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남전과 함께
소설

편조왕사 신돈 이야기 / 제2장 일미사와 신돈(5)

by 남전 南田 2022. 5. 27.

<창녕신문> (2022. 5. 24)에 김현우의 <편조왕사 신돈 이야기> 제2장 일미사와 신돈(5) 가 연재되었다.

2장 일미사와 신돈(5)

 

* 일미암의 지기(地氣)를 품다

 

인시라면 새벽 3시이고 거기서 해가 뜰 때까지(보통 5) 너럭바위 위에 부좌하여 오로지 원기(지기)를 흡입하는 참선을 하라는 명이었다. 편조가 새벽 인시에 용개등 너럭바위 위에 올라가 좌선할 때면 안개가 자욱하게 골짜기를 뒤덮거나 약샘에서 솟아나는 샘물의 온기로 주위가 따뜻했다.

일 년여 지나니 편조에게 변화가 일어났다. 여름에 몸이 더워지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눈이 오거나 얼음이 어는 겨울철에도 몸이 더워져서 조금도 추위를 느낄 수 없었다. 자연히 여름에 입던 검정 홑 납의(衲衣)를 입었어도 몸이 훈훈했다. 스님들이 한겨울에도 얇은 베적삼 장삼을 걸치고도 지내는 편조를 이상하게 여겼다.

편조 스님, 솜옷, 핫바지가 없어 그리 다니시오? 얼음이 꽁꽁 얼고 눈이 왔는데도 그리 다니시다니.”

아뇨. 벽송 사제. 내가 이제 원기가 충만해 졌나보오. 은사님 가르침대로 좌선한 덕분이지요.”

새벽 인시에 너럭바위 위에 올라가 좌선 수련한 지 2년쯤 되자 정말 한겨울이 되어도 추위를 타지 않게 되었다. 아마 일미암 주위에 가득한 원기(양기)를 온몸에 받아들여 충만해졌기 때문이었으리라.

<고려사절요>(공민왕 145월조)에 이 사실을 알리는 기록이 있다. 가식적이었다고 깎아내리는 말이 있지만.

그 형체를 도인(道人)처럼 하여 가식에 힘써 몹시 더운 여름과 몹시 추운 겨울에도 헤진 납의(승복)를 한 벌로 지내니 왕이 그를 더욱 존중하여…….

見王 枯槁其形 外務矯飾 雖盛夏隆冬 一破衲 王益重

 

편조가 일미암에 지낼 때부터 용개등 너럭바위에서 운기 조식하여 더우나 추우나 장삼 한 벌로 지냈던 것을 알지 못하고 왕에게 잘 보이기 위해 폭염과 엄동설한에도 낡아 떨어져 누더기 홑옷 파납(破衲)을 걸치고 있었다고 비난하였다.

하물며 수도 생활을 하는 다른 승려들도 날마다 새 옷을 갈아입지도 않았고 두세 벌 옷으로 검소하게 지냈으니 편조가 임금을 만나면서 평소처럼 낡고 헤진 꺼멓게 변한 승복을 입고 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공민왕 145월의 <고려사절요> “형체를 도인처럼 가식에 힘썼다하는 기록은 다분히 편견이 있는 것이었다.

예전에 선비들도 흔히 이름난 학자를 방문하거나 전국 명승지 명산대천을 유람하기 위해 여벌 옷 한 벌에 짚신 두어 켤레 매단 봇짐을 지고 집을 떠나기도 했다. 유명한 학자를 만나면 고담준론을 듣고 배우며 경치 좋은 명승지를 만나면 시 한 수를 읊고 남기기를 즐겼다. 그게 바로 과객이었다.

과객으로 전국을 떠돌며 글을 짓고 다니며 유랑하면 한 1, 2년 지나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면 그 행색이 처음 떠날 때 그 옷 그대로였다. 여름에 떠났으면 낡고 더러워진 홑옷이요 겨울에 떠났으면 핫바지가 낡아 솜이 다 빠지고 동정은 때가 까맣게 되었다.

과객으로 전국을 유람하며 명산을 찾고 유명 학자를 방문하던 선비들의 초라한 행색은 간과하고 편조 스님의 행색에 트집을 잡은 것이었다. <고려사절요>의 편찬 시기가 조선시대라 억불숭유(抑佛崇儒)의 영향이라 할 것이다.

 

일미암 너럭바위에서 수도한 편조에게 이상한 일이 생겼다.

창녕에 사는 성 부자란 나이가 지긋한 사람이 부인과 함께 일미암을 찾아오기는 암자를 지은 지 2년쯤 지난 여름이었다. 부인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보이는 아기를 포대기에 싸 안고 있었다.

성부자 내외가 왔다는 얘기에 편조는 진묵대사를 부축해서 절 마당으로 나갔다. 마당에는 수레에 싣고 왔던 짐을 일꾼들이 내리고 있었다. 짚으로 짠 볏섬에 곡식을 담아온 모양이었다. 진묵대사가 나가자 마당에 섰던 중년의 양반이 허리를 정중하게 굽혔다. 뒤따르던 여인도 두 손을 합장하며 절을 했다.

스님! 감사합니다. 적은 것이나마 정성을 다해 가져온 것이니 받아 주시십시요.”

아니! 처음 보는 시주인 듯한데…….”

그때 편조가 뒤에 선 여인이 낯이 익어 얼른 큰스님께 말을 했다.

아아! 오늘은 부군과 함께 오셨군요. 여기 보살은 우리 절에 자주 불공을 드리러 온 시주입니더. 아들 낳기를 기원해서 소승도 함께 축원 예불을 드리곤 했습니더.”

! 그러니까 아들 낳기를 소망한 분이로군.”

진묵대사가 알았다는 고개를 끄떡거리자 양반이 다시 고개를 숙이며 감사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편조는 옥천사에서 일미암으로 온 이후에도 의승 도암 스님으로부터 의술을 계속 배우고 의서를 열심히 탐독하며 연마하고 있었다. 그래서 성 부자 부인이 아이 낳기를 소원하자 예불도 드리면서 수태(受胎)에 효과 있는 약 처방을 해 함께 먹게 하였던 것인데 그 효과가 나타난 모양이었다.

제가 3대 독자로 창녕 고을에 사는 성덕수라 합니다. 이 절에 불공을 드리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저의 내자가 일 년 전부터 일미암을 찾아오지 않았습니까? 지난달에 아들을 보았지 뭡니까? 일미암에 불공을 드린 게 큰 효험을 봤는데 어찌 가만히 있을 수가 있습니까? 부족하고 적은 것이지만 쌀과 콩을 시주하려고 가져왔습니다.”

진묵대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는 편조가 비방 하나를 터득했구나,“ 하고 흡족해하면서 그 공을 의승 도암에게 돌렸다.

부처님께서 시주의 염원을 이루어 주셨구나. 도암에게서 배운 의술도 거들어 수태하도록 했구나.”

 

3대 독자 성 부자가 아들을 가졌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는지 그들이 다녀간 이후 일미암에는 끊임없이 부녀자들이 불공을 드리려 많이 찾아왔다. 편조 곁에 하룻밤을 불공을 드리면 아들을 갖는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 낙동강 건너 의령이나 함안 고을, 북쪽 고개 넘어 현풍에서도 찾아왔다. 그 바람에 편조가 인근에서 축원을 이루어 주는 유명한 스님으로 알려졌다.

 

<편조왕사 신돈 이야기> 제2장 일미사와 신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