켜 놓았다.”고 하여 법화경 영산회상에서 부처님께 바친 공양위의(供養威儀)라 하였다.
이러한 자연환경에서 태어나 자라고 어릴 때부터 절에서 공부하였으니 신돈은 옥천사 뿐만 아니라 바로 옆 관룡사와도 인연이 깊고 특히 영축산 보림사, 대흥사 등 인근 사찰의 스님들로부터도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특히 고려 충렬왕 15년(1328년)에 인도승 지공(指空)이 보림사 반야루에서 반야경을 강론했는데 그 시기가 신돈의 성장기라 당연히 찾아가 지공의 설법을 듣고 깨달은 바가 많았을 것이다.
“화엄십찰(華嚴十刹)” 비슬산 옥천사 인근에는 가야 고찰(古刹) 화왕산 관룡사가 자리하고 있다. 창녕은 비화가야의 땅으로 신라와 병합되기 전 일찍이 가야불교가 전래하였다고 하였다. (창녕문화 p14, 1988, 제9호 향토사학자 김세호)
관룡사는 화왕산의 동쪽 산줄기 관룡산(구룡사)의 병풍암 남쪽에 자리하고 있는데 신라 시대 창건이 아니라 가야 시대 창건한 절로 가야불교의 연원(淵源)으로 보아 오랜 역사가 스며 있다고 볼 것이다.
관룡사에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영조 9년(1733)에 평해군수 강릉진관병마동첨절제사 청천(靑泉) 신유한(申維翰:1681~ ?)이 지은 <火王山 觀龍寺 寺蹟>記 판각을 보유하고 있다.
사적기에는 관룡사의 창건과 그간의 중창한 일들이 기록되어 있는데 임진왜란 때 왜적에게 초토화되어 버렸는데 18년이 지난 광해 임금 9년(1610)에 사람들(衆生)이 폐허화된 절터를 쓸고 가시덤불을 제치고 보니 약사전 만이 있었는데 처마 모퉁이에 불탄 흔적만 있고 큰 탈이 없었다고 한다. 사적기에,
“옛날대로 보수하였는데 대들보 머리의 겹친 나무가 서로 엇갈려 있는 곳에 ‘영화오년기유(永和五年己酉)’란 제자(題字)가 있었다……”라고 하였다.(창녕문화 p8~13, 1989, 제10호 김세호 번역)
“영화오년기유”란 여섯 자가 곧 약사전의 건립연대라고 향토사학자 김세호는 <창녕문화 제9호, 1988)에 밝히고 있다. 영화 오년은 동진(東晉) 목제(穆帝)때 연호인데 가락 이시품왕 4년이오, 신라 흘해왕 때로 서기 349년이다. 가락국 김수로왕이 인도의 아유다가에서 건너온 허황후와 결혼하게 될 때 그 오빠 보옥선사(장유화상)가 따라와 신어산에 동림사와 서림사를 창건하고 가야 땅 전역에 포교 활동을 크게 한 역사적 사실을 아무도 부인하지 않고 있다.
이는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한 시기가 고구려 372년 소수림왕 때, 백제 384년 침류왕 때, 신라는 지눌왕 때 들어왔으나 이차돈의 순교가 있는 528년 법흥왕 때에야 비로소 호국불교로 자리 잡게 된다. 가야 전역의 불교 전래시기와 비교해 보면 고구려보다 23년 전이었고 신라보다는 무려 180년이나 앞섰다.
그런데 대들보의 “영화오년기유” 여섯 글자 외에 창건이란 단어나, 창건자의 성명이나 경위도 없으니 그렇게 신라 법흥왕 이전 이른 시기에 창건하지 않았을 것이니 확실치 않다고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그래서 창건연대를 원효가 이곳에 와서 설법하였던 신라시대로 잡으면서 태종 때(1401년) 대웅전을 지었으며 여러 차례 중건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의상의 화엄십찰인 옥천사가 670년에 조성되었으니 그보다 앞선 시기에 관룡사가 창건되었음은 확실하다.
그러나 가야사에 의하면 수로왕이 보옥선사(장유화상)와 함께 가야 전역 여러 곳에 절을 지었으니 만어사, 호국사, 흥국사, 신국사, 그 외 하동의 칠불사를 비롯해 왕후사, 장유사 등도 가야불교 사찰로 알려져 있다. 창녕은 고대에 신라 땅이 아니라 비사벌, 비화가야로 존속했으며 신라에 병합되기는 진흥왕 16년(555)이였음을 상기한다면 가야 땅에 절이 창건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가야 김수로왕의 일곱 아들이 성불했다는 칠불사가 하동에 있으니 가야연맹 전역(지금의 경남 일대와 경북 일부분) 어느 곳이든 가야고찰이 창건되었을 것이다.
약사전의 여섯 글자의 시기가 349년이니 그때 건립 시기로 보면 관룡사는 가야불교의 사찰 중 하나라 함이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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