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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편조왕사 신돈 이야기 / 일미사와 신돈(2)

by 남전 南田 2022. 4. 15.

2장 일미사와 신돈(2)

 

* 청룡암 송허선사와 편조

 

하일은 진묵 스님이 자기에게만 유독 엄하게 단련하고 벌을 주려는 것을 차차 눈치챘다. 반야심경과 화엄경 같은 불경이 한문으로 기록되어 있거나 아니면 범어(梵語)로 된 경도 많아서 한문과 범어 두 가지 글을 어려서부터 배워야 했다. 또 산 아랫마을 서당에서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소학 같은 서책도 배우게 했다. 그가 총명해서 곧잘 가르쳐 주는 대로 익혔지만 스승은 더욱더 하일을 엄히 닦달하며 단련을 시켰다.

진묵은 하일이 가르쳐준 불경을 잘못 읽거나 달달 외우지 못하면,

! 이놈아! 넌 화적패 두목 밖에 안 될 놈이다.”

하고 회초리로 등이나 어깨를 내리치곤 했다. 승려가 되는 길은 그래서 어렵고 고행의 연속이리라.

편조에게는 스승 진묵대사 외에 또 다른 스승 두 분이 있었다.

한 분은 청룡암(靑龍庵) 송허선사(松虛禪師)였고 다른 한 분은 의승(醫僧) 도암 스님이었다.

또 다른 스승인 송허선사는 관룡사 뒤편 깎아지른 절벽 낭떠러지에 겨우 붙어있는 청룡암에 수도 정진하고 있었다. 관룡사에는 청룡암을 비롯해 황룡암, 동암, 극락암, 보은암, 도성암 같은 암자가 여럿 있었다.

바로 청룡암 송허선사를 편조는 할배 스님으로 불렀는데 둘 사이의 인연이 또한 기이했다.

편조가 열 살 때쯤이었다. 흔히 절에서 동자승으로 있다가 절의 수도 생활에 견디지 못하고 사승(師僧)의 허락도 없이 하산하거나 도망치는 자가 흔히 있었다. 어린 하일도 고된 수행 생활에 더 견딜 수 없다는 생각이 들자 무조건 도망을 가자는 마음이 생겼다. 관룡사 뒤로 돌아가니 절벽이었고 절벽을 힘겹게 오르니 바로 암자가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청룡암(靑龍庵)이었다.

청룡암 마루에 머리가 하얀 늙은 스님이 따스한 봄 햇볕을 쬐는 듯 가물가물하게 눈을 뜨고 아이를 바라보았다. 노스님은 아이의 이름이 하일이란 것을 알자 진묵 스님이 서불(西火; 영산의 옛 지명)서 데려와 제자로 삼은 내력을 잘 알고 있었다. 송허선사는 행자승을 보고 당부했다.

요놈이 도망 나온 진묵의 동자승인데 내가 며칠 붙들고 있을 터이니 넌 옥천사 가서 스님께 요놈이 여기 있다고 알리거라.”

아이는 꼼짝없이 청룡암 노스님 송허선사에게 붙들리고 말았다. 송허선사는 관룡사 주지를 청허종사(淸虛宗師)에게 물려주고 선방에서 정진하고 있었다.

내가 자는 새에 네 놈이 도망갈지 모르니 오늘 밤에는 나하고 한 이불 속에 자자.”

이튿날 송허선사는 아이의 이름을 신돈(辛旽)이라 지어주었다.

나하고 하룻밤을 같이 잤으니 넌 내 손자다. 날 할애비라 불러라. 내 속성(俗姓)이 영산 신가이니 너도 신가 자손이라! 그래야 진짜 내 손자지!”

송허선사는 붓에 먹물을 찍어 辛旽이라 쓰며 곧바로 여러 번 써보라고 했다.

그래! 신씨는 대대로 벼슬을 한 양반 가문에 영산에서 떵떵거리고 잘살고 있제. 후제 네가 크면 그곳에 찾아가 보거라.”

할배 스님요. 진작 영산읍내에 가 봤십니더. 얼마 전에 천축국이라는 나라에서 온 유명한 대사님께서 보림사 반야루에서 설법을 하시는데 스승님과 우리 절의 스님들과 같이 안 갔습니껴?”

아아! 영축산 보림사에 지공 선사가 오셨을 때? 그렇구나! 내가 깜박했구나. 그때 너도 갔구나.”

하루 지났을 때 나이 지긋한 양반으로 보이는 사람이 찾아왔다. 학자 차림의 중년 양반은 마루에 올라서자 송허선사에게 큰절을 올렸다. 바로 송허선사의 조카인 신원경(辛原慶)이었다. 초재(草齋) 신원경은 영산 명문가 찬성공(贊成公) 초당(草堂) 신혁(辛革)의 아들인데 수년 전 음사(蔭仕)로 천거되어 합문지후(閤門祗候)란 벼슬자리를 얻어 개경으로 올라가 살고 있었다.

노스님 등 뒤에서 빤히 신원경을 쳐다보고 있는 아이를 앞세우더니 송허선사가 절을 네 번 시켰다.

요놈이 초재와도 인연이 깊어. 내가 요놈을 내 손자로 삼고 이름도 신돈으로 지었어. 밝은 자이네.”

하일은 노스님이 시키는 대로 초재라 불리는 어른에게 큰 절을 네 번이나 꾸벅꾸벅했다. 부처님께 어려서 백팔 배를 올리지는 못해도 50배는 너끈히 올리고 있었으니 사배 쯤이야 문제없어 넙죽넙죽 절을 했다. 영문도 모르고.

넙죽넙죽 절을 하는 아이를 바라보며 초재는 이란 이름을 지었다는 말에 속으로 깜짝 놀라면서도 내색 못 하고 덤덤하게 아이의 절을 받았다. 그리고는 아이 머리는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쓰다듬어 주었다.

요놈이 화적패 두목이 되던지 나라를 말아먹을 역적이 될 꺼라고 진묵이 거두어 중을 만들겠다고 하니 아마 제대로 자라면 신승(神僧)이 될 거야. 앞으로 나는 요놈을 불러 반야심경을 가르칠 거야. 반야심경으로 깨달음을 얻어 중생을 구제할 재목으로 만들려 하네.”

초재는 송허선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초재 신원경은 송허와 단둘이 선방에서 오랫동안 얘기를 나누더니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하일을 부르더니 품속에 지니고 있던 신표(信標)를 꺼냈다.

돈을 줘도 너는 절에 살고 있으니 소용이 없을 거. 이거 영산 신씨 문중의 증표인데 노스님 손자가 된 기념으로 너에게 주니 잘 간직하여라. 혹시 훗날 소용이 될 것이다.”

신원경은 <義信>이라 새겨진 뿔로 만든 오색 수술이 달린 동그란 패를 아이 손에 쥐여 주고 청룡암을 내려가면서 다시 아이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돈아! 진묵 스님이 가르치는 대로 열심히 배우고 사경(寫經)해라. 지혜의 눈과 크고 넓은 마음으로 정진하여 훌륭한 스님이 되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