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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종점(終點)- 1 -

by 남전 南田 2009. 8. 18.

 

 

단편소설

종점(終點) -1-

김 현 우

매서운 바람이 밤새 불었다. 어제 저녁 함박눈이라도 올 듯 찌그러졌던 하늘이 끝내 그대로인 채 추위가 기승을 부렸다. 솜이불이 아니라 가볍고 얇은 나일론 이불조차 없는 그들은 볼 박스와 신문지로 등과 배를 가리고 오들오들 떨어야 했다. 노선생은 하얗게 변한 얼굴을 수건으로 가리고, 술씨는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더욱 웅크리며 모진 추위를 피할 방도를 강구했다. 역 대합실로 가는 수 말고는 달리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다른 식구 둘이 그곳에 가 있으니 그들까지 끼일 수가 없었다. 대합실은 좁고 밤이면 거기도 난로불이 꺼져 추웠지만 한데보다는 나았다.

새벽 희뿌연 박명이 퍼질 무렵, 난데없이 구급차의 경적 소리가 요란하게 역 광장 쪽에서 들려 왔다. 그 소리는 가까이 다가와서 그쳤다.

“새벽부터 웬 난리야?”

“싸움판이 벌어졌을까?”

“이 엄동 새벽에 어떤 놈이 싸워? 무슨 사고가 난 것이겠지. 가 볼까? 이젠 잠도 달아났고, 대합실 난로불도 피워 났을 테니 불도 좀 쪼이고······.”

그들은 부스럭거리며 일어났다. 깔고 덮었던 볼 박스와 신문지들을 한쪽 구석으로 밀어 놓았다. 밤새 웅크리고 버티는 바람에 더욱 굳어져 버린 몸이라 얼른 움직여지지 않았다. 온 몸 뼈마디가 얼음이 되어 조각조각 부서져 내리는 듯 팔 다리가 아프고 힘이 빠졌다.

“이럴 때 해장 한 잔 하면 딱 좋은데! 도박사 그 놈이 지난밤 다 처 먹었제?”

술씨의 말에 노선생은 얼어붙은 얼굴을 힘들여 찡그려 보이며 고개를 저었다. 술씨는 빙긋 웃었다. 그는 술에 절어 살았다. 빠질 술독이라도 있었다면 빠져 죽었을 텐데 불행하게도 소주 한 잔 마음 편하게 마실 수 없었다. 돈이 없었으니까. 다행스럽게도 역 광장에서 관상 사주를 보는 역술가와 친해서 종종 술을 실컷 얻어먹기도 하지만. 하도 술을 찾으니까 같이 있는 자들이 모두 술독에 빠져 사는 늙은이라고 술씨라 불렀다. 그는 고아 출신으로 피나는 노력으로 자수성가하였고 아들이 둘이나 있건만 지금은 소식을 끊고 살았다. 아들들에게 전 재산을 나누어서 일찌감치 물려주었다. 아내가 암으로 죽자 자식들이 빈털터리 아비를 야박하게 대하며 용돈을 잘 주지 않았다. 며느리들이 술고래 시아버지를 싫어해 한집에 같이 살기를 마다했다. 그는 텅텅 빈 큰집이 싫었다. 팔아서 작은 아파트로 이사를 하고 남은 돈으로 술을 마셔댔다. 낮이면 종로2가, 3가 지하철역이나 근처 공원에서 하루해를 보내며 술만 마셔댔다. 그러다 공원에서 만난 여자하고 살기로 했는데 그게 화근이었다. 여자를 믿고 살았는데 두어 달 만에 예금통장에서 돈을 다 인출해 도망을 가 버렸다. 그는 그 길로 환장바람이 들어 완전히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버렸다. 흘러 흘러 노선생과 함께 하게 되었던 것이다.

“참 도박사하고 짝퉁은 대합실서 잘 잤능가? 그, 그 놈 있지? 황 뭐라 하는 자식 말이다. 지난번 의자에 조금 누어있었더니 달려와서 승객들이 앉을 자리에 누워 잔다고 생 지랄을 하는 거라. 사실 지나 나나 팔자가 조금 달라졌다 뿐이지 말단 직원인 주제에 우리 신사들에게 유세를 해? 지 놈이 내 처지가 돼 보라구. 더 지랄할 놈이!”

“하여간 나가보자고. 구급차가 뭐 하려고 왔는지.”

둘은 어정어정 역사 앞으로 나갔다. 그들이 잤던 곳은 역 옆 대한통운 창고와 창고 사이 좁은 공간으로 사람 둘이 딱 누우면 될 그런 자리였다. 노선생과 술씨가 나가보니 구급차 근처에는 벌써 몇 명의 사람들이 둘러서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 속에 봉두난발에다 남루한 외투를 껴입은 사내 둘이 기웃거리고 있었다. 그 중 키가 큰 사내는 도박사이고 키 작은 사내는 짝퉁이라 불리었다.

아무 소리 없이 그들도 사람들 사이에 끼어 땅바닥에 누운 사내를 내려다보았다. 사내는 벌서 죽어 있었다.

“어? 철학자가 아녀? 동사네, 동사.”

술씨가 속닥거렸다. 죽은 사내는 그들에게 곧잘 술이나 밥을 사 주었던 역전 광장에 나앉아있던 철학자였다. 경관이 도박사를 노려보며 물었다.

“당신이 제일 먼저 발견했다면서?”

“발견하기야 내가 했지만 역 직원 황씨에게 알렸더니 그 사람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하더니만 112에 신고했지유. 난 아무 죄도 없소.”

“허! 이 양반이! 누가 죄가 있다고 했어? 당신이 처음 이 사람 죽은 거를 발견했으니 참고인 조사를 받아야하니까 그렇지. 같이 경찰서로 갑시다. 에이! 이 추운 새벽에 동사하는 사람이 없나? 연고자가 없으면 처리가 복잡한데······. 누구 이 사람에 대해 아는 사람 없어요?”

경찰관의 공개적인 질문에 아무도 선뜻 나서지 않았다.

죽은 사내는 나이가 환갑 이쪽저쪽 쯤 되는데 그들 사이에서는 철학자로 불리었다. 서양철학이 아니라 동양철학, 쉽게 말하자면 손금에 사주팔자 관상쟁이 그런 철학 말이다. 그렇다고 뭐 용한 점쟁이나 남의 운명이나 운수를 척척 알아맞히는 문화관광부 등록 제 000호 간판을 달고 정식으로 철학관을 열었던 사람은 아니었다. 역 광장 행인이 많은 거리에 사주 관상 토정비결 따위 책을 펴 놓고 앉아 꾸벅꾸벅 졸기만 했었다. 그는 한창 젊었을 때 주먹으로 먹고 살았다고 했다. 부산에서 대구에서 기세등등 거리를 휘저으며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지냈다고 자랑삼아 말했다. 그게 사실인지도 몰랐다. 그의 주먹이 보통 사람보다 굵고 크며 단단했고 떡 벌어진 어깨는 왕년에 제법 힘깨나 쓴 사내임을 말해 주었다. 잘 나가던 그 시절 어느 해 집단 폭력사건에 연루되어 쫓기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는 숨을 곳을 찾아 전국을 헤매다 전라도 어느 절에 의탁했는데 그게 인연이 되어 절밥을 먹게 되었다고 한다. 거기서 몇 년을 숨어 지내며 주지 스님께 배웠다 하는 것이 염불에 관상, 사주, 작명 등등 동양철학이었다.

“그거 쉬운 거 아니야. 내가 고등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깡패로 십년을 넘게 보냈으니 솔찍하게 말하자면 무식했지. 무식한 놈이 한자투성이 염불에······, 스님들 중얼중얼 거리는 그거 전부 한자요 한자! 여간 공부를 안 하면 염불 한 줄 외우기 힘들다니깐. 그래도 내 깐엔 열성적으로 그걸 배웠지. 사주 관상은 그러니까······, 양념이었지. 불경 공부 틈틈이 그걸 배운 거야.”

그런데 스님이 될 팔자가 아니었단다. 장작도 패고 밥도 짓고 스님이 되는 과정을 거치면서도 절에 여자만 나타나면 음심이 돋는데 감당할 수가 없었다. 물론 참기도 하고 어쩌다 동냥이라도 하러 절 아랫마을로 내려가면 슬쩍 남모르게 색시를 찾아 허리춤을 풀고 돌아오곤 했다. 그러다 절을 찾은 여신도와 눈이 맞았다. 큰 덩치에 훤한 얼굴의 사내이니 여자가 그냥 지나치지 않고 웃었던 모양이었다. 그 길로 야반도주해 여자를 쫓아갔다. 여자는 남편이 있었는데도 그를 따라 나섰다. 둘은 서울로 도망가 포장마차를 하며 살았다. 그는 밤이면 여자 일을 거들고 낮이면 배운 게 도둑질이라 길가에 좌판을 펴고 손금, 관상, 사주를 봐주며 돈벌이를 했다.

“그래, 어찌 됐어? 그 여자와 깨가 쏟아지게 잘 살았어?”

“아! 잘 살았으면 오늘 내가 여기 나 앉았겠어? 내 얘기는 여기서 끝이야.”

철학자는 꽁꽁 얼어 얼굴이 허옇게 변해 있었다. 눈이 반쯤 감기고 반쯤 떠 그의 주검을 내려다보고 있는 노선생, 술씨, 도박사, 짝퉁 그리고 경찰, 구급차 기사, 새벽 열차를 타러 나왔다가 좋은 구경이란 듯 나온 사람들을 쓸쓸하게 바라보는 듯 했다. 시체는 사진 몇 장 찍힌 후 구급차에 실렸다.

“자자, 갑시다. 당신!”

경관의 말에 도박사는 빙긋 웃었다.

“씨발, 갑시다. 재수가 옴 붙은 놈인데 콩밥을 준다면 팔자 피이는 거지 뭐.”

“참고인이라니까! 행려자 사망 경위 조사가 끝나면 당신은 필요 없어. 간단하다구.”

“설마 아침이라도 주겠지 뭐. 그냥 굶겨 가면서 뭘 말하라고 안하겠지 뭐.”

“알았어, 알아! 밥 시켜 줄 테니 가기나 해요.”

그때서야 도박사는 술씨를 바라보며 눈을 찡끗했다.

“대합실 왼편 자판기 뒤에 소주 있어. 그거 해장하소. 커피 자판기 껴안고 자니까 따뜻하더구먼.”

술씨는 아무 소리도 않고 빨리 가라고 손을 흔들기만 했다. 차가 떠나고 돌아서면서 한 마디 했다.

“오늘 아침 도박사 저 놈 따신 밥 먹게 생겼네 그려. 이봐, 노선생, 우린 해장이나 하러 가야지?”

“그러지.”

-- 다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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