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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야기

아, 낙동강``` 추억들은 세월에 씻겨 사라지고

by 남전 南田 2007. 8.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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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소설가·아동문학가 김현우씨 - 창녕군 남지읍 남지리

작가가 부르는 사향의 노래 - 원고

아, 낙동강… 추억들은 세월에 씻겨 사리지고

 

 아, 낙동강… 추억들은 세월에 씻겨 사리지고

 

장강 낙동강이 마을 앞을 흐른다. 그 강변은 질긴 가난에 숨길이 급한 농민들의 터전이었다.

동서로 뻗은 강변 모래밭은 남지읍 용산리 거룬강(岐音江)나루에서부터 쇠나리(松津)까지 이십 리나 펼쳐졌는데 봄에는 온통 호밀밭이었다. 호밀은 한자로 호맥(胡麥)이지만 외국에서 들어온 밀이라고 해서 마을 사람들은 왜밀. 키가 크다고 장밀이라 불렀다. 그래서 강마을 남지 사람들에게는 호밀보다는 왜밀이 더 친근한 말로 남아있다.

호밀밭 고랑에는 땅콩을 심었다. 어머니와 함께 여러 형제들이(우리 형제는 8형제이고. 나는 일곱 번째 아들이라 칠봉이라 불린다.) 김을 매러 호밀 밭고랑 속에서 오뉴월을 보냈다. 어른 키만큼 자란 밀밭 고랑에는 바람한 점 들어오지 않아 푹푹 쪘다. 몇 천 평이나 되는 넓은 밭. 밭고랑 길이는 가히 2~300m나 실히 되어 그 끝이 멀고멀었다. 어린 나이에 호미로 땅을 긁으며 기어서 그 고랑의 끝에 도달하려면 한 나절은 걸렸다. 밀을 베어내면 밭 한쪽에 겨울 양식인 고구마를 심었다.

그 밭 이름이 욱개둑이었다. 욱개는 낙동강에 물이 흘러드는 개(浦) 중 가장 위에 있다는 웃개(上浦)로 남지 사람들은 ‘웃개’라 하기보다는 발음하기 쉬운 대로 ‘욱개’라 불렀다. 곧 욱개는 남지읍 소재지의 옛 땅이름으로 남지철교가 놓여 있는 일대 들판은 욱개둑이라 불리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욱개둑 밭에 가면 바로 앞 철교와 그 배경으로 버티고 선 용화산을 보았고 그래서 낙동강과 철교는 우리를 키우고 살찌게 하는 원천이기도 했다. 여름이면 강물 속에서 하루를 살았다. 강 건너 수 백 년이 되었다는 은행나무가 철교 동편 절벽위에 서서 강물에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며 가을이면 노랑으로 변했다. 이 철교는 낡아 그 옆에 새로 다리를 높게 짓는 바람에 예전 정취가 사라지고 아련한 추억으로 남았다.

강변은 비옥한 들판이었다. 여름이면 홍수가 덮치고 한해 농사야 절단이 나지만 상류로부터 흘러 와 쌓인 진흙으로 들은 비옥해졌다. 홍수는 강마을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연례 행사였다. 땅콩농사야 엉망이 되고 말지만 가을에 거두는 무. 배추 농사는 풍년이 들기 마련이어서 길흉이 반반이라 위안을 삼았다. 이제 이 들판이 하천부지로 변해 농사를 못 짓게 되어 수 만평 빈 땅에 유채를 심어 봄에는 낙동강유채축제를 벌리니 할 일없는 구경꾼과 돈 버는 장사치들이야 좋겠지만 여기서 오이 고추 등 온실 농사를 짓던 농민은 입맛이 없어 쓰다 달다 말이 없다.

 

강변에서 동북으로 떨어진 들판 동갯들은 계성천이란 큰 내가 흘러 메기가 하품을 했다면 물이 드는 저습답이 대부분이었다. 조금 지대가 높은 곳은 중칫걸. 무닝기라 불리었는데 보리 수박 참외 무 배추가 가득 차는 밭이었다. 경지정리가 되어 지금은 반듯한 옥답으로 변했지만 최근 고속도로 남지나들목이 들어서며 옛 자취가 많이 사라졌다.

우리 집은 웃개 마을의 동쪽 들머리에 있는 외딴 집이었다. 사람들은 외똔집이라 불렀는데 밭 흙을 파서 집터를 높게 돋우었다. 홍수 때 집이 침수되지 않게 하려고 사간 두 줄 배기 초가였다. 집 주위는 모두 우리 밭이었고 서쪽에는 큰 타작마당이 있었다. 이 바깥마당을 사람들은 배꾸마당이라 불렀다. 우리 집에는 울타리나 대문이 없었다. 고작 있다면 배꾸마당에 서 있는 감나무와 키 큰 미루나무가 고작이었고 여름이면 옥수수. 수수가 키대로 자라 마당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집에서 얼마 떨어져서 제방이 있었다. 이름 하여 피수대(避水臺). 홍수 때 온 동네가 황토색 물에 잠기면 옷가지 밥솥이나 챙겨 물 피란을 하라고 만든 둑이었다. 국도 5호선이 지나가는 시가지 복판에는 제방을 동서로 이어주는 목제 육교가 있었다. 아이들은 동쪽 둑과 서쪽 둑 중 하나는 연애둘. 하나는 이별둘이라 했다. 연애둘에서 산보를 하면 사랑이 맺어지고 이별둘에 가면 헤어진다고. 그 동쪽둘 끝에는 우리 집과 가장 가까운 이웃으로 몹쓸 병에 걸린 여자가 딸 둘을 데리고 살았다. 아이들은 소 먹이러. 들판에 일하러 그 집 앞을 지나면 괜히 오금이 저려 도망치듯 달렸다. 소년의 눈에는 딸 둘이 모두 예쁘고 얌전한 누나 같았지만 말을 붙이지 못하고 지냈다. 이 제방은 지금은 시가지 도로가 되어 옛 자취는 사라져 버렸다.

넓은 배꾸마당이 있는 외똔집은 6.25 때 불에 탔다. 피난하고 돌아온 그해 겨울을 불탄 집 온돌 위에다 거적으로 막을 치고 살면서 갱죽으로 연명했다. 이듬해 봄에는 온 식구가 장질부사에 걸려 두어 달씩 혼수상태를 헤매다 죽음 직전에 살아나기도 했다. 이제 그 집터 위로 새로운 남지교가 지나가면서 옛 모습을 찾을 수가 없게 되었다.

 

거기다 몇 해 전 웃개 마을 3/2가 뜯겨 나가는 대 변혁이 일어나 정겹던 욱개나루. 서낭나무 두 그루가 섰던 정낭걸. 2.7일에 장이 서던 욱개장터 중 어물전과 골목 장터 대부분이 철거되고 잘려 나갔다. 강변에는 절벽 같은 높은 제방이 경치 좋은 제왕담을 가로 막고 둑 위로 도로가 생겨 옛 마을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제방 안쪽에 남은 인가마저 둑 아래에 푹 파묻혀 왠지 초라하게만 보인다.

어느 해는 홍수로 어느 해는 가뭄으로 농사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남지에서 초중고를 다녔지만 개근상은 한 번도 받아 본 적이 없다. 공부보다는 농사일을 거드는 것이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여름이면 소 먹이러 꼴 뜯으러 십여 리나 되는 영남수리제방까지 소를 몰고 다녔다.

 

중학교 다닐 때 책방을 열고 책장사를 하는 덕분에 책을 많이 읽는 행운을 얻었다. 잡지고 소설이고 동화책이고 책방에 팔려고 가져오는 것은 무엇이든 읽었다. 그 책방은 셋째 형님이 맡아 십여 년 열고 있어서 입대 전까지 그 당시 신간은 두루 섭렵할 수 있었던 것이 나의 문학적 자산으로 축적되었다고 할 것이다.

김현우 작가는= 1939년 창녕에서 태어났다. 1964년 월간지 ‘학원’에 장편소설 ‘하늘에 기를 올려라’가 당선되면서 소설활동을 시작했으며. 1966 장편소설 ‘밤을 가는 나목’을 마산일보(현 경남신문)에 연재했다. ‘산메아리(상아출판사刊)’‘꼬리달린 아이(교학사刊)’ 등 6권의 동화집과 ‘하늘에 기를 올려라(도서출판 거암刊)’. ‘육개명물전(도서출판 금정刊)’등 3권의 소설집을 발간했다. 창녕문학회 회장. 경남아동문학회 초대회장을 역임했으며 경남문인협회 우수작품집상. 제7회 경남아동문학상. 황우문학상. 경상남도 문화상(문학부문)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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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신문 2007년 7월 30일 20면, 테마문화 면에 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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