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장승-호암미술관
이 소설은 경남소설가협회에서 2009년 발간한 <경남소설>(4호)에 실렸다.
* 발행일 : 2009년 7월 17일
* 제작보급처 : 도서출판 경남
이 름-5
# 김현희와 남종수
김현희 이거는 실명이다. 김현희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KAL기 폭파사건의 공작원. 북에서 온 비운의 여인. 지금도 그녀의 삶은 베일에 싸인 채 어딘가에서 살고 있다.
만약 그녀와 똑같은 이름의 여자가 있다면 어떨까?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경상도 한 작은 도시에 북에서 온 그녀와 똑같은 이름의 김현희가 살고 있다. 서른 살이 넘는 처녀로 부모는 일찍 저 세상으로 가고 오빠와 살고 있었다. 경상도에 사는 김현희는 어릴 때는 자기 이름이 최고라 생각했다. 어질 현(賢)에 보통 계집 희(姬)로 불리는 글자이니 여자 이름치고는 그럴 듯했다.
넉넉지 못한 집안 사정 때문에 전문대만 졸업했고 철물점이나 페인트대리점 같은데 경리로 취직해 몇 년을 지냈다.
어느 해 여름인가 친구들과 바닷가로 놀러 간 적이 있었다. 물론 그런 여행에 남자가 빠질 수가 없으니 사귀거나 친밀한 남자와 동행하도록 했다. 남자 친구가 없는 여자들을 대비해 남자들이 몇 명 더 가기로 했다. 바닷가에서 자연히 한 사람씩 짝을 정하게 되었는데 김현희도 삼성인가 LG인가 무슨 전자공장에 다닌다는 청년을 만났다. 처음 만났으니 자연스럽게 자기소개를 하게 되었는데 그녀가,
“김현희입니다.”
했을 때 상대 청년이 비실비실 웃으며 그랬다.
“아이고, 텔레비에 간혹 나온 얼굴이다 싶더니 그렇구만.”
“내가 언제 텔레비전에 나와요?”
“어? 잘 모르는가 보네. 칼기 폭파범 김현희 말예요. 이름도 독 같고 거기다 어떻게 보니까 그 쪽도 그 여자와 닮은 구석이 있고 분위기도 비슷해 보이네요.”
“농담도 잘하시네.”
김현희는 남자의 흰소리에 웃고 말았지만 속으로는 그 남자의 말이 가슴에 와 송곳처럼 박히면서, ‘내가 칼기 폭파범 김현희와 이름이 똑 같다니!’ 하고 생각할수록 속상해 죽을 지경이었다. ‘이때껏 그런 걸 깨닫지도 못하고 살아 왔는데!’ 다른 친구들은 애인이나 새로 만난 짝과 서로 짝짜꿍 배짱이 맞아 지지고 볶고 떠들며 술을 서로 권하고 마시며 즐거워했다. 그렇지만 김현희는 그 남자의 싱거운 농담 한마디로 기분이 팍 상해 도저히 그들과 어울릴 수가 없었다.
‘내가 그 김현희와 닮았다니! 이름도 똑 같고 거기다 분위가 비슷해?’
그녀는 여러 해를 지나도 그 충격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선보는 자리나 남자를 소개받는 자리에 가면 이름을 말해야 하고 그러면서 자신도 모르게 주눅이 들어 번번이 혼담이 틀어지고 마는 것이었다. 서른세 살이 되던 해 김현희는 결심을 했다. 내 불행은 곧 고 놈의 현희란 이름 때문이다. 그러니 이름을 바꾸어야겠다. 그녀는 출퇴근길에 보아 두었던 작명소를 어느 날 오후에 찾아갔다.
작명소 안에 들어서보니 사내 하나가 앉아 있었다. 처음에는 그가 작명가인 듯해서 공손하게 인사를 했더니,
“아아, 나는 아니오, 선생님은 잠깐 나가셨다는데 곧 오신답니다. 나도 이놈으 이름을 고쳤으면 하고 온 사람이요. 아가씨도 그래 왔지요?”
“·······.”
그냥 고개만 끄떡거리고 말았다. 작명가가 곧 온다니 돌아 설 수 없었다. 오랜 생각과 고민 끝에 결심을 하고 찾아 왔으니 기다려 보기로 작정하고 긴 의자에 엉덩이만 걸치고 앉았다. 4, 50되어 보이는 사내는 히쭉 웃더니 말을 꺼냈다.
“빌어먹을 내 이름 때문에 번번이 사업을 말아 먹는다고 누가 그럽디다. 내 이름이 뭔지 아시오? 남종수요. 이름이 대흉이라나 뭐나, 내 참! 아가씨는 이름이 뭐요? 내가 여러 작명가를 만나봐서 이제는 반쯤 도사가 되었소. 이름이란 게 운명을 좌우한다니 그게 말이 되어요? 불길한 인상의 이름은 언젠가는 반드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흉한 운명을 당한다지 않소? 난 말이요, 그걸 믿지 않았지. 개똥도 모르는 자들이 작명이란 간판이나 내걸고 돈이나 벌어먹으려고 하는 짓이다 생각했지. 손금 관상 사주팔자 그 따위 어디 믿을 게 됩니까? 그런데 내가 하는 사업이 계속 운이 나빴는지 정말 이름 때문인지 모르지만 조금 잘 된다 싶다가도 하루아침에 불이 나기도 하고 도둑이 들어 탈탈 털리기도 하고 아니면 사기에 얹혀 말아 먹기도 하고······.”
남자는 담배를 꺼내 피워 물며 얘기를 계속했다.
“마누라가 어딘가 갔다가 내 이름 석 자가 나빠서 그렇다는 얘길 듣고 왔지 뭐요? 이거 믿을 만한가 싶어 작명가를 여러 명 만나봤지. 아마 여기가 일곱 번째인가? 여덟 번째인가? 가는데 마다 새로 좋은 이름을 지어 주더구먼. 그걸 다 주워섬길 수도 없고······. 하여간 이곳 선생님께서도 멋진 이름을 지어 주실란가?”
그때쯤 작명가 선생님이 나타나서 이야기는 중단되었고 얼마 후에 남종수도 김현희도 새로운 이름 하나씩 지어 받고 제법 많은 돈을 내 놓고 나왔다.
“아가씨! 개명을 하자면 법원에 넣는 서류가 복잡해요. 이래 만난 것도 인연인데 우리 함께 개명 서류나 보조 맞춰 만들어 봅시다. 법원근처에 내가 잘 아는 법무사가 있는데 거기 찾아가면 잘 해결해 줄 거요.”
사내가 이때껏 한 말 중 가장 쓸 만한 말이었다. 김현희는 두말 않고 사내가 내미는 명함을 받았고 며칠 후 그녀는 사내와 만나서 법무사 사무실을 찾았다.
김현희는 김수민으로 남종수란 사내는 남정호로 개명을 허락한다는 법원의 결정서를 장마가 한 달쯤 계속되던 여름 어느 날 받아 들었다. ***
* <단편소설 -이름-> 완
* 수원의 화성 성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