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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전과 함께
소설

욱개명물전

by 남전 南田 2009. 12. 21.

 

 

(아래 소설은 마산문인대표작선집2에 수록된 졸작입니다) 

소설

욱개명물전

김 현 우

 

 

━ 허미운네

강마을 욱개(웃개: 상포上浦)에서 술어미 하면 허미운네였다. 매끈하고 깨끗한 인상의 과부였다. 죽은 서방의 성이 허가인지 그녀가 허가인지 분명치 않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불렀다.

허미운네는 보통 때는 밥과 술을 팔고 장날이면 장국과 떡도 팔았다. 장날이면 이른 아침부터 김이 푹푹 솟는 가마솥에 돼지 대가리나 소 달구지(다리)가 삶겨 졌고, 뻘건 고추장을 잔뜩 푼 툭툭한 국밥의 맛은 허미운네의 특미特味로 들쩍지근하고도 맵싸했고 선선했다. 보리쌀로 빚은 소주나 쌀 막걸리에 곁들여 먹으면 이마 콧등에서 땀이 철철 흘러내리고 무명 적삼이 후줄근하게 젖지만 기운이 저절로 솟고, 여간 많이 먹었다 싶어도 배탈 없이 속이 편했다.

허미운네의 떡은 더욱 유명했다. 낙동강 강물이 젖줄처럼 해마다 홍수로 적셔주는 무닝기들에서 일찍 베어 찧은 찹쌀을 시루에 쪄서 꽝꽝 떡메로 쳐 팥고물, 콩고물, 돈비고물, 녹두고물에 묻혀서 색깔도 여러 가지인 인절미와 영남수리嶺南水利 들판에서 거두어들인 쌀로 색색 가지의 시루떡을 일 년 내내 끊임없이 만들어 냈다. 소나무 속껍질을 삶아 떫은맛을 우려내고 맵쌀가루를 섞어 만든 송기송편, 송기절편이나 개피떡도 있었고, 밤 땅콩 팥 꿀로 소를 넣어 만든 송편과 이른 봄이면 쑥떡, 여름이면 꿀물에 반죽하여 놋시루에 쪄내는 석이(石耳)떡, 겨울이면 곶감이 박힌 시루떡, 입춘 때면 시래기를 쌀가루와 버무려 팥을 켜 사이에 넣어 찐 시래기떡과 떡국, 꿀떡…… 그리고 그녀는 운기 떡을 기막히게 잘 만들기로 소문난 여인네였다. 가을철이면 이 집 저 집 아들 딸 시집 장가 드리는 혼사가 많았는데 그녀는 그런 大事대사가 있는 집에 불려가 일을 해 주었다. 찹쌀가루에 대추를 이겨 꿀에 반죽한데다 개소를 넣고 기름에 지져내는 주악, 흰떡에 노랑 파랑 빨강 분홍 물을 들여 절편판에 찍은 색절편, 흰떡으로 개피떡처럼 만들고 썩 잘게 해 물감을 들여 서너 개 씩 붙여내는 산병(散餠), 잘게 대추를 박은 찹쌀떡을 엽전 만하게 만든 돈전병, 대추 밤 석이를 잘게 썰어서 채를 만들어 얹어서 찰전병을 넓고 모지게 부친 다음, 넓이 한 치 가량 되게 썰고 다시 그것을 어슷비슷 썰어서 설탕 개피가루를 뿌려 잰 이름도 우스운 오입쟁이 떡…… 소년의 형님이 장가갈 때도 이런 떡을 만들려고 허미운네를 부르기도 했다.

허미운네는 술을 잘 빚고 국밥을 잘 끓이며 떡을 잘 만드는 여자만은 아니었다. 거기다 예쁘고 새칩기도 했다. 개미처럼 허리가 잘록하고 통통한 엉덩이를 묘하게 흔들며 다니고, 웃음과 아양이 잘잘 넘치게 교태를 부렸기 때문에 근방의 남자들 넋을 빼앗았을 뿐만 아니라 욱개장에 오는 장꾼들도 녹아 났다.

소년의 아버지도 허미운네의 단골이었다. 외상 술값이 얼마나 밀렸든지 방앗간에서 갓 찧은 쌀을 한 가마니나 주막으로 져다주기도 해서 소년의 어머니는 그녀를 미워했다. 소년의 집에는 술이 없지 않았다. 왜밀로 만든 누룩에 보리쌀 고두밥으로 만든 막걸리가 항상 있었다. 그러면서도 아버지는 허미운네 술청에 살다시피 했다. 소년은 집에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를 찾아 늦은 밤에 찾아 가곤 했다. 술에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하는 아버지 등 뒤에서,

“아이구, 참봉 어른 손자 오셨네?”

하며 소년을 본 그녀는 반색을 했다. 그리고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쌀 고두밥이나 술지게미에 설탕을 한 숟가락 쳐서 주거나 팔다 남은 떡, 썰다 남은 모태끝을 한 움큼 떡고물과 함께 주곤 했다. 어떨 적에는 달짝지근한 단술을 한 사발 퍼서 주기도 했다.

“학교서 일등 했다민서? 아부지보다 아들이 백 배 났겠데이.”

허미운네는 입에 발린 칭찬도 듣기 좋게 해 주었다.

“인자 어서 가 보이소. 영감 홀리서 뺏을까바 아들 냄이 또 보냈능갑다.”

허미운네의 말에 아버지는 충혈된 눈을 부라리며 고함을 쳤다.

“가거라 가! 구장하고 술 한 잔씩 더하고 갈낑게.”

아버지가 고함을 쳐도 소년은 축담 아래에서 버텼다. 그러면서 떡을 입에 우겨 넣으면, “천천히 묵으라 얹힌다.” 하며 허미운네가 물을 떠다 주기도 했다.

몇 패의 술꾼들이 밀려나고 들면 아버지는 부스스 일어났다.

“이놈으 자석! 나는 세월 잘못 만났단 말이다. 나는 평생내 해보고 싶은 것 못해보고…… 니 할부지 분부대로 거행만 했데이. 그라니 농사만 짓고 살았던 기라……”

아버지는 술 트림처럼 말했고 소년을 지팡이 삼아 어두운 길을 걸었다.

허미운네는 6·25때 피난 나갔다가 강마을 욱개로 돌아오지 않았다. 피난 갔던 김해 어디에선가 영감을 하나 만났다나? 그래서 흥청대던 인심 후하던 술집 하나가 욱개에서 사라져 버렸다. 막소주나 파는 가게나 전, 아니면 바가지나 듬뿍 씌우고 순한 농군들 홀려 파산시켜 버리고야 마는 작부酌婦가 있는 술집들이 독버섯 돋듯 생겼다.

 

 

─삼준이

 

성이 없다.

언제 어떻게 되어 욱개로 흘러 왔는지도 모르는 맨발의 사나이. 이가 버글버글 끓는 장발과 맨살이 비어져 나오거나 가랑이에 달린 본전이 보일 듯 말 듯 누더기의 사나이. 나이도 살아 온 내력도 모두 잃어버린 방랑객. 항상 맨발로 뭔가 씨우적거리며 그는 마을을 돌아 다녔다.

어느 날엔가 욱개에 나타난 삼준이는 욱개다리 아래에 가마니 떼기를 덮고 자고 있었다. 그곳은 요즘이면 육교라 할 수 있는 나무다리로 제방을 연결하면서 신작로를 가로지르고 있었고 그 아래는 사람이 많이 끓는 번화가였다. 엿목판을 벌려 놓고 엿가위를 쩔렁쩔렁거리며,

“에- 맛좋은 울릉도 호박엿이야. 쫄낏쫄낏 찹쌀엿이야……”

하고 외치는 엿장수, 뽀얗게 부는 모래바람이 그대로 와 앉는 떡함지를 앞에 놓고 쪼그려 앉은 떡장수 아주머니, 봄철이면 복숭아, 여름이면 수박 참외를 얹은 지게를 세워 놓은 과일장수, 간혹 야바위꾼이 와서 돈 놓고 돈 먹기 하는 야바위판이 벌어지기도 하는 곳이기도 했다. 나무다리 위에는 모래와 자갈을 다져 깔았는데 장터마다 돌아다니며 장타령을 불러대는 각설이패나 문둥이들, 떼거지들이 단봇짐이나 길이불 보따리까지 짊어지고 몰려들어 며칠씩 자고 갔다. 그들은 마을과 장터를 돌아다니며 구걸을 했는데 간혹 삼준이도 그곳에 한 다리 끼어들기도 했지만 그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고 보통 혼자서 돌아다니거나 부서진 바가지에 뭔가를 얻어다 혼자서 먹곤 했다. 아마 그는 떼거지들에 묻혀서 욱개에 왔다가 버려진 것임에 틀림없었다.

사람들은 아침에 그를 만나면 재수가 옴 붙었다고 화를 내거나 침을 뱉었다.

“쳇! 오늘 날따귀가 나쁘군. 저 놈을 만났으니 재수 있기는 틀렸군,”

“지랄하네. 저 자석을 만냈으니 하루 종일 조심해야겠네.”

소년 또래의 아이들은 학교를 오갈 적마다 삼준이를 자주 만났다. 그러면 아이들은,

“삼준아 삼준아! 떡 줄께 나온 나!

삼준아 삼준아! 색시 왔다 나온 나!”

하고 놀리며 돌을 던졌다. 어쩌다 가마니를 덮어쓰고 누운 그를 다리 걸에서 보면 아이들은 기다란 작대기로 가마니를 들쳐 버리거나 돌질을 해 대며 놀렸다. 아이들은 돌질을 하면 처음에는 신이 났으나 한참 후에는 시들해 지곤 했다. 삼준이는 도무지 성을 내지도 않았고 웃지도 않았으며 피하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무런 표정 없이 돌을 던지거나 해코지하는 아이들을 바라보기만 했다. 어쩌다 돌이 얼굴이나 몸에 정통으로 맞아 아프면 혀 짧은 소리로,

“아이구메, 아이구메!”

낮은 비명을 쳤을 뿐이었다. 어느 추운 날,

“아니 저 넘, 삼준이 아이가?”

아버지의 외침에 소년이 내다보니 언제 왔던지 흰 눈이 소복 쌓인 장독간 옆에 삼준이가 거적 데기를 쓰고 덜덜 떨며 서 있었다.

“밥…… 밥…….”

삼준은 다 망그러진 바가지를 내밀었다. 아버지는 축담 아래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어머니가 더운밥을 한 그릇 퍼 담고 그 위에 된장국을 몇 국자 퍼서 내밀었다. 아버지는 아랫도리가 허연 살이 보이는 옷차림이 안쓰러웠든지 어머니에게 헌 무명바지를 꺼내오게 했다.

“입어 봐…… 입어.”

“…….”

삼준은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떡거렸다. 아버지가 옷을 입히는 동안 소년은 동상에 걸려 퉁퉁 붓고 무지무지하게 얼어터진 발과 손을 바라보았다.

“짚신이라도 신어.”

아버지는 자신이 삼아 헛간 기둥에 걸어 두고 있었던 짚신까지 가져와 신겨 주었다.

사람을 해치거나 남의 물건을 훔칠 줄도 모르고, 또 동냥을 주지 않아도 찌그렁이를 모르는 순수 100%의 사나이 삼준이는 점점 동리 사람들의 동정을 받았다. 삼준이가 정말 선량하고 아이처럼 착하고 순한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모두들 그를 보살펴 주고자 했다. 떠돌이 문둥이 패나 사지가 멀쩡하면서도 비럭질에 이력이 난 거지들이나 일본이나 만주에서 왔다는 왈짜패 귀환동포들에게는 모지락스럽게 하던 사람들도 삼준이가 문 앞에 오면 고기 꽁댕이라도 내주며 축담 아래에 앉히고 따뜻한 밥을 먹였다.

혹한이 계속되던 정초, 욱개에서 며칠간 삼준이가 보이지 않았다. 궁금증이 생길 즈음 동네에 초상이 났다. 상두꾼들이 상여를 가지러 마을 뒤에 있는 상여 집으로 갔다가 거기서 삼준이를 발견했다. 삼준이는 그곳에서 뻣뻣이 얼어 죽은 시체로 발견된 것이었다.

해방 후 몇 년 동안 그는 욱개 조무래기들의 친구였고, 그래서 욱개 사람이었다.

  

 

─빙상수

 

아마 성이 변씨(卞氏) 였는가 싶다. 그런데 사람들을 그를 빙상수라 불렀다.

한마디로 목곧이였다.

빙빙 돌리는 지팡이. 그는 지팡이를 빙글빙글 잘도 돌렸다. 그래서 <빙>짜가 이름 위에 붙었는지도 모른다.

나이는 사십 대, 욱개 장날이면 각설이패에 앞서 나타나는 술 잘 먹고 욕 잘하고 공연히 생트집 잘 잡고 싸움질 잘하는 건달이고 한량이었다. 또 그가 장판에서 내놓고 김일성이며 이승만을 개 새끼들이라고 욕을 할라치면 지서 순경도 빙글빙글 웃으며 못들은 척 지나쳐 버리고 마는 욱개장의 괴짜였다.

닷새 만에 열리는 장날에 그가 보이지 않으면 괜히 서운하고 장은 파장이 된 기분이었다. 「세비로 로오만」 양복을 쪽 빼 입고, 번쩍번쩍 빛나는 금줄의 회중시계를 조끼 주머니에서 늘어뜨리고, 새하얗거나 빨간 손수건을 세모로 접어 양복 위 호주머니에 보일락 말락 꽂은 빙상수가 까만 중절모를 쓰고서 오른손에는 반들반들 손때가 묻어 빛나는 「스틱」이라 불리는 서양 지팡이를 휘젓거나 아니면 왼쪽 팔에 걸치고서 겨우 전을 펴기 시작하는 초장에 나타나 한 바퀴 장판을 돌아야 진짜 장이 선 기분이었다. 담뱃대와 물부리를 파는 담뱃대장수, 참빗과 얼레빗 바늘 등속을 파는 방물장수, 목판 가득 엿을 담고 선 엿장수, 여러 가지 색깔의 옷감을 늘어놓은 포목전, 구수한 냄새를 피워대는 국밥장수, 땜장이, 생선 비린내 풍기는 어물전, 땅땅 망치 소리가 요란한 장터 입구의 대장간, 멍석을 펴놓고 곡식을 기다리는 싸전의 되장이들……

“여 빙상수, 안 죽고 잘 왔는가?”

“신수가 환하게 피있네? 세상에서 제일 팔자가 좋네그랴.”

“지팡이 한번 돌려보소.”

장꾼들은 농을 걸어 술 한잔하자고 이끌었다. 그러면 흥청거리는 거래가 장판 곳곳에서 벌어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욱개장은 닷 새에 한 번씩 그렇게 열렸다.

그는 일본 유학을 한 인텔리라 했다. 그런데 독립운동을 했다며 왜놈 순사에게 붙들려 모진 고문을 당했는데 그때 살짝 돌아버렸다는 소문이었다. 그전에는 새털 뽑아 그 자리에 꽂을 양반이라 했다. 꽤 잘 사는 집안의 아들로 장가도 들고 자식도 두엇 낳아 유복하게 살았다. 돈맛을 모르고 지내는 한량이라 돈냥이나 지니고 다니면서 술을 마셨는데 사실 제 돈을 주고서 마신 량보다는 얻어 마신 량이 더 많으리라 사람들은 말했다.

잔뜩 술에 취하면 파장의 싸전에서 그의 장기인 지팡이를 돌렸다. 빨갛게 빛나는 서녘 햇살을 받아 돌고 있는 지팡이는 아름답게 부챗살의 분홍빛을 품어 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두 다리를 번쩍번쩍 치켜들며 온몸을 흔들거나 뒤틀며 두 팔 두 손을 번갈아 가며 율동적이면서도 멋지게 지팡이를 돌리면 지팡이가 내뿜는 환상적인 빨간 빛 속으로 빙상수는 사라져 버리곤 했다. 그것을 바라보는 소년도 어느덧 그 빛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것은 찬란한 황혼이었고 다가올 불안의 징조이기도 했다.

빙상수, 그는 6·25뒤 욱개장에서 사라져 버렸다. 사람들이 피난 갔다 돌아오고 장은 여전히 서고,

“허허, 허리고 들어간다. 품마 품마 각설아.

이 각설이가 이래도 가문 집에서 나왔다.

양돈 갯돈 마다하고 푼돈 바래서 댕긴다……

아래 장에는 비오고 오늘 장에는 눈 오고

한 대문만 빠지면 지집 자석을 굶긴다…….”

하고 각설이패도 돌아 왔건만 그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나중에 욱개장에 떠돈 소문에 의하면 그는 미쳐 피난을 나가지 못했다 한다. 인민군에게 붙들렸는데 고분고분 따랐으면 목숨이라도 부지했을 텐데 물색도 모르고 김일성 욕을 했다가 죽창에 찔려 죽었다고 했다. 어쩌면 죽창에 찔려 솟아났을 그의 피가 그의 지팡이에서 품어내던 신비로웠던 빨강 색깔과 같았으리라 소년은 가끔 생각했다.

 

 

 

─남민장 아들

 

남재혁이라는 이름이 있었어도 욱개 사람들은 그의 아버지가 일제시 면장을 지냈던지라 남민장(면장을 민장이라 불렀다) 아들이라 통상 호칭했다. 남민장 아들은 빨갱이였다. 일본 유학을 가서 하라는 공부는 않고 빨갱이 물이 잔뜩 들어 돌아와 끝내 남면장의 그 좋고 도도하며 당당하던 집안을 쑥밭으로 만들었다. 거기다 제 혼자만 빨갱이가 되고 말았으면 하다못해 동정이라도 받았을지 모르지만, 욱개 주변 마을의 제법 또록또록한 눈망울에 말발이나 서는 젊은이들을 다 휘몰아 남로당 패거리로 만들었고, 제 여동생(참 예쁘고 똑똑한 처녀로 소년의 둘째 형님과 혼담이 오가기도 했다)마저 남로당 당원이 되게 했으니…… 해방 후 2, 3년 남민장 아들은 욱개 인근에서 빨갱이로 그 이름이 드높았다.

그는 소년의 큰 형님과 보통학교 동창이었다. 그래서 그가 도회지 학교로 진학을 했을 때나 일본으로 유학을 갔을 때, 큰 형님은 그렇게 하지 못해 끙끙 앓아 드러눕곤 했다. 그러다가 큰 형님은 면사무소 급사로 들어갔고, 세월이 흘러 면서기가 됐다. 그럴 때 경찰의 단속을 피해 도피 중이던 남민장 아들이 한밤중에 소년의 집에 나타났다. 형수님이 술상을 차려 방에 디밀고서 시동생들의 공부방으로 건너와 걱정을 했다.

“되련님, 큰일이지예? 남민장 아들이 뭐 땜에 우리 집에 왔겠능교? 형님에게 빨갱이 노릇 같이 하자고 온 기 틀림없어예.”

“설마 그럴 리가…….”

모두들 겁을 냈다. 어머니도 낌새를 채고 걱정을 했다. 아버지는 술에 곯아떨어져 남민장 아들이 왔는지 도둑놈 고수가 왔는지 세상모르게 자고 있었다.

그때 빨갱이들은 밤마다 낙동강 건너 제왕담 절벽 위에서 횃불을 수 십 개씩 올리며 무어라 고함을 치고 만세를 불렀다. 이쪽 지서에서 경찰과 의용 청년단 대원이나 자치대 청년들이 나룻배를 타고 건너가면 횃불을 꺼버리고 도망쳤다. 절벽으로 가서 샅샅이 뒤져도 쥐새끼 한 마리 찾을 수가 없으니 허탕 치기가 일 수였다. 그러나 도로 강을 건너와 욱개 나루 이쪽에 서면 또 제왕담에는 횃불이 오르고 만세 소리가 드높았다. 욱개 마을에서 뚝 떨어진 쇠나리 백사장에서는 밤마다 그들이 비밀스럽게 모여 공부도 이야기도 하고 노래도 불렀다. 소년의 친구들 중에는 밤에 거기 가서 그들의 노래를 배우고 왔다는 아이들도 있었다. 빨갱이들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었던 해방되고 얼마동안에는 그런 일이 자주 있었다. 욱개 마을에는 지서나 부잣집이 습격당하는 일이 다행스럽게도 없었으나 가까운 의령이나 합천에서는 한밤중에 사람들이 나타나 사람도 죽이고 불도 지르는 일이 빈번해 졌고, 그러다 공산주의 활동이 불법화되고 여순 반란사건 같은 폭동이 여러 곳에서 터지자 남민장 아들을 위시한 빨갱이들은 산으로 피신하여 빨치산이 되고 말았다. 그러고 나서는 남민장 아들이 거창에서 총에 맞아 죽었느니, 의령 궁유지서를 습격하는데 앞장을 섰느니 하는 소문이 퍼졌고, 또 남민장 딸도 서울에서 붙잡혀 총살당했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마을 사람 모두들 남민장 집을 슬슬 피해 돌아다니기 시작한 것은 그 무렵이었다. 보리타작 모심기 철이 되었어도 아무도 그 집 농사일을 거들어 주려 않았다. 괜히 오해를 사 불똥이 튈까봐 지레 겁을 냈다.

소년의 아버지도 형님들도 그랬다. 아버지는 남민장 딸을 둘째 며느리로 삼겠다 여러 달을 매파를 놓아 혼인을 맺어보려 애쓰다가 빨갱이 소동이 나자 싹 입을 씻었다. 그리고는 재빨리 둘째형을 불당골 이도사 막내딸에게 장가를 보냈다. 큰 형님도 남민장 아들과 함께 진학이나 유학을 못한 것을 한으로 삼고 부모에게 곧잘 원망을 하였는데 그것도 쑥 들어가 버렸다.

모두들 조마조마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심정인 그럴 때에 남민장 아들이 권총을 품에 품고(형수님의 말이다) 큰 형님을 만나러 나타났으니 온 식구들이 간을 조릴 만했다. 긴장하고 초조하게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지서에 신고하러 간다는 것은 아무도 생각 못했다. 아니 오금이 저려 감히 그러하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고발을 하면 보복을 받게 될 것이고, 아니면 밖에 그의 부하들이 집을 빙 둘러싸고 망을 보고 있을지도 모르니 또 그는 큰 형님의 친구이니까 큰 형님이 알아서 처리하리라 믿고 싶었다.

오랜 후에 그는 사라졌다.

“우예 됐노?”

어머니가 걱정스레 물었다.

“걱정 마시이소. 북으로 간답니더.”

큰 형님은 더 말이 없었다. 어머니는 식구들에게 입을 꼭 다물 것을 다짐했다.

“아이고! 망할 넘! 자수하면 될 꺼로. 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들 다 용서해 준다 카던데.”

어머니의 한숨에 큰 형님은,

“난리가 날 낍니더. 이래 가지고서야…….”

했다.

“바로 이기 난리지, 뭐가 있노?”

남민장 아들이 떠나간 후 한동안 마을은 평온해 졌다. 남민장의 모든 식구들도 욱개를 버리고 서울로 떠나가 버렸다. 그 큰집은 덩그렇게 빈집이 되어 먼 일가 되는 사람이 와서 집을 지켰다.

멋모르고 날뛰던 청년들은 더러 빨치산이 되려 지리산으로 가고, 몇 명은 집이 있는 마을 근처에서 은신하다가 기어코 발각되어 붙들려서 감옥으로 가고, 몇 명은 죽도록 매를 맞고 전향하겠다는 서약서를 쓰고 풀려나기도 했다.

6·25가 나자 전에 빨갱이 노릇을 했거나 동조했던 사람들에 대한 예비 검속이 시작되었다.

눈치 빠른 사람은 산으로 도망치거나 일본으로 밀항을 하거나 부산으로 어디로 튀었고, 전향하겠다고 각서를 쓰고 난 후 아무런 좌익 활동도 하지 않았으니 설마 잡아 가두기야 하겠나, 설마 죽이기야 하겠나 하고 어리석게도 순진하게 집에서 어정거리다가 붙잡혀 간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그 후 어떤 이는 무소식이고 어떤 이는 손이 발이 되게 빌고 빌어서 용하게도 살아 돌아오기도 했는데, 뒤에 들리는 소문은 줄줄이 엮어서 총살을 했다는 말도 있고 바다에 처넣어 버렸다는 믿지도 못할 흉흉한 소문이 떠돌았다.

남민장 아들과 딸의 소식이 뚝 끊겼다. 북에서 높은 자리에 앉았다는 둥, 월북을 않고 일본으로 내빼 산다는 둥, 확인할 길 없는 말들이 심심찮게 들렸으며, 정보과 형사가 그 집 가족을 여러 해 감시하고 있다는 소문도 있었으므로 월북한 게 진짜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 큰 대문집 미치광이

 

욱개 아이들은 무서운 것이 두 가지 있었다. 일 년에 한두 명은 익사해도 무서워하지 않고 강에 나가 멱을 감거나 얼음을 지치기를 그치지 않을 만치 두려움을 모르는 아이들이었는데도. 서낭당 울긋불긋한 헝겊이 드리워진 왼 새끼 줄을 겁도 없이 제치고 서낭나무에 기어올라도, 또 천하대장군 발 뿌리에 오줌을 내깔겨도 그래서 당할 동티도 두렵잖았으며, 더더구나 그믐밤에 공동묘지에 가서 말뚝 박기나 상여 집에 가서 상여꽃 가져오기, 휘청거리는 나무 꼭대기 더 높이 오르기, 도깨비가 나온다는 골목이나 야시(여우) 매구가 예쁜 처녀로 둔갑해 있다가 총각이 지나가면 홀려져 골통을 빨아먹어버린다는 으스스한 고개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두 가지, 아니 두 사람을 아이들은 겁냈다. 바로 문둥이와 미치광이였다.

그 중 두려운 존재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미치광이였다. 아이들의 등교 길에는 커다란 대문짝에 무서운 표정의 신장(神將) 화상을 그린 문비(門裨)를 붙인 큰 기와집이 있었다. 천석지기 만석지기였던 부자가 사는 집이라 했다. 부자는 해방되기 4·5년 전에 죽었으나 그 가족들은 그대로 사는데 그럭저럭 그들의 세도는 한 풀 꺾여 기우는 집안이었다. 더구나 해방이 되자 토지개혁으로 천석지기 토지가 하루아침에 소작인들이게 다 흩어져 버렸으니 소작료 받아 넣던 곳간만 덩그렇게 남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부자가 망해도 삼 년을 간다 하더니 여전히 그 집 대문은 아이들 집 바자 문이나 사립짝과는 달리 육중하게 꽉 닫히고 문비는 옛 위엄 그대로였다.

이산한 소문이 아이들 사이에 퍼지기는 그 즈음이었다. 대문간 방에 부자의 미친 막내아들이 갇혀 있다는 것이었다. 부자의 아들은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다가 네 살짜리 계집애를 잡아먹고서 미쳤다고 했다. 아니 이 부자가 명당자리라며 남의 묘를 파내고 그곳에 제 부모를 이장(移葬)하고 자신의 묘도 거기에 썼으므로 그 동티로 아들이 미쳤다고 했다.

미치광이는 한밤중이면 꼭 발작을 일으켜 손발을 묶어둔 굵은 쇠사슬을 뚝뚝 끊어 버리고 대못을 꽝꽝 치고 자물통을 여러 개 채운 방문도 괴상한 힘으로 쉽게 부수고 도망쳐 버린다고 했다. 미치광이는 그러면 낫이나 쇠스랑이를 들고 천방지축 산으로 들로 며칠이고 쏴 다닌다고 했다. 그러다가 일꾼들이 사방으로 나가 겨우 찾아내 끌고 와서 쇠사슬로 칭칭 동여매 놓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발광을 해 뛰쳐나가곤 한다는데 어린애만 보면 죽여 버린다고 하는 바람에 아이들은 공포에 떨어야 했다.

소년은 어머니에게 정말 이 부잣집에 미치광이가 있는가 물었다.

“물은 제 골로 흐르고 죄는 지은 대로 가제……”

어머니는 그런 소리만 했다.

아이들은 학교를 오가며 이 부잣집의 대문을 항상 두렵게 바라보며 걸었다. 금방 커다란 대문이 펄쩍 열리고 봉두난발(蓬頭難髮)에 벌거벗은 미치광이가 낫을 휘두르며 달려 나올 듯했다.

“늬, 미치갱이 본 적이 있나?”

“늬는?”

아이들은 서로 도리질을 했다. 문둥이가 아이를 잡아 보리밭으로 끌고 가 간을 내 먹는다는 소문이었지만 아무도 본 적도 없고 확인도 못하는 소문이었듯 아무도 이부자 집 미치광이를 본 적이 없었다. 아이들 사이에 간이 크다고 대장이 된 껌덕이가 죽을 용기를 내어서 대문간 방의 조그만 창가 아래까지 가서 짐승 우는 소리는 들었지만 창문이 너무 높아 다른 것은 볼 수 없었다고 하며 기가 죽었다. 아이들은 그 조그만 창문만 바라보고도 마음이 서늘해지곤 했고, 여학생은 비오는 날이면 길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피난을 갔다 와서는 아이들도 미치광이를 잊게 되었다. 급히 피난 떠나는 북새통에 식구들이 그만 미치광이가 있는 방문의 자물통과 쇠사슬을 열어 놓지 못하고 나갔기 때문에 석 달 후 돌아와 보니 굶어 죽어 있었더라 는 얘기와 미치광이를 데려 나가긴 나갔는데 피난길에 그만 그를 잃어 버렸다는 얘기도 있었으나 끝내 이 부자 집에서는 아무런 말도 않고 지냈다.

그때쯤 아이들은 헛소문에는 놀라지 않을 만큼 늠름하게 성장하고 있었다.

 

* 필자 주 : 이 소설은 <마산문인대표작선집2 산문편>에 수록되었는데 당초 중편소설이었으나 편집관계로 일부만 수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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