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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전과 함께
소설

이름-3

by 남전 南田 2009. 6. 18.

 

호암미술관- 석장승

이름-3

 

# 강순도와 강덕환

 

순도라는 이름은 아버지가 지은 그의 이름이었다. 덕환이라는 이름은 할아버지가 지은 이름이었다. 불꽃 환(煥)자가 한성 강씨 25대손 항렬자라 족보에 올릴 이름이기도 하니 반드시 항렬을 따라 지어야 한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손자의 이름을 덕환이라 지어 들고 직접 면사무소에 가서 출생신고를 했다. 그랬지만 집에서고 동리에서고 덕환이란 이름은 아예 무시되고 순도라고 불리었다.

해방이 되고 궁벽한 산촌에도 회오리인지 폭풍인지 무슨 바람인가 불어 재꼈다. 그 바람에 우익도 생기고 좌익도 생겼다. 편 가름은 한동안 마을 사람들을 정신 차리지 못하게 하더니 드디어 ‘보도연맹’이란 것이 생겼다.

강순도는 보도연맹원이 되었다. 딱 두 번 낙동강 모래사장에서 남 면장 아들이 시국강연인가 뭔가 연설을 한다면서 매말리 아재가 가자고 하도 권하는 바람에 따라가 인민이 어떻고 사회주의가 어떻고 남로당이 어떻고 하는 연설을 들은 적이 있었다. 동리 청년 대여섯 명이 함께 갔기에 줄줄이 엮여 보도연맹원이 되었다. 구장이 지서와 면사무소에서 지시가 왔다면서 강순도라고 그의 이름을 적어가더니 그 단체에 들었다고 했다.

“보도연맹이 뭐신교? 나는 마 구경삼아 따라간 거 뿐인데?”

“뭐, 별 거 있겄나? 그런 집회에 앞으로 참가하지 않는다는 서약으로다 방위청년단 같은 단체를 또 하나 만드는갑데. 우리 동네 청년 몇을 의무적으로 참가시키야 돼서······. 우리 면내에서만도 수십 명이 넘는다카는데 대접이 좋은 큰 단체가 아이겄나?”

하여간 구장이 보도연맹 입회서에 ‘강순도’라는 이름을 적을 때 따따부따 따지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그 정도에서 물러서고 말았는데 그게 큰 화근이었다. 얼마 후부터 오너라 가거라 성가신 일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 후에는 우습게도 면사무소 강당에 모여라 해서 가보면, 양복을 빼입은 높은 양반이 나와서 주전자에서 물까지 따라 마시며 이승만 정부가 어떻고 민주주의가 저떻고 하면서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들을 하는데 도통 무엇 때문에 한창 농사일로 바쁜 청장년들을 불러 모아놓고 그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그곳에 나가지 않으면 지서에서 순사가 나와서 개지랄을 하곤 했다. 그런 교육에 참석해서 ‘강순도!’ 하고 호명을 하면 ‘예!’라고 두 말없이 그가 대답하고는 한참 꾸벅꾸벅 졸다보면 해산이었다.

모심기가 다 끝나고 한숨을 돌릴 즈음 38선에서 싸움이 터졌다고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공산괴뢰군이 대전을 지나 경상도 어금까지 쳐 내려왔니.’ 어쩌니 하는 흉흉하기 만한 소문이 산골 마을에 흘러들어 왔다.

그날 아침 순도는 낫과 괭이를 지게에 지고 논으로 나가던 참이었다. 마을 어귀에 트럭이 세워져 있고 그 위에 몇 사람인가 타고 있는 걸 먼발치에서 보았다. ‘아침부터 무슨 사람들이 왔는고?’ 하고 고개를 삐쭉 내밀고 멀리서 바라보노라니 갑자기 그의 코앞에 사복형사로 보이는 사내 둘이 나타났다.

“뭐야? 넌 이름이 뭐꼬?”

순간 강순도의 뇌리에서 뭔가 번쩍하는 신호가 왔다. ‘또 연설 들으라꼬 데릴러 왔능갑다. 오늘 할 일이 많은데 도망쳐야 겠데이.’ 그는 능청스럽게 천천히 호적에 올라 있는 이름을 댔다.

“예? 이름이요? 난 강덕환이요. 와 그랍니껴?”

“아아, 몰라도 돼! 강순도 집이 요 골목 안이라카던데!”

순간 강순도는 머리가 쭈뼛했다. 틀림없었다. 그들은 그를 데리러 온 사람들이었다. 사내 둘이 그의 집이 있는 골목으로 꺾어 돌며 사라지자 그는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어느 집 앞인가 지나면서 지게도 벗어 내팽개치고 달렸다. 도치산 산자락으로 죽을힘을 다해 달려 골짜기 안으로 들어서서도 멈추지 않고 산으로 치달아 올랐다. 산 중턱 넙적방구 옆 다복솔밭에 다다라서야 몸을 납작 숨겼다. 거기서 목을 빼고 바라보면 마을이 환히 내려다보이는 곳이었다. 어릴 적에 숨바꼭질하던 놀이터이기도 했다. 한숨을 돌리면서 정신을 차려서보니 손에는 여전히 지게 작대기가 들려 있었다.

순간적인 기지로 위기를 모면한 강순도는 한 나절을 기다려 트럭이 떠나는 걸 바라보았다. 낙동강 백사장에 같이 갔던 청년 네댓 명이 고개를 숙이고 트럭을 타는 걸 확인했다.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이 마을을 감돌았다. 트럭까지 따라 나온 여자들이 울며불며 매달리고 있었다. 트럭이 떠났지만 혹시 사복형사가 그를 데려가기 위해 여전히 마을에 남아 있을까 싶어 다복솔밭에서 나가지 못하고 숨어 시간을 보냈다. 이유 모를 불안과 공포, 초조, 위기감으로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것은 본능적인 것이었다. 누가 귀띔을 해준 것도 아니었건만 그는 위험한 사태가 저 아래 마을에서 벌어진 것이라 직감했다.

그는 밤이 되어서야 조심스럽게 집으로 찾아 들었다. 아내가 벌벌 떨고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물에 빠진 생쥐 꼴로 나타난 아들을 붙들고 밥을 먹일라 옷을 챙기랴 야단을 했다. 아버지는 그랬다.

“널 찾아 데려 가야한다면서 2시간을 온 동네 집이란 집을 다 뒤지고 다녔다.”

아내도 덩달아,

“다 잡혀 갔어예. 당장 산으로 가이소. 내일부터는 내가 밥을 싸서 돌밭갱이에 갖다 둘 테니 그리 아이소.” 하며 불안해했다.

“알았다. 형사들이 오거든 부산에 취직하러 갔다고 해라.”

취직하러 떠난 친구가 생각나 그리 둘러대라고 시켰다. 빨래가 밤이고 낮이고 널렸으면 안전, 빨래가 걷혔으면 위험 신호로 약속했다. 몇 번인가 그 후에도 경찰서 형사가 다녀갔고 강순도는 아내가 돌밭갱이에 가져다 놓은 밥을 먹으면서 도치산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며 이십여 일을 지냈다.

어느 날, ‘괴뢰군이 계성천 쇠나리 다리에서 총을 쏘면서 나타났으니 주민은 빨리 피란을 가라.’는 연락이 왔다면서 아내가 산으로 허겁지겁 쫓아 올라왔다. 마을 사람들이 보따리들을 둘러메고 황망하게 강을 건너기 위해 남지철교 쪽으로 몰려갔다. 갑자기 떠나는 피란길은 뒤죽박죽이었다. 차라리 그게 강순도에게는 유리했다. 그의 식구들은 이웃사람들과는 어울리지 않고 타동 사람들 무리에 섞여 철교를 건너 걸었다. 피란민들을 안내하는 경찰이나 방위청년단이나 강순도를 더 이상 수상하게 바라보지 않았다.

그런데 김해 피란민 수용소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일이 터졌다. 밤중에 수용소를 급습한 사람들이 장정들을 모조리 들춰내 총을 들려 대구 왜관전선에 투입시키는데 강순도도 옴짝달싹 못하고 잡혀갔던 것이다. 그는 휴전하고서도 한참 지나서야 가슴에 훈장을 주렁주렁 달고서 제대를 했고 개선장군처럼 으스대며 고향으로 돌아 왔다. 아무도 그의 과거를 문제 삼아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용하게 목숨을 부지한 아들의 등을 두들기며 한숨처럼 말했다.

“그때 잡혀간 사람들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데이. 누구는 그라는데 배에 실어 저 먼 바다에 가서 밀어 넣어 뿌맀다 카고 누구는 우쨌다 카더라만······.”

어머니와 아내는 다시 살아온 그를 껴안고 감격에 겨워 울기만 했다. 이후 그는 강덕환으로 살았다.

 

-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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