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남전과 함께
소설

제1장 신돈과 옥천사(5)

by 남전 南田 2022. 4. 5.

관룡서 천왕문

제1장 신돈과 옥천사(5회)

* 편조왕사 신돈의 진실을 찾아

 

야사를 모은 책으로 유명한 영, 순조때 사람 이긍익이 편찬한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1, “고려말 정사의 문란과 왕업의 일어남고사본말을 읽으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전조 혁명 때의 역사의 기록은 극히 의심나는 것이 있으니……(축수편逐睡篇)

고려사의 여탈(與奪)()은 모두 믿을 수가 없다. 말년의 사적은 더욱 어긋나고 틀렸다…… 마침내 나라를 빼앗았다……. 고려사를 만든 자는 정인지다. 인지가 세종 문종 두 대에 걸쳐……. (상촌집象村集)

여탈 여기서는 역사의 논쟁에 더하고 깎아내리는 것을 말함.

그런데, 오직 저 정인지의 무리가 그들의 좁은 마음으로 사실을 왜곡한 기록을 만들어 가지고 마침내 그것이 사실처럼 되어졌으니, 참으로 슬픈 일이다.(청야만집靑野漫輯)

 

위의 사실로 보아 이씨조선 건국 60여 년 후 정인지 등이 편찬한 <고려사> <고려사절요>의 기록을 믿을 수 없다고 하고 있었다. 특히 편조왕사 신돈의 관련 기록은 그의 행적과 치적을 격하하고 조작하기 위해 철저하게 왜곡하고 부풀리고 깎아내리고 부정한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더하여 신돈의 개혁을 망친 것은 공민왕의 배신 때문이었다. 공민왕은 처음 신돈에게 정권을 맡길 때 뭐라고 맹세했는가? 왕이 손수 맹세하는 글을 써 천지신명에게 증명하기를,

사구아 아구사 생사이지 무혹인민 불천증명

(師求我 我求師 生死以之 無惑人民 佛天證明)

스승께서는 나를 구하고 나도 스승을 구하리라.’ 하였다. 그런데 신돈을 반대하는 무리들이 들고일어나 6년간이나 집요하게 모함하고 헐뜯으며 조작된 익명의 투서를 빌미로 반역으로 몰자 왕은 크게 동요하고 말았다. 신돈을 하루아침에 잡아 귀양을 보내면서 한마디 변명이나 해명을 못하도록 어전(御前)에 부르지도 않았고 아예 만나지도 심문도 없이 곧 바로 처형했다. 그러니 3년 뒤 공민왕 비참한 죽음도 사구아 아구사…….” 그 맹세를 헌 신발짝처럼 버린 배신의 결과이니 왕이 자초한 것이라 할 것이다.

정인지 등이 편찬한 <고려사>는 조선 건국의 당위성을 내세우기 위해 공민왕이 자신 소생 아들에 대해 어물어물하는 사이 신돈의 자식이라 둔갑시키는 단초(端初)를 남겨 가짜 왕씨를 몰아내고 폐가입진(廢假立眞) 혁명을 하는데 이용한 것이다. 고려를 멸망시킨 이유를 정당화하기 위해 신돈의 행적이나 개혁을 폄훼하고 날조하고 깎아내렸다.

<연려실기술>에는 궁중의 은밀한 침실의 일은 외부의 신하들이 자세히 알수 없는 것이다.”(곤륜집崑崙集)라고 옛사람의 기록도 있으니 궁인 한씨의 소생을 신돈의 비첩이라는 여인 반야의 소생으로 몰아버린 것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고려사> “132, 열전45, 반역6“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신돈은 영산 사람으로 그 어미는 계성현 옥천사 여종이었다.(辛旽, 靈山人, 母桂城縣 玉川寺婢也. 幼爲僧)

<고려사절요>에는 한술 더 떠서 옥천사의 종이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편조는 영산현 옥천사의 종이다.(照靈山縣玉泉寺奴也)

왕이 신돈을 진평후로 봉했다.(王封旽爲眞平侯)

 

위의 기록 원문을 보면 처음에는 신돈, 또는 편조라 했지만 그 이하 기록에는 성이나 승명(僧名)의 앞 자를 뺀 ’ ‘한 자만 있어 편조왕사 신돈의 이름자마저 낮추고 훼손하고 폄훼(貶毁)한 흔적이 뚜렷하니 그가 시행한 개혁 조치는 말할 것 없이 행적까지도 악랄하게 깔아뭉개고 깎아내려 왜곡 비하해 버린 것이다. (최근 한글 번역본에는 성명이나 승명을 제대로 복원해 놓았다.)

 

최근 연구 결과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계성현감(?)인 신원경(辛原慶)과 옥천사 비녀(婢女) 박씨 사이에서 난……(신돈의 위민정책…… 김영일, 자료집 p27)

위의 연구논문에 의하면 옥천사의 여종 박씨라고 하고 서자라고도 했는데 고려 시대 이전부터 조선조 말 노비제도가 사라질 때까지 노비는 보통 성이 없고 이름만 불리었다. 그러니 편조를 어릴 때부터 돌보고 키웠을 여인의 성이 박씨라 했으니 그 신분이 절의 여종이 아니라 농민의 아내나 상인(常人)으로 절에 의탁해 허드렛일을 하면서 살았던 여인이었으리라 짐작된다.

또 훗날 신돈이 영산의 세가 신원경의 아들로 밝혀졌는데 그의 처는 임씨(林氏)였다. 어머니 임씨가 옥천사까지 따라와 아들을 돌보지 못했을 것이다. 곧 신돈의 형제인 신예(辛裔)나 신부(辛富) 등을 연이어 낳아 키웠으니 절에 와서 생활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 신원경이 벼슬살이하러 개경으로 갔으니 신돈은 따로 떨어져 성장해야만 했다. 그러므로 옥천사의 여종의 아들이라 종이었다는 얘기도 좀 의문스럽다.

툭 까놓고 시비를 가려보자. 영산 신씨 양반이자 부잣집 아들이 여자와 바람을 피우고 싶다면 집안에 부리는 처녀 여종 중 예쁘거나 미인도 있었을 터이고 술집에 가면 기생들이 줄줄이 있어 마음만 먹었다 하면 얼마든지 희롱할 수 있었을 그런 시절이었다. 또 동리에 반반한 여자가 있어 탐이 났다면 첩으로 들이면 될 것이다.

그런데 하필 심심산골에 있는 절에 가서 여종을 건드려서 아이를 갖게 하다니. 뭐가 아쉬워서. 보통 상식으로서는 어긋나는 일이다.

어쩌다 옥천사의 젊은 여종이 매우 아름다운 미인이라 하더라도 사찰이란 곳이 어떤데 인가? 여종이라면 절에 매인 몸인데 여인(여종)이 함부로 몸을 굴릴 수 있게 자유로운 곳은 절대 아니다. 거기다 높은 윤리관과 도덕성을 강조했던 스님들과 다름없이 절에 사는 스님이 아닌 모든 식구들(남녀 일꾼이나 노비들)까지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철저하게 교육하고 단속했을 것이다. 또 옥천사란 절 식구들이 수백 명은 되었을 터인데 그런데 어쩌다 불공을 드리러 온 사내와 눈이 맞아 잠자리를 어디서 어떻게 했단 말일까? 당장 발각이 되어 엄중한 처벌을 받았을 것이다. 알 수 없지.

신원경이 음욕으로 눈이 뒤집혀서 강간을 자행했는지도 모른다? 여자에 대해 맘만 먹으면 그가 사는 동리에서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 즐길 수 있는 부잣집 아들이 깊은 산골 산사까지 찾아가 그런 짓을 할 리가 없다.

그러니 그 어미는 계성현 옥천사 여종이었다.“ 하는 <고려사>의 기록은 어불성설이고 억지고 날조된 것이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신돈을 어릴 적부터 돌보게 된 여인 박씨가 절의 여종이었고 또 그 아들도 종이라는 것은 악의에 찬 모함이라 할 것이다.

<고려사> <고려사절요>의 옥천사 노비…… 운운 한 것은 신돈의 신분이 서자고 노비인 천민(賤民)이라 깎아내리고 글도 읽을 줄 모르는 무식한 자가 당치도 않은 왕사로 정권을 잡았음을 비난하기 위해 조작한 것으로 다음과 같이 왜곡하고 있다.

<고려사열전>(132)<고려사절요>(28, 공민왕 145월조)의 기록을 보면 기가 막힌다.,

돈은 눈으로 보아도 서()를 알지 못했다(目不知書)

글을 한 자도 알지 못하는데 중이 되어……(目不知書爲僧)

과연 불학 무식한 스님이 그때나 지금이나 있었을까? 어림없는 소리다. 이 구절만 봐도 <고려사><고려사절요>의 왜곡이 철저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절에서 스님이 예불을 올리려면 온통 한문이나 범어로 쓴 불경을 암송하거나 읽어야 하는데 글을 한 자도 모르는 자가 행세를 할 수 있었겠는가? 어불성설이다.

김창현 고려대 교수는 신돈의 삶과 역사적 위상“(학술대회 발표자료집 10~11)에서,

…… 과장된 표현으로 보인다. 그는 어린 나이에 승려가 되었기에 글자와 문장을 배워 불경을 읽을 수 있었을 것이다.“ ”공민왕이 누차 신돈과 담공(談空 ; 에 대한 담론)했다고 하는데 신돈이 아무리 총혜(聰慧)하고…… 들은 풍월로만 불교에 해박한 공민왕과 반야심경의 을 담론해 설득시킬 수 있었을까하면서 승려 편조가 불경 이해 수준이 높고 참선 수행을 해서 득도했다는 사실을 속임수라 단정하기 곤란하다고 밝혔다.

 

각설하고,

국회 청문회에서 흔히 진실을 묻는 질의응답에서 ! 소설 쓰네!” 하는 대답을 종종 보았다. 사실 소설가로써 그 말을 들을 때 조금은 섭섭했다. 소설가는 정말 거짓말만 하는가? 아니다. 사실을 그 이면까지 통찰해 상상력을 통하여 분석하고 파헤치고 있음 직한 진실이나 사실(史實)에 한 걸음 다가서기 위해 피나는 작업을 한다. 곧 작가는 진정한 견자(見者)로 사실의 진수를 바로 보기 위해 애쓴다.

이제 편조왕사 신돈의 사실이 철저하게 왜곡되고 부풀리거나 깎아내리고 숨겨져 버린 진실을 찾아서 떠나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