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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전과 함께
소설

종점 -2-

by 남전 南田 2009. 8. 18.

 

 단편소설

종점 -2-

 

노선생은 대합실 옆 매점으로 가서 꼬깃꼬깃 접어 넣어 두었던 지폐 한 장을 꺼내 새우깡을 샀다. 술씨는 도박사 말대로 자판기 뒤에서 소주병을 꺼내 의자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옆에 짝퉁이 히죽히죽 웃으며 발로는 연신 땅바닥을 비비고 있었다.

“씨발! 대합실은 이래 따뜻한데! 그래도 눈치껏 재주껏 여기서 자야겠어. 짝퉁은 요령이 좋단 말이야. 우리는 지난밤 얼어 죽는 줄 알았는데 얼어 죽은 놈은 따로 있었네. 어쩌다 철학자가 저 세상을 갔어?”

“실은 내가 오줌을 눈다고 새벽에 화장실을 다녀오다 보니까 철학자가 거 번개시장에 불 피우는 도라무깡 옆에 웅크리고 있지 뭡니까? 아따! 새벽 일찍 나왔는가보다 하고 가 봤는데 꽁꽁 얼어 이 세상 사람이 아니데요. 아마 술에 취해 거기가 제 방인 줄 알고 잠들었나 봐요. 달려 와서 도박사에게 얘기했는데 솔직히 나는 수배자 아니요? 나는 뒤로 빠지고 도박사가 매표창구에 가서 112에 연락하라고 신고했지요.”

짝퉁의 말에 둘은 고개를 끄덕이며 소주 병마개를 열었다. 셋은 돌아가며 한 모금씩 술을 마시고 새우깡 하나씩을 입에 넣었다. 그게 그들의 아침인 셈이었다. 짝퉁은 목을 움츠리고 아직도 철학자의 죽음이 믿기지 않은 듯한 얼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작퉁은 가방전문가였다. 가방을 전문적으로 만들었는데 명품 가방 상표를 붙여 대대적으로 팔아먹었다고 한다.

“매출이 굉장했어요. 자금을 대주는 물주야 별도로 있었지만 내가 아니면 진짜처럼 제품을 만들어 낼 수가 없었어요. 우리 세상에서 내가 제일의 기술자로 통했지요. 자랑이 아니지만 새로운 명품가방 견본을 한 번 척 봤다하면 액세서리까지 꼭 그대로 만들어 냈으니까요. 돈요? 큰돈은 못 벌었지만 돈을 영 못 벌었다고 말하면 거짓말이지요. 아들 딸 대학까지 보냈고 아파트도 서른 댓 평짜리 샀거든요. 언젠가 잠잠해 지면 슬슬 기동을 해야 내가 삽니다. 지금 이 조그만 도시의 역에서 숨죽이고 엎드려 있지만요, 여기가 종점 아니잖습니까? 다시 출발할 겁니다.”

짝퉁은 틈만 나면 이 종점에서 탈출할 것이라고 기염을 토했다. 어느 날 가짜제품 작업장에 단속 경찰이 들이닥쳐 난리가 났었다. 마침 그는 그 옆 건물에 가 있었기 때문에 운수 좋게 현장 체포는 모면해 도망을 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가짜제품 제조 기술자로 수배령이 내려 서울에서 이 작은 도시까지 도망 오는데 한 달이 넘게 걸렸다고 했다. 공짜 차도 타고 걷기도하면서 도피를 하다가 서울에서 천리나 떨어진 곳이니 안전하리란 생각이 들어 노숙자 생활을 하게 된 것이었다.

“철학자 그 사람이 벌이가 시원찮아도 술값을 간혹 주었는데 이젠 그것도 틀렸군.”

술씨의 말에 짝퉁이 한숨을 쉬었다.

“그 양반이 말하길 내가 여기서 2년만 버티면 액운이 다 물러가고 서광이 비친데요. 유인상조하니 백사순성이라데요. 서로 도와주는 사람이 있으니 백사가 순조롭게 이룬다는 뜻이랍니다.”

“아따! 남의 운수를 봐주는 영감이 제 죽을 운수는 모르고 객지에서 비명횡사를 해? 말짱 헛것이야.”

“그러거나 말거나 난 그 말은 믿고 싶소.”

짝퉁은 퉁명스레 말하면서 돌아 앉아버렸다. 노선생이 손을 저으며 나서서 짝퉁의 마음을 어루만졌다.

“그야, 산천에 간절히 기도하면 만사가 여의하다는 말이 있는데 퉁씨야 기대를 걸만하지. 전에 같이 동업했던 사람들이 그냥 가만있을까? 아니지. 재미를 본 사람들이 퉁씨를 그냥 내버려 두겠어? 좀 조용해지면 연락이 오든지 아니면 이쪽에서 연락을 해야지. 그러면 유인상조(有人相助)에 백사순성(百事順成) 아니겠어? 너무 성급하게 돌아다니지 말고 우리와 같이 엎드려 있어.”

“정말 노선생 말이 제일 내 맘에 쏙 드요. 내 죄가 뭐가 있소? 겨우 가방 몇 개 만들면서 허가 등록한 내 상표가 없으니 하는 수 없이 남의 상표를 조금 이용한 거 뿐인데 가짜니 진짜니 하면서 콩밥을 먹이려 안달하니 이래가지고 살겠소? 자본주의 국가에서 거 서양 놈들이 조금 일찍 상표등록을 한 것뿐인데 왜 내가 못 써먹는단 말이요? 누구든 적당하게 이름을 붙여 멋진 제품을 만들고 팔아먹을 자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독점한 놈들이 총살깜이지요. 노선생, 안 그렇습니까?”

“내가 어디 선생이야? no! 선생, 선생이 아니란 뜻인데······. 모두들 선생으로 착각을 한단 말이야. 대통령이야 성이 노씨니까 진짜 노 대통령이라 불러야겠지만 난 아닐 노, no! 란 말일세.”

“하여간 우리 중에 제일 유식하기는 철학자 다음으로 노선생이잖소?”

술 두 잔에 알딸딸해진 술씨가 짝퉁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노선생은 유식하지. 내가 유식했다면 이 병신 짓을 하면서 살았겠나? 난 말이지. 공부를 못한 게 한이 맺힌 놈이라고. 고아원이란 게 그런 거야. 나이를 조금 먹었다하면 인젠 네가 알아서 기어라. 우린 더 도움을 못준다. 난 대학을 가고 싶었지만······. 덕분에 악전고투를 하며 돈을 벌었지.”

술씨의 회한에 작퉁은 관심이 없다는 듯 노선생을 바라보며 물었다.

“노선생은 대학을 정말 다녔나보네. 그래요?”

“아냐! 아냐! 대학은 무슨······그냥 왔다 갔다 하다 말았지. 괜히 전에 한번 술 먹고 그만 선생 소리를 한 바람에 노선생이라 불리고 말았는데 정말 난 아니야. no! no! 야.”

“도박사가 그럼 대학 다녔나? 대학 다녀야 박사가 되는데 말이지.”

짝퉁의 말에 술씨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퉁씨는 어제 아래 와서 잘 모르는데 도가 저 놈은 도박에 망한 놈이여. 도박에 박사란 말이여. 그 놈 얘기를 들으면 안 해 본 도박이 없다는구먼. 윷놀이판, 개싸움에 투계, 경마장, 경륜장도 섭렵했다지 뭔가? 도리짓고땡에 두 장 빼기 섯다, 고스톱, 화투는 귀신이 다 되었다고 하데. 지 말로는 영화 있잖아? 무슨 타짜란 거 말이야. 지가 뭐 그 영화 주인공 모델이었데나 뭐냐? 믿을 게 못되지만······. 지금도 천 원짜리 몇 장 생기면 로또 복권 사러 달려가고 오백 원짜리라도 하나 생기면 거 긁는 복권 있잖아? 그거 사서 긁더구먼.”

“오늘 도박사가 주민등록증 오랜 만에 써 먹겠네.”

“따끈따끈한 아침밥도 먹고 말이요. 이왕이면 내가 갈 걸 잘못했나요? 하여간 안됐어요. 하루 종일 길바닥에 나앉아 먼지만 마시고 수입은 션찮다면서 그러던데요. 그만 중질이나 제대로 했으면 이 꼬라지가 안 되었을 건데, 요물은 여자라꼬 한탄을 하데요.”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철학자가 생전 우리에게는 그런 소릴 안했는데?”

“내 사주팔자 봐 주면서 그럽디다. ‘퉁씨 자네는 여자를 잘 만났어. 부인이 열녀야. 전화추적 때문에 궁금해도 집에 전화 자주 못하지? 걱정하지 마. 부인이 절대 도망가지 않아. 오히려 퉁씨가 집에 갈 때까지 알뜰살뜰 살아서 다시 일할 수 있는 목돈 밑천 만들어 놔 둘 꺼야.’ 그러면서 자기 신세타령을 조금 비칩디다.”

“신세타령? 우리 같이 노숙도 안하고 여인숙에 방 얻어 사는 사람이 무슨 신세타령?”

“배 맞아 서울로 같이 도망간 그 여자 말입니다. 몇 년간은 포장마차 장사를 잘 하더랍니다. 아이도 하나 낳았다지요?”

“아니, 자식 있다는 소리도 처음 듣는 얘길세.”

“그런데 어느 날 여편네가 확 변했더래요. 길가 나앉아 점쟁이 노릇하는 사람이 다 눈치로 먹고 사는 사람 아닙니까? 여편네가 바람이 난 걸 모를 리가 없지요. 하루는 머리채를 움켜쥐고 추달을 했데요. 흠씬 두들겨 패고 말이죠. 그랬더니 부자 영감을 하나 물었다고 고백을 하더랍니다. 돈이 엄청 많은 영감이었나 봐요. 당신이 눈 감아 주기만 하면 그 영감에게서 한 밑천 빼낼 수 있다고 사정사정 하니까 어쩝니까? 그래, 두고 보자! 그랬데요.”

“그랬는데?”

“뭐, 그랬는데! 입니까? 며칠 지나지 않아 아이까지 데리고 종적이 묘연해 지고 말았답니다.”

“허어! 꼭 내 짝 났네.”

짝퉁의 얘기를 듣다가 술씨와 노선생은 입을 쩍 벌리고 말을 하지 못했다.

“한번 도망친 여자 두 번 세 번 서방 버리고 도망간답니다. 우리 마누라 얘기가 나온 바람에 들은 얘기지요.”

“어쩌면 그 부자 영감탱이에게서 큰 돈 뚱쳐서 도로 철학자 찾아올지도 모르는데?”

“아따! 어디다 기대를 걸어? 몸도 풀리고 했으니까 나갑시다. 저 놈 황가가 슬슬 눈짓을 하네. 저 놈은 벼락을 맞아 뒤지지를 않나?”

“이 겨울에 무슨 벼락?”

그들은 웃으며 역 대합실을 나섰다. 밖은 바람이 씽씽 불었다. 옷자락을 여미어 봤자 마음뿐 찬바람은 가슴으로 가랑이 사이로 등으로 어깨로 파고들었다. 노선생은 새벽이면 꼭 가는 데가 있었다. 이 새벽에도 거기를 갈 적정이었다.

“거인인력에 가야지? 퉁씨도 가지?”

그러나 작퉁은 손을 내저었다.

“이 추운데 무슨 일이 있겠어요? 혹시 일꾼 찾거든 전화하쇼. 아, 아니! 철학자가 죽었으니 연락이 안 되겠네요. 허, 한 사람 저 세상에 가고나니 당장 아쉽네. 그 분이 우리 연락책이었는데······휴대폰으로 급한 연락을 해 주었는데.”

그들에게는 휴대폰이 없었다. 고맙게도 철학자가 중계를 해 주곤 했다. 인력사무실에 철학자 휴대폰 번호를 적어주고 필요할 때는 그리로 연락이 오도록 하고 있었다. 이제 그가 죽었으니 어디다 부탁을 한다? 노선생은 잠시 걱정을 하다가,

“뭐가 되겠지. 술씨가 인숙이에게 부탁을 해 보지?”

하고 슬쩍 눙쳤다. 인숙이는 철학자가 묵고 있는 여인숙의 그곳 문간을 지키는 여자를 그들은 그렇게 불렀다. 술씨는 인숙이 욕을 해 댔다.

“새벽부터 재수 없는 년이 왜 나와? 그 년이 꼭 나만 잡아먹으려고 난린데 휴대폰 연락이라니! 어림없어!”

작퉁은 통운 창고로 가고 둘은 찬바람을 가르며 거인인력 사무실로 걸어갔다. 시내버스라도 타면 세 정거장이라 금방이지만 그걸 탈 형편이 아니어서 언제나 2, 30분씩 걸어 다녔다. 골목을 걷노라니 어느 집에선가 밥을 하는지 구수한 냄새가 흘러 나왔다. 둘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걸었지만 속으로는 ‘아침밥을 식구들과 둘러 앉아 먹어본 적이 언제던가?’ 하며 가물가물 기억 저편에서 흔들리는 상념에 빠졌다. 몇 년간의 노숙생활, 아침을 굶는 게 습관화되었을 법하건만 여전히 밥 냄새만으로 입안에 침이 가득 고이는 것이었다.

 

-- 다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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