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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편조왕사 신돈 이야기 / 일미사와 신돈(3)

by 남전 南田 2022. 5. 2.

<창녕신문>에 연재되고 있는 김현우의 장편 "편조왕사 신돈 이야기" / 일미사와 신돈(3) 2022년 4월 26일자 분 올립니다.

 

2장 일미사와 신돈(3)

 

* 편조, 법명과 수계를 받다

 

청룡암 송허 선사에게서 반야심경을 배우는 한편 또 다른 스승 의승은 도암 스님이었다. 진묵 스님은 의술을 배우라며 의승 도암에게 보냈다.

네가 의술을 익혀 병자를 고치면 곧 부처님께 공덕을 쌓는 일이다.”

도암 스님의 지도로 의서를 읽고 침술까지 익히라고 했다. 보통 큰절에는 불자들과 농사를 짓거나 잡일을 하는 일꾼들이 많았으므로 병자가 생기면 의술을 익힌 스님이 치료를 담당하곤 했는데 의승이라 불렀다. 도암의 의술이 용하다고 널리 소문이 나서 인근 동리 사람들도 병이 나면 옥천사로 찾아와 치료를 받곤 해 도암 스님이 명의라는 소문이 창녕 영산 고을에 널리 퍼져 있었다.

네가 불도에 정진하지 못해 중이 되기 싫으면 의술이라도 배워 뒷날 하산하여 병자를 구완해야지. 그 또한 부처님이 중생에게 베푸는 구제와 같으니라.”

어린 하일은 불경도 배우랴 의술도 배우랴 절의 잡일을 하느라 쉴 틈이 없이 바삐 쫓아다녀야 했다.

 

어느덧 어린 시절 숨 가쁘고 힘든 배움의 세월이 많이 흐르니 스님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출가는 곧 사람으로 태어나서 옳은 생을 사는 행자들이 걸어가는 길이다. 네가 앞으로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걸어갈 길이니 곧 부처님과 동행하는 길이니라.”

예에. 스승님.”

이제 네 승명을 편조라 하리라.”

예에. 스승님.”

이제 구족계를 지켜야 한다. 법문이나 계율을 받아 항상 잊지 않고 마음에 새겨라.”

진묵 스님께 이끌려 온 아이 하일은 자라서 동자승에서 행자승으로 드디어 스님으로서 평생을 귀의한 자가 지켜야 할 계율인 수계(受戒)와 법명(法名)을 받게 되었다. 편조(遍照)라는 승명과 함께 주지 큰스님으로부터 도첩(度牒)과 계첩(戒牒) 그리고 가사 장삼을 받게 되었다. 같은 또래로 자랐던 아이들도 나란히 각조(覺照), 현조(玄照), 의조(義照), 혜조(慧照) 등 여러 명이 편조와 함께 법명을 받게 되었다.

편조란 승명은 좀 특별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세상을 빛으로 밝게 두루 비추라는 엄하게 키운 하일에 대한 진묵 스님의 소망이 숨어 있었다.

옥천사는 화엄사찰이었다 그래서 화엄은 법계연기(法界緣起), 원융무애(圓融無涯), 대광편조(大光遍照)로 축약되는데 대광명편조(vairocana=비로자나본존불=법신불=화엄요체, 세계일화)라는 화엄종의 요체(要諦)에서 하일이 장성하자 편조란 법명을 받게 된 것이니 곧 부처님의 근본 사상을 이루라는 진묵 스님의 희망이 반영된 것이라 하겠다.

또 조금 장성하자 편조에게 요공(耀空)이란 법호(;)를 내리기도 하였다. 세상을 밝게 비춘다는 뜻의 요공은 반야바라밀다심경의 첫머리에 나오는 공()으로 의미가 깊은 법호였다.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사리자, 색과 공, 공과색 다르지 않아 색즉공, 공즉색, 느낌, 생각, , 식 또한 그러니라.

 

정토 극락이 멀리 있는 것 아니고 남을 배려하는 자유와 평등이며 으로 중생을 교화하라는 진묵 대사의 뜻이었다.

 

신돈은 일미암을 짓는데 큰 힘을 쏟았다. 후에 일미사로 바뀌었는데 그 절은 신돈이 옥천사 스님 편조로 있을 때 그의 은사이자 노스님 진묵 대사가 옥천사 주지 자리를 청송(淸松)대사에게 물려주고 난 다음 기거했던 암자였다.

옥천골짜기 큰 개울은 동쪽 밀양 경계 스미꼴(二十谷=深明谷)에서 발원해 노단(魯洞)을 지나 흘러내려 낙동강에 유입되니 지금은 계성천이라 불린다. 계성천이 노단저수지를 지나 옥천마을과 화왕산 산성골 물을 합쳐 옥천저수지에 이르고, 지방도 1080(계성화왕산로)를 따라 마산-대구간 5호선 국도까지 이어진다. 낙동강에 유입되는데 예전에는 송강(松江)이라 불리었다.

옥천저수지를 지나면 임진왜란 때 천강홍의장군 곽재우의 오른팔이었던 문암 신초(聞巖辛礎 :1549~1618) 장군의 정사(精舍)인 문암정이 있다. 영산현 원천(圓泉;지금의 도천)에 살았던 문암공은 무과 급제 후 천성만호로 부임하였는데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왜란이 일어났다. 왜적의 침공에 김해성으로 나아가 싸웠으나 성이 함락되자 탈출하여 곽 장군과 함께 의병을 모아 의령, 영산, 창녕, 현풍에서 힘껏 싸워 여러 번 승리를 거두었다. 현풍현감으로 있을 때 정유재란을 맞아 곽재우와 함께 화왕산성 방어전 때 옥천골로 쳐들어온 왜적을 섬멸해 용맹을 떨치며 성을 지켰으며, 왜란 후 망우당 곽재우가 망우정을 원천 요강원 창암에 짓고 은거하자 죽을 때까지 오가며 교유(交遊)하였다.

그 바로 문암정의 터가 오래전 폐사(廢寺)된 비슬산 남쪽 자락의 일미사의 강원(강당)이었다는 이야기가 지금도 전래하고 있다. 인근에는 절 동리인 사하촌(寺下村) 사리(寺里舍里) 마을이 있어 영축산 북쪽 기슭의 대흥사와 함께 일미사가 한때 큰 사찰로 많은 신도들이 모여들었다 전해온다. 처음에는 일미암이라 불렀는데 절에 오는 불자들이 크게 많아져 일미사로 고쳤다고 한다.

일미암 서쪽에는 가야 시대의 성으로 알려진 신당산성과 계성현 시절 현청이 있었던 마을이 있으며 동쪽에는 543m 굴등산이 있다. 그 가운데 비슬산에서 남쪽으로 뻗어온 산줄기가 일미암의 뒷산으로 황새등(鶴嶝)이라 불리었다. 이 산은 높이 350~400m로 황새가 날개를 펴고 있는 형상이라 한다. 바로 골짜기 건너편 앞산이 691m 영축산으로 산봉우리가 올려다보이는데 그곳에 대흥사, 산 넘어 보림사가 있었으며 삼봉산, 구봉산, 662m 고깔봉(弁峰), 성지산들이 좌우로 펼쳐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