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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편조왕사 신돈 이야기 / 제12장 후문(4)

by 남전 南田 2024. 6. 21.

옥천사가 있었던 옥천계곡운 운무가 깔리고 높이 앉은 용선대 미륵불은....

편조왕사 신돈 이야기 / 

12장 후문(後聞) (4)

 

* 저택(瀦宅)으로 사라진 옥천사

 

신돈이 어려서 자라고 승려 수계를 받고 수행했던 비슬산 옥천사는 그가 대역죄에 몰려 처형당한 후에 그의 재산을 몰수하고 처첩을 관비로 내치고 집을 불태우고 그 터에 못을 파도록 하였던 저택(瀦宅)이란 형벌의 일환으로 화를 당해 흔적 없이 사라졌다.

고려 시대 반역죄를 지은 죄인에 대해 참형과 함께 저택이란 형벌이 있었다.

저택은 대역 죄인의 집을 헐고 그 자리에 못을 파는 것이었다. 이성계가 반란을 일으켜 최영을 죽이고 우왕을 폐위시킬 때, 요동정벌군의 좌군도통사였으며 좌시중이었던 조민수(曺敏修)가 주장하여 창왕을 세우며 이성계 일파와 권력을 다투었다. 창왕 폐위 후에 공양왕을 세울 때 우왕의 혈통을 둘러싼 논쟁으로 결국 탄핵받아 조민수는 서인으로 강등, 고향 창녕 땅으로 부처(付處 :유배)돼 죽임을 당했다. 그때 역적으로 몰려 죽은 조민수 장군의 집을 불태우고 못을 팠으니 지금의 창녕 대합면 신당리이다. 그 동리가 새로운 못이 생기니 땅이름을 신당(新塘)이라 불리었고 그곳에 살았던 조씨 일족이 떠나야 했다.

 

그처럼 신돈이 대역 죄인으로 몰려 귀양을 떠난 지 사흘 만에 수주(지금의 수원)에서 참형(斬刑)되고 그의 추종세력들도 유배 또는 떼 죽임을 당했다. 그때 사헌부 대간들이 신돈의 처형과 함께 가산을 적몰하라고 주청하였는데 고려사132, 열전45, 반역6, <신돈전> 기록에 저택(瀦宅)이란 말이 나온다.

― 憲府又請, 誅旽, 流其親黨, 籍産瀦宅,

― 헌부에서, 신돈을 처형하고 그 겨레붙이들을 유배 보내며 가산을 몰수하고 집자리를 파 못으로 만들라고 건의했다.

 

그때 옥천사가 저택으로 훼철되었으니 아마 철저하게 절의 여러 건물이나 터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도록 불 지르고 못을 파는 참혹한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고려사>에는 왕명에 의해 옥천사까지 훼철되고 말았는데 그 이유는 옥천사를 신돈이 창건해 살았던 절이라 훼철되었다. 옥천사가 신라 때 의상대사가 세운 화엄십찰 중 하나라는 사실을 공민왕이나 처벌을 주도한 세력이 간과한 것이다.

사실 신돈이 건립한 절은 옥천사의 말사인 일미사였는데 잘못 알려진 탓이었다. 그 당시 시중에 떠돌던 신돈에 관한 말들이 얼마나 허구였나를 알 수 있게 한다.

그것을 반증하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도 나온다.

옥천사를 복원하려는 일이 성종 시절에 있었는데 사관이자 <고려사절요> 편찬에 참여한 예문관부응교 최숙정(崔淑精)이 반대 상소를 올려 복원이 좌절되고 말았다. 그때 최숙정이 성종에게 창녕현 옥천사는 신돈이 창건해 살던 곳이었는데 죄인의 집이라 그 집을 헐고 절 자리에 못을 팠다(:저택瀦宅)“고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성종실록 권25 국편영인본9511)

― ○御夕講。崔叔精啓曰: "昌寧縣有玉泉寺舊基, 乃前朝妖僧辛旽所創而居之者也。……

― 석강(夕講)에 나아갔다. 최숙정이 아뢰기를,

"창녕현에 옥천사의 옛터가 있는데, 전조(前朝)의 요망한 중 신돈이 창건하여 살던 곳입니다. …… 그 절 자리에 못을 파서……

 

옥천사를 복원하려는 일은 최숙정이,

"…… 신돈이 조정 정사를 어지럽혀 나라를 망치기에 이르렀으니, 이 절은 수리할 수가 없습니다. 근자에 중들이 옛터를 중수한다고 칭탁하여 크게 토목(土木)을 일으켜 …… 고 하니, 임금이 곧 관찰사에게 하유하여 자세히 살피어 치계(馳啓)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御夕講……。 旽濁亂朝政, 至於亡國, 此寺不可修葺。 近者僧徒托言重修舊基, …… 上卽命下諭觀察使審察馳啓)

 

최숙정은 중들이 옛 옥천사를 복원하고 있는데 공사 규모가 엄청나서 일 년이 지나도 끝나지 않았고 건물이 광대하고 사치하기가 또한 심하다고 왕에게 아뢰었다. 그러면서 절을 지으면 중들이 백성의 재물을 빼앗아 먹고 살 테니 백성의 재물을 함부로 허비하여 스스로 봉양하게 할 수 없다고까지 극언을 했다. 곧 사찰이 건립되면 스님들의 공양에 백성들의 재산이 허비된다는 유자 출신 관료들의 사고를 엿볼 수 있다.

최숙정의 반대에 성종이 관찰사에게 명해 공사를 중단시켰다.

이 일은 조선 왕조가 건국된 지 100여 년 후이며 신돈 사후 120여 년 쯤의 일인데 그때까지 신돈에 대한 반대 세력이 사그라지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옥천리 산 293번지, 옥천사 절터라 알려진 그 터에는 지금 석축과 연화대석, 석탑 부재, 석등의 하대, 옥개석 등 석조물들이 남아 있다. 유허는 약 800여 평 정도 되며 <옥천사터>였다는 안내판만이 쓸쓸하게 지키고 있다.

그곳은 옥천사를 복원하려다 좌절된 절터로. 동국여지승람창녕현 조에 이 절을 복원하려다가 완성도 되기 전에 다시 신돈의 일로 반대가 생겼기 때문에 헐어버렸다는 동국여지승람27권 경상도 창녕현 <고적>란 기록이 있다.

― 玉泉寺。在火王山南。高麗辛旽母,乃此寺婢也。旽誅,寺廢。後改創,未旣,以旽之故,復有論列者,撤去。

― 옥천사 : 화왕산 남쪽에 있다. 고려 때 신돈의 어머니가 이 절의 사비였다. 돈이 주살(誅殺) 당하자 절이 폐쇄되었다. 후에 새로 지으려고 하다 예전 돈의 일 때문에 반대가 일자 이윽고 이루지 못하니 헐어버렸다. 

 

성종 25(1494 : 성종실록 292)에 창녕현감 이기담(李基聃)이 창녕을 다스린 지 1년 만에 관리들과 백성들이 옥천사가 훼철된 것을 애석히 여기므로 새 당우(堂宇)를 객사의 동쪽에 건립하였다고 전해 온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곧 이기담 창녕현감 재직 때 절을 다 짓지 못하고 조정에서 말썽이 생기자 결국 공사를 중단하고 완공 일보 직전에 허물어버려 축대만이 남은 것으로 추정된다.

 

# <창녕신문> 2024년 6월 13일자 연재분

옥천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