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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전과 함께
소설

유록동 늙은 이야기꾼의 갈망

by 남전 南田 2009. 12. 24.

-- 아래 소설은 마산문학(2009년 33호에 실린 졸작이다) 

 

단편소설

유록동 늙은 이야기꾼의

갈망(渴望)

김 현 우

윤민수는 유록동(柳綠洞)에 있는 완당(唍堂) 사무실을 가며 혼자 헤벌쭉 웃었다. 완당 선생의 도도한 장강유수 이야기 소리에 그는 항상 기가 막히고 속이 뒤집히고 그러다가 무릎을 탁 치며 ‘옳다! 그거다.’ 하고 탄복해버리곤 했다. 사실 윤민수가 완당 선생을 자주 찾는 것은 글 쓸 소재보다는 원기를 얻기 위함이었다. 선생이 두고 쓰는 문자는 국어가 아니라 영어 ‘ambition' 이었다. 대망, 야망, 큰 뜻······, 흔히 중학생 때 보았던 교실 전면 태극기와 함께 붙여져 있던 급훈 ’boy's be ambition' 바로 그것이었다. 그래서 언제나 완당 선생을 찾아 갈 때는 기분이 좋았다. 이유도 없이. 선생이 좋아하는 맥주 서너 병이면 얘기 값은 충분했다.

선생은 삼국지 초한지를 시작해서 사마천이 썼다는 사기(史記)까지 줄줄 외우면서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데 그 박식함에 탄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물론 왜정 때 동경에서 대학을 다니고 일본 땅에서 제법 돈벌이가 되는 사업까지 한 사람이라 일본 문학에다 사무라이 칼싸움 얘기까지 겹치면 이건 신 오른 무당이 세상 이곳저곳 주름잡는 영험한 귀신이라는 귀신은 다 불러 모으는 형세로 기가 뻗히고 입에서 침을 튀기며 얘기를 풀어냈다. 장화홍련전에다 춘향전에다 박씨전쯤이야 저리가라이고 윤민수가 듣도 보도 못한 ‘전설 따라 삼천리’나 다름없는 난생처음 들어보는 얘기가 수두룩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선생에게 홀딱 빠져 있었다.

물론 선생 앞에서는 깎듯이 영감 소리는 빼고 선생님으로 존대하지만 한발만 뒤로 물러나 돌아서면 ‘완당 영감’이었다. 어쩌면 완당 선생을 남이야 뭐라고 하든 말든 윤민수에게는 버거운 존재가 아니라 만만하고 친근해 떼나 억지를 부려도 좋고 설사 풍을 치고 거짓말을 해도 선생에게는 조금도 먹혀들어가지 않을 테니 걱정이나 겁을 낼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뭐 확실한 근거도 없었다. 선생의 얘기를 듣고 있자면 그렇게 되어 버린다는 게 윤민수의 마음이었다.

“허허! 소설가 동기(同期) 왔구만. 내 집필실에 자주 오는 사람 중에 윤 작가가 제일 반가워. 그러나 내가 글 쓸 틈이 없지.”

윤민수가 2층 일본식 주택인 월남동 완당 사무실에 들어서자 선생은 큰 덩치에 굵은 팔을 내 휘두르며 악수가 아니라 끌어안았다. 반갑다는 표시이기도 하지만 끼리끼리 논다고 윤민수가 소설을 쓴다니 같은 고민을 하는 동류로 전연 거리를 두지 않는다는 뜻이 담겨 있는 포옹이었다. 물론 그가 조직하고 스스로 회장이 된 ‘마산한시동우회’의 회기도 만들어 의자 뒤에다 세워놓고 누가 보건 말건 ‘완당문학연구소’ 간판도 걸고 연구소장으로 자처하였다. ‘김삿갓 평생시’란 한시집도 내놓았다. 앞머리털이 몇 올 밖에 남지 않은 대머리를 숨기느라 느지막이 쓰기 시작한 검정 베레모에 좀 큰 검정 테 안경을 끼고 거기다 파이프 담배를 물고 <회장 완당 아무개>라 자개명패 앞에 버티고 앉으면 영락없이 정국을 쥐락펴락하는 위세 등등한 국회의원 나리나 턱짓으로 부하직원을 똥개 부리 듯 부리는 고관의 위풍당당함이 엿보이는 풍모였다. 명함에는 커다랗게 소설가 아무개라 박은 다음 누가 알아주든 말든 ‘야! 이놈들아! 나는 소설가 아무개다.’하고 명함을 만나는 사람에게 내밀었고, 혼자 있으면 펜을 잡고 소설 쓰기에 골몰하고 있는 이야기꾼이었다.

완당과 윤민수는 등단 동기였다. 문단에 오른다는 뜻으로 흔히 등단이란 말을 쓰는데 완당 선생이 경남신문에 <적색인간>이란 지리산 빨치산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로 신춘문예에 당선되던 해에 윤민수도 어떤 문예잡지에 소설로 신인상을 받았다. 그런데 인연은 흔히 얽히는 것이 기묘한 거라 선생이 신춘문예에 응모하면서 윤민수가 신인상을 탔던 잡지에다 소설을 투고해 놓았든지 완당 선생도 그와 함께 신인상을 받았던 것이었다. 윤민수는 선생이 신춘문예에 당선된 소설을 읽고서,

“소재는 멋진데 구성이 재미없네. 나 같았으면 차라리 지리산에서 도망치는 유상태보다는 진짜 빨치산인 이광우를 주인공으로 했더라면 더 좋았을 걸.”

하고 입맛을 다셨다. 그러면서 그는 소설에 당선된 사람의 이력을 보고서 놀랐다. 나이 일흔 살에 줄줄이 엮어놓은 경력이 화려하다 못해 기가 막혔다. 일본 전수대학, 경희대학교 졸업에 법제처가 어쩌고 마산중학교 교사에······. 범상치 않을 경력에 윤민수는 늦깎이 소설가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확 떠올랐다. 그러나 쉽게 만날 수가 없었다. 그러다 완당 선생이 같은 문예잡지에 또 등단했다는 걸 알고 나서는 용기를 내 유록동 선생 집으로 전화를 했던 것이었다.

“저 윤민수란 사람인데요. 선생님, 만나 뵙고 싶어서 그럽니다.”

그때 저쪽에서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옳거니! 윤 작가로구만. 나도 만나고 싶었어요. 당장 우리 만납시다. 신마산 아세아다방 아시오? 그놈의 다방 아가씨들이 내가 가기만 하면 바가지를 씌우려 달려드는데 거기로 지금 당장 오시오. 내 기다리고 있겠소.”

그래서 만났던 것이었다. 뭐 이것저것 자기소개를 할 필요도 없었다. 서로 잡지에 난 약력이나 사진을 보았으니 구면이나 다름없었다. 만나자마자 완당 선생은 커피를 마셔대면서 소설 얘기부터 꺼냈다.

“윤 작가 나이가 마흔 몇이라니 정말 새파란 청년이구만. 그래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지? 윤 작가를 만나니 고립무원 유비가 조자룡이 만난 거처럼 반갑네.”

“저 또한 그렇습니다. 막상 소설을 한두 편 겨우 써서 뭐 신인상이란 거 받고 등단을 했지만 말입니다. 아직 초등학생 글쓰기 작문 수준입니다.”

“아, 아녀. 제대로 국어교육 받은 윤 작가 실력이 나 같은 늙은이를 능가하는 것쯤이야 당연지사이고······. 난 경남신문에 소설을 보낼 때 일흔 살 사내의 오기였지. 누군 망령이라고 할지모르지만 내 딴에는 시험대요 도전이었어, 의욕과 의지 그리고 투지······. 바로 앰비션의 발로였지. 하하하. 그리고 그때 심사위원이신 구인환 선생이 또 다른 작품이 있으면 보내라 하길 레 보낸 것이 문예사조에 신인상을 받은 ‘낙동강 엘레지’였어. 두 작품 다 50년대 민초들의 애환이 주제였지.”

“두 작품 다 발로 뛰어서 얻은 듯 하데요?”

“암! 지리산을 다섯 번, 낙동강을 두 번 밟았지. 그런데 윤 작가를 만나니 정말 이제는 외롭지 않다는 생각이 들구먼. 등단을 하고보니 문단이란 데가 좀 그렇더군. 일흔 살 내 나이가 소용이 없어. 새파란 젊은이라도 일찍 문단에다 이름을 내 걸었다면 내가 선배 대접을 해야 한다더구먼.”

“아, 예. 그게 문단의 전통이랍니다. 나이를 불문하고 등단이 하루라도 늦으면 후배로서 깎듯이 문단 선배로 대우해야 하는 게 불문율이랍니다. 저야 나이가 적으니 그런가보다 하고 허리를 조금 굽히고 네네 하고 굽실거리면 되지만 선생님께서야 연세가 있으신데 감히 누가 선배가 어쩌고 유세를 부리겠습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 하여간 난 원로 대접을 받기는 어렵지? 원로란 글자 그대로 한 세계에서 오래 활동해 경륜이 쌓인 분을 지칭하니까, 내가 나이야 많지만 산지사방 오만가지 직업을 가지면서 헤매고 다니다 늦게야 깨닫고 문단에 얼굴을 디밀은 것이니 얼마나 일천한가?”

“하지만 선생님께서 연륜이 있고 열정이 있으니 단방에 문명을 날릴 겁니다.”

“열정? 난 그걸 앰비션이라 하지. 그, 글쎄, 난 말이야, 일본어에는 한 가락 하지만 한글에는 자신이 없네. 해방이 되고서야 한글을 배운 형편이었단 말이야. 내 웃기는 얘기 하나 할까? 스물 일고여덟 살 약관에 해방되고 4년째든가? 내가 뭐 하려고 했는지 알아? 초등학교, 그때 국민학교라 했지, 그 학교장이 되려했지. 교사 경력이 있었느냐 묻고 싶겠지?”

“당연하지요. 교사를 해야 교장 되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재미있는 이야기가 되는 거야. 소설은 뭐라뭐라 해도 재미있는 줄거리가 있어야 독자에게 읽히거든. 난 말이지, 당시 학연 지연 금연(金緣) 따위 각종 연줄로 벼슬을 하는 걸 엽관이라고 비난하면서도······. 무턱대고 교장 자리를 달라고 도 교육국장에게 요청했었거든. 문교부 보통국장 명함을 들고 찾아가서. 우리 정부가 정식으로 출범한 게 언제인지 아시나?”

그의 느닷없는 질문에 윤민수는 한참 머리를 굴렸다. 그래도 얼핏 생각이 나지 않았다. 1945년 해방이 되었으니까······. 1년 후인가? 2년 후인가? 남북한이 갈리고 좌우익이 피터지게 싸움하고 찬탁이니 반탁이니 난리가 나고, 그때 김구 선생이 암살당했지? 아냐, 그때는 이승만 정부수립 이후인데?

“어허! 소설가란 역사를 꿰뚫고 살아야지. 1948년 8월 15일이 아닌가? 제1공화국이.”

“아, 예······.”

“난 그 이듬해 정월에 고향 마산에서 청운의 꿈을 품고서 일약 서울로 올라가 국무원 법제처 주사자리를 얻어 대한민국 최초로 각종 법률을 만드는 데 일조를 했지. 그러면서 야간대학도 다니고 당시 고등고시 격인 해군 법무관 시험에 합격을 했지. 그런데 10번까지 임관되는 바람에 11번인 나는 탈락되는 불운에, 또 육군 법무관 시험도 쳤는데 김구선생의 암살자가 유죄라는 답안을 썼는데 그게 틀렸다는 거야. 낙방이었지. 실망이 커 고향으로 돌아오려고 2년을 근무했던 법제처를 그만 두었지. 그래서 그간 친분이 있었던 문교부 보통국장에게 교장 자리 하나 부탁했더니 명함을 주는 거야. 경남도에 가보라고.”

윤민수는 선생의 얘기에 귀가 솔깃해졌다. 완당 선생의 이야기는 선후종횡이 별 따로 없었다. 한글 교육을 받지 못해서 글쓰기가 힘들다는 얘기인데, 이걸 얘기하다가 보면 엉뚱한 곳에서 또 다른 얘기로 건너가 있었다. 대충 종합해 보면 그는 명함을 내밀고 교장 자리를 요구하니 마산 창원 근처 교장 자리는 한참을 기다려야 하고 당장 교장으로 발령을 받으려면 함양 거창 같은 경남 서부는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마산 창원 아니면 안 된다고 하자 그러면 교장 발령을 받을 몇 달 동안만이라도 평교사로 근무를 해 달라고 했다. 명함의 위력이 대단했던 모양으로 혹시나 서울에다 대고 푸대접 받았다고 일러바칠까 겁냈던 것이었다.

“허어! 가라는 학교에 가 보니 교장, 교감 다음 서열에 내 이름이 있는데 쪼무래기 아이들을 가르치려니 이건 아니란 말이야. 한글을 아이들과 함께 배워야 될 판이었거든. 교장은 하겠는데 평교사는 못하겠더라고. 핫핫하. 그만두고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지. 6·25가 터지고 그러다 중학교 교사가 되었지. 내가 소양배양했던 거지.”

윤민수는 기가 막혀서 따라 웃고 말았다. 평교사 경력도 없는 사람이 교장을 하겠다니! 정말 그 시대는 원칙도 뭣도 없는 혼란기였고 개판이었나 보다. 아무리 아이들을 가르칠만한 선생을 구하기 힘들었던 시대이라지만. 그러나 윤민수는 내색을 않고 완당의 얘기만 들었다. 얘기를 하다말고 그는 책을 한 권 쑥 내밀었다.

“구구절절 자세한 얘기는 여기 있네. 금방 한 얘기는 ‘바보·바보· 큰 바보야!’ 소제목 아래 써 놨네. 난 커다란 포부, 엠비션을 가졌지. 그러나 그건 바보짓이었지.”

엉겁결에 책을 받아보니 표지에 <세월 속에 묻힌 세월> 이라 인쇄돼 있었다. 소설인지 시집인지 뭔지 그런 표시도 없이.

“아, 아이고! 책도 내셨네요. 고맙습니다. 그런데 이, 이거는······.”

윤민수는 급히 책장을 주르르 넘겨보니 자잘한 글씨가 페이지마다 빼곡히 들이차 있었다. 산문집인 모양이기는 한데······.

“내 자서전적 소설이라네. 시 쓴다는 양반에게 이 책을 주었더니만 자전소설이라 해야 맞대더군. 책 껍데기에다 그걸 밝혀놓아야 한데. 내가 그걸 알았어야지. 하하하.”

“정말 용하십니다. 언제 이런 책을 내셨습니까? 대단하십니다.”

“윤 작가! 내가 이걸 쓴지 몇 해가 지났어. 이 사무실에서. 그냥 처박아 두었다가 정말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다시 손을 봐 출판했지. 진작 윤 작가를 알았더라면 자문을 좀 받았다면 좋았을걸.”

“아, 아닙니다.”

“허! 윤 작가와 난 등단 동기가 아닌가? 동기란 친구이고 친구라면 허물 않고 이러쿵 저러쿵 충고에 잘잘못도 서로 주고받아야 하는 법이야. 안 그런가?”

“친구라니 말이 안 됩니다.”

“허어! 난 고희를 맞은 늙은이가 아니야. 숨이 발딱발딱한 청년, 등단 초년병이란 말일세. 어디 신병이 늙은이가 있던가? 윤 작가와 나는 똑같은 출발선에서 뛰기 시작한 동기란 말야. 아닌가? 그러니 앞으로 우리 친구하세. 친구. 절대 내 앞에서 나이가지고 대접을 하려 말아. 그게 날 푸대접하는 거란 말이야.”

그날은 그 정도에서 그치면서 윤민수는 완당 선생의 자칭 자서전적 소설책 한 권을 받아 쥐고 헤어졌다. 집에 돌아와 그걸 사나흘쯤 걸려서 다 읽었다. 마산에서 출생, 소학교 때 부모 따라 일본 동경행, 기술학교로 진학하면서 기술자로 군수공장 근무, 조혼, 20살에 장남 출생, 전수대학을 다니며 가내공업 시작, 금산전공사, 대창전기 경영, 1945년 1월 귀국, 일본서 벌어 온 돈으로 일본인 땅 구입(지금 창원 경남도청 자리), 해방, 농사, 법제처 근무, 야간대학 졸업, 고등고시 낙방, 초등학교 교사, 2대 국회의원 출마, 6·25, 중학교 교사·······월남(후에 베트남)에 가서 5년 베트콩 속에서 살아남기, 오리, 닭 사육······. 동시에 윤민수는 완당 선생의 절망이 아닌 갈망이 무엇인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아니 선생의 굴곡이 심한 인생살이는 엠비션-야망(?)이라기보다는 조급함 때문에 자초한 일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좀 느긋이 법제처에서 1, 2년만 더 근무했더라면 인재난이었던 시대이었으니 문제없이 과장, 국장이 되었을 것이고, 또 초등학교 교장도 신학기가 되도록 조금 참고 기다렸다면 교장 발령을 받았을 것이었다. 아마 완당도 그것을 뒤늦게 깨달은 듯 그 얘기의 소제목을 ‘바보·바보·큰 바보야!’ 하고 달았던 것이었다. 마산중학교 교사 10년 외에는 한 직장, 같은 일을 조금만 세월이 지나면 끝장을 보면서 또 다른 일을 야심차게 시작하곤 했다.

자전소설은 한 마디로 굉장한 보물 덩어리 같은 느낌이었다. 잘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 같은 글이었다. 얼마 전 다방에서 만났을 때 종횡무진 아무 막힘없이 쏟아내던 그 좋았던 입심이 그대로 자전 소설에 들어나 있었다.

두 번째 만난 것은 완당의 사무실이었다. 그는 유록동 집에서 좀 떨어진 월남동 이층집 방에다 서재를 만들고 집필실 삼아 벌써 몇 년 째 사용하고 있었다. 의사였던 맏아들이 사 놓은 집인데 곧 허물고 병원을 지을 것이라 했다. 그런데 간판은 무슨 문학연구소에다 한시동호회라 붙이고 있는데 아침을 먹으면 반드시 출근해서 펜을 잡고 소설을 쓴다고 기염을 토했다. 장편소설도 구상중인데 곧 쓸 작정이라고 했다.

“난 지금 바쁘네. 내 가슴속에는 지금 이야기들이 부글부글 용광로 쇳물처럼 끓고 있다네. 이놈을 쓰고 있자면 저 놈이 불숙 고개를 드밀며 내 얘기가 더 재밌는데! 하고 달려든다네. 용광로 얘기가 나와서 그러는데 나 기술자였어. 동경에서 용광로 만드는 대창전기란 회사를 운영했는데 그때 큰돈을 벌었지······.”

완당은 소설 얘기를 하다 옆길로 새 일본에서 살며 사업했던 얘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윤민수는 한 마디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소설이란 생각나는 대로 따라 적는 게 아니라 최소한 구성이라는 도구를 가지고 가로 세로 엮어내면서 어디쯤에 파란 하늘을 어디쯤에 황금 들판을 넣을지 계획을 하고 짜야 보기 좋고 멋진 비단이 생산되지 않겠느냐? 하고 넌지시 말했다.

“알아, 알아! 그거 정비석이 소설작법에 나오는 얘기지. 내 정비석이 소설을 무진 읽었지. 아니 방인근, 김래성 소설도 예전에 많이 읽었지. 소설이란 먼저 재미야. 재미없는 거는 소설이 아니란 말이야.”

“재미도 계산된 재미라야 합니다. 완당 선생님.”

“야아! 오늘 윤 작가에게 한 수 배우는 구먼. 사실 누가 그러데, 내 신춘문예 당선작 말야. 주제도 좋고 소재도 좋은데 전개에 좀 신경을 덜 썼더라꼬. 윤 작가도 읽었겠지? 내 작품 말야.”

윤민수는 소설을 쓴 당자 앞에서 뭐라 토를 다는 것이 별로 달갑지 않은 일인 듯해서 자전소설에 대해 말했다.

“선생님 작품가지고 제가 뭐라 할 수 없고요, 그 ‘세월’ 있잖아요? 너무 욕심이 많은 듯했습니다. 할 얘기야 많았겠지만 적당한 주제를 또는 제목을 선택했다면 가급적이면 그것에 합당한 사건만 서술해야하는데 콩 얘기하다가 그와 비슷한 팥 얘길하고 그도 모자라 녹두 얘기까지 하시니······.”

“맞아, 맞아! 그것 쓰면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걸 다 써다보니까 그리 되더라꼬. 내가 소양배양해서 그래. 주제의 선명성이라·····. 역시 윤 작가와 얘기를 하니까 통하는 게 있어. 한시 쓰는 친구들과 얘기를 해보면 별 도움이 안 되거던. 역시 신학문, 아니 현대문학을 내가 많이 배워야 해.”

소양배양하다는 말에 웃음이 나왔다. 완당의 ‘세월’이나 다른 작품에 ‘앰비션’이란 단어외에 그 말이 흔히 등장했는데 윤민수는 한글사전을 찾아보고야 그게 무슨 뜻인지 알고 쓴웃음을 삼켰다. 바로 완당 선생의 70년 발자취가 바로 소양배양했던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외람스럽지만·······. 지금 뒤늦게 소설을 쓴다고 기염을 토하며 집 안방이나 서제가 아니라 따로 나와서 집필실을 열고 야단을 하다니. 그 역시 분수나 철이 없어 날뛰는 젊은이 모습이나 진배없다는 생각을 윤민수는 하고 있었다.

완당 선생은 ‘세월’에 다 쓰지 못한 게 너무 많아 언젠가 증보판을 내든지 아니면 후편 집필에 착수할 것이라 했다. 더구나 장보고를 주인공으로 하는 대하장편소설을 쓰겠다면서 중국을 가야하네, 대마도를 가야하네 하는 말을 듣다보면 참 욕심이 많은 영감이라고 윤민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건강은 동년배들을 능가한다면서 지금도 젊은이가 흉내 내기 힘든 완력을 지녔노라고 또 얘기를 시작했다.

“내가 말이지, 이래도 유도를 했던 몸이야. 내 오늘 탈고를 했는데 제목이 뭔지 아나? ‘옥자’야. 마산문학에 보낼 것인데. 그 소설 속에 덩치가 90키로나 나가는 놈을 유도로 한 방에 넘겨 묵사발을 만드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게 바로 내 경험담이지. 하하하.”

그는 떠돌며 고생했던 얘기를 청산유수로 펼쳤다. 해방, 6.25 그 혼란기를 경험해 보지 못한 윤민수에게는 너무나 충격적인 얘기요 흥미진진한 전개가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틈만 나면 완당의 사무실로 술병을 들고 찾아 갔다. 파이프 담배를 즐기는 걸 보고서 제법 값나가는 독일제 파이프도 선물했다. 완당은 그의 맏아들보다도 더 어린 윤민수를 상대해 ‘보리밭 연가’ 에 대한 숨은 얘기를 술술 펼쳐 놓기도 했고 그걸 다 쓰면 경남문학에 보낼 작정이라고 했다. 완당은 등단 이듬해인 92년에 마산문학에 발표한 ‘옥자’외에 ‘비정한 선착장’(경남문학 겨울), ‘지옥도’(문예정신 겨울)을 발표했고, 93년에는 중편소설 ‘연령’(煉靈 ; 문예사조 1~3월)을 연재하였고 ‘절규’(경남문학 봄), ‘쪽머리’(마산문학 17집), 중편소설 ‘나는 당신의 아내’(한국철강 사보 연재) 등등을 의욕적으로 발표하였다.

예부터 인생 칠십 고래회(古來回)라고 고려장 감이라 했는데 고래회가 아니고 고래희(古來稀), 고희가 맞겠지만 여하간 나이 일흔이면 세상만사가 가을이 아니라 겨울에 접어들어 머리에는 하얗게 서리가 앉고 허리는 마을 앞 고목처럼 희어지고 구멍이 뻥 뚫리고 다리는 자꾸 겹치고 헛놓이고 말은 어눌해지고 귀는 먹고 눈은 침침하고 흐리고 건망증이라지만 치매에 가깝고 혈압도 오르고 당뇨도 생기고 심장이고 위장이고 오장육부가 고장 나고······. 거기다 마음은 조급해지고 원망만 생기고 젊은 놈들의 행동거지가 하나도 마음에 들지 않고······. 그러다 어느 날 밤이나 새벽에 저 세상으로 골로 가는 것이 인생이 아닌가 말이지. 그런데 완당 선생은 그걸 거부했다. 이제 겨우 내 인생, 내 갈 길을 딱 찾아냈는데 소설가 그 좋은 명칭도 얻었는데 정말, 진짜 내 생애 모든 것을 걸고 책 열 권짜리 대하소설쓰기에 도전을 해야 하는 것이라고 다짐을 하는 것이었다. 바로 그것이 선생의 앰비션, 야망, 대망이었다.

윤민수가 보기에는 완당 선생은 마치 신들린 무당 같았다. 아침에 유록동 집에서 월남동 집필실로 내려오기만 하면 원고지를 붙들고 씨름을 시작했다. 자주하던 운동도 잠시 미뤘다. 커피 한 잔 타 마시는 짧은 시간이 휴식시간이었다. 어쩌다 놀러 가면 선생은 윤민수를 응대하면서 하는 이야기가 쓰고 있는 소설에 관한 것이었다.

“선생님, 좀 천천히 하십시오. 세월이 좀 먹습니까? 가슴 아픈 세월이 다 또 세월 속에 묻혀 버렸다고 하셨지만 말입니다.”

“윤 작가, 내 마음속 엠비션-야망은 한정이 없어. 내 지난번 얘기했지? 용광로 같다고. 쇳물은 펄펄 끓을 때 틀에 붓고 두들겨야 철근도 철판도 거대한 쇳덩어리도 되지. 그게 식어버리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철광석인거야. 다시 불을 피우고 녹이려면 시간도 걸리고 또 다른 쇠가 돼 버릴지도 모르잖나? 그러니 용광로 쇳물이 펄펄 끓을 때 게으름을 피우면 어쩌나? 막 써야지. 쇳물이 식기 전에 말야.”

“그렇기는 합니다만, 쓸 얘기가 그렇게 많아서 좋습니다. 저는 거 등단작 말고 그 사이에 겨우 졸작 한 편 탈고했습니다. 소설쓰기가 겁이 나고 자꾸 어려워지네요.”

“어렵다는 생각 때문에 더 글이 안 써지는 거야. 날 봐! 난 일제시대 한글을 못 배우고 일본어를 배운 세대이거든. 그러니 한글사전을 끼고 살면서 집필을 하지만 그 놈의 문법에 맞는 문장을 쓰기란 갈수록 더 어려워지네. ‘세월’을 쓸 때는 문장이고 구성이고 뭐고 별로 신경 쓰지 않고 누에 꽁무니에서 실 뽑듯 줄줄 나오는 대로 기록을 했는데 말야, 이제는 이것저것 따지니까 한 편을 붙들고 퇴고하고 퇴고하고 시간이 걸리는 걸. 고치고 나서 또 들여다보면 또 고쳐야 하는 게 있거든.”

윤민수는 간혹 선생이 내미는 원고 뭉치를 한 아름 안고 돌아오는 적이 많았다. 완당 선생은 그 즈음 ‘청해진의 장보고’에 홀랑 빠져 있었다. 소설책 10권 정도, 원고지 만 여장 분량의 대하소설을 써 내겠다는 포부를 가지게 되었노라 호언했다.

“뭐니 뭐니 해도 소설가라면 장편 몇 편은 써 내야 그 이름에 걸 맞는 게 아닌가? 맨날 원고지 6, 70장 짤막짤막한 단편을 써는 건 내 성미에 안 맞아. 호흡이 긴 장편이 딱 맞어. ‘장보고’ 말고 또 다른 장편을 구상 중인데 한 번에 장편 두 편을 구상하자니 초년병 작가라서 그런지 힘이 부치는구먼.”

“이제 선생님이나 저나 초년병은 면했습니다. 우리 후배도 꽤 많이 생기던데요? 그나저나 저력이 대단하십니다. 한학에도 실력이 대단하시니 장보고를 쓰자면 옛 문헌을 참고해야하는데 대부분 한문이 아닙니까?”

“그렇고 말고! 난 수일 내로 중국으로 가서 문헌도 찾아보고 당나라 때 장보고가 살았던 곳이나 산동성 법화원도 가 봐야지. 또 일본도 가 봐야지. 일본에도 그 분의 유적이 있다고 하니까. 전남 완도는 다섯 차례 답사를 다녀왔구먼.”

“부지런합니다. 벌써 완도에 취재여행을 가셨군요.”

“작가란 글을 쓰기 전 영감을 받아야 하지. 영감이란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성경에도 그런 말이 있지? 구하라 주실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여하튼 대하소설 하나를 꼭 써놓고 말거야.”

완당의 결심대로 머지않아 중국도 가려고 제자를 통해 수속을 밟고 있으며, 93년에는 일본도 취재차 여행을 했다고 알려 왔다. 그는 문을 걸어 잠그다시피 두문불출 하고 대하역사소설 ’청해군도‘(淸海群島) 집필에 몰두했다. 윤민수는 가끔 들러서 ‘청해군도’ 초고를 읽었다. 벌써 진전이 있어 1년이 지나니 목표 1만장이 아니라 5천매 정도로 줄어들긴 하였지만 완당 선생은 그걸 붙들고 씨름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펄펄 끓는 용광로 속에서 또 다른 장편을 끄집어냈다. 넉 달 만에 쓴 장편이었다. 완당 선생은 그 원고는 캐비닛 속에 넣어 두고 보여 주지를 않았다. 제목은 ‘태평양은 울었다’ 이지만 푹 삭혀서 맛이 들도록 익힌 다음 발표할 작정이라고 기염을 토했다.

“그 대신 단편집을 내기로 했어, 그간 발표한 것들 모으면 400페이지짜리 책이 될 듯해. 문제는 출판비인데 아이들보고 달라고 해야지. 맏이가 의사란 얘길 했지? 참, 내가 경제력이 없으니 어쩌나. 대신 장보고 원고는 원고료를 두둑이 받고 출판을 해야 아이들에게 내 체면이 서는데 말야. 하하하.”

완당 선생은 그 특유의 너털웃음으로 윤민수의 관심을 돌리려 했다. 하지만 윤민수는 선생의 마음을 모를 리 없었다. 넉 달 동안 힘들여 장편소설을 써 놓았지만 어디 출판을 해 줄만한 곳을 찾지 못했음이 틀림없었다. 그들에게 신인상을 준 그 문예지가 있었지만 아마 그곳도 자비 출판이 아니면 어려울 것이었다. 완당 선생이 밝혔던 대로 의사 맏아들이 돈을 냈든지 아니면 딸네들이 부담을 했는지 93년 말에 도서출판 경남에서 책이 나온다고 했다.

윤민수가 선생의 첫 창작집 ‘보리밭 연가’를 받아 든 것은 이듬해 1월이었고 집필실에 날마다 드나들었던 한시동우회 회원들과 함께 월남동 사무실에서 술자리를 마련해 출판기념회란 이름을 붙이지 않고서 축하한 것은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서 였다. 한시 동우회 회원들이야 완당의 소설집을 들고서 한다는 소리가 축하하는 말이 아니라 요령부득 납득이 잘 안가는 말들만 했다.

“우리끼리는 완당을 한시의 대 원로로 우대를 하는데 이거 시시껄렁한 소설 써서 뭐 한다꼬?”

“아따! 한 번 읽어보라모. 인생 애환의 진수가 담겨있네.”

“이제사 딴 길로 들어서서 무슨 영화가 있다꼬 좌불안석 펜대를 들고 고민 고민하능가? 우리처럼 맘 편히 먹고 그렁저렁 살끼제.”

“이 제목이 뭐꼬? 늙어 호호 영감이 보리밭에 연가라? 아이고, 아직도 양기가 쪼매 살아있능갑다. 연가가 뭐꼬? 보나마나 젊은 넘들 연애거는 얘기 아이겄나?”

“바로 젊었을 때 내 얘기요. 하하하.”

영감님들은 ‘보리밭 연가’라는 책 제목부터 트집을 잡았고 완당은 예의 너털웃음으로 사태 수습에 나섰다. 윤민수는 그 늙은이들 사이에 끼여 부지런히 술을 따르며 소설이란 게 가장 인생의 참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설명을 했다.

‘보리밭 연가’를 출판했던 인연으로 완당은 출판사 오하룡 시인과 친해졌고 오 시인은 진주의 경남일보 편집국장에게 영웅 장보고를 주인공으로 한 대하소설을 집필하고 있다면서 완당을 소개했다. 원고료가 얼마인지 아니 원고료를 받기로 했는지 어땠는지 모르지만 신문에 ‘청해군도’가 연재되기 시작했다. 대하역사소설이란 어마어마한 타이틀을 달고서.

윤민수는 진주에서 발행되는 경남일보를 잘 볼 수 없었다. 그렇거나 말거나 완당은 지난해 썼던 초고를 꺼내 처음부터 다시 고치기 시작했다. 신문에 연재가 되니 한 주일분씩 끊어서 보내면서 열심히 교정을 했다. 한글사전을 끼고 살았다. 윤민수가 어쩌다 들러 초고를 읽기도 하였지만 열정을 다해 집필한 작품에 감 놔라 배 놔라 하기에는 예의상 감히 그럴 수가 없었다. 다만 글의 흐름이 순탄하고 도도한 장강처럼 흘러가기를 바랄 뿐이었다. 완당은 신이나 있었다. 아니 열정이 철철 넘치고 안광이 형형하게 빛났다. 오른손 중지가 볼펜에 눌려 움푹 들어가 있었다.

“요새 젊은 사람들은 컴퓨터로 작품을 막 바로 쓴다더구먼. 윤 작가도 그러나? 난 그 기계를 배운바 없고 글이란 모름지기 손으로 써야 맛이지. 안 그렇나?”

“맞습니다. 제가 컴퓨터로 글을 쓰니까 괜히 문장만 길어지고 간결함이 사라져 고민입니다. 앞으로 우리 문단에도 육필 원고가 귀해질 거랍니다. 선생님의 육필 원고가 큰 가치를 지닐 겁니다.”

“그, 글쎄, 그러면 좀 좋겠나? 집에서, 아이들이 내 창작활동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게 걱정이야. 내가 월남 가서 5년을 베트콩 속에서 살아남은 것 알지? 그 경험을 토대로 한 대하소설을 구상중이야. 일제시대, 해방, 육이오, 좌우익 갈등, 그거 크게 뭉쳐진 소설도 상중하 3권짜리든지 아니면 5권짜리 장편으로 써야 해. 이병주의 ‘지리산’처럼. 그러자면 자식들 덕을 봐야 하는데······. 요즘 큰 아들이 이 집을 헐고 병원 건물을 짓겠다는데 은행 융자가 잘 풀리지 않아서 고민인가 봐. 내가 십남매를 낳았으면서도 애비 노릇은 제대로 못했어. 자식들 도울 방도도 없으니 무능한 애비지.”

“멋진 대하소설 한 편 발표해 큰 돈 버십시오. 태백산맥, 장길산, 임거정, 토지 같은 대작을 선생님도 써 낼 겁니다.”

“내가 그런 반열에 들어갈 수 있을까? 허허허. 난 그저 김래성의 청춘극장, 정비석의 손자병법이나 이문열의 삼국지 정도면 흡족하겠는데.”

“인연이 없으면 바로 눈앞에 있어도 못 만나고 인연이 있으면 천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만나게 된다지 않습니까? 전 선생님이 그런 인연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70 노년에 등단하지 않았습니까? 명작 한 편 꼭 남길 겁니다.”

“그, 그런가? 윤 작가 얘기 들으니 내 숨통이 확 트이는 군. 난 지금 속이 타. 이걸 갈망(渴望)이라 하는가 모르겠어. 밤에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곤 해. 멋지고 재미난 얘기가 휙 떠오르곤 하거든.”

“전 언제나 선생님의 ‘세월’ 맨 마지막 이야기 ‘오리야 오리야 게를 잡아라’ 그게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바닷가에 몰려다니는 게를 잡아먹으면 사료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고 오리를 키우겠다는 그 기발한 생각 말입니다. 저도 그런 소재를 찾아다닙니다.”

“으하하! 그거 명작이지! 하여간 이 집필실에 들어앉아 습작을 하기 시작했던 게 어언 7년이 됐어. 캐비닛 속에 든 단편 원고들, 장편소설 ‘태평양은 울었다’를 햇빛을 보게 해야지. 또 ‘방랑시인 김삿갓’ 소설도 제법 틀을 잡아 놨고, 내가 한시에는 일가견이 있으니 누구 못지않게 자신이 있는 분야고 말야. 어험!”

완당 선생은 앞으로 쓸 소설 얘기에 파이프 담배를 뻑뻑 빨아 당기며 열을 올렸다. 그러면서 벽에 걸린 좌우명을 큰 소리로 윤민수에게 들려주었다.

“인생은 슬픔 속에 즐거움이 있다. 나에 있어서 문학은 삶이며 정신이요 생명이다.”

선생은 94년에 단편 ‘청심’(경남문학 29호), ‘혼미’(마산문학) 95년에 ‘아내의 동물기’(경남문학 31호), ‘명암 쌍곡선(마산문학)등을 발표하고 96년 초에 ’원단에 찾아온 배신자‘를 써 경남문학에 보냈다. 그게 마지막 작품이었다.

완당 선생은 대하소설 ‘청해군도’ 원고를 끌어안고 숨을 거두었다. 심장마비였다. 의사 아들이 미쳐 손을 쓰지 못했다. 그의 나이 만 73세. 경남문학 봄호에 유고작품으로 그가 남긴 소설이 실렸다. 오하룡 시인이 완당의 그 짧은 문필생활에 대한 추모글을 경남일보에 발표했는데 ‘천성적인 다정다감한 인품과 문학에 대한 열정 때문에 우리는 십년지기 이상의 돈독한 정의를 나눈 사이’라고 했다.

그가 피땀 흘려 쓴 소설 원고들은 지금 어디쯤에 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자전소설과 단편집 2권만 세상에 남겼다. 92년에 경남신문, 문예사조를 통해 등단하여 94년 단편집을 내고 96년 2월 22일 별세하였으니 소설가 완당 김복식 선생의 창작기간은 너무나 아쉽게도 채 5년을 넘지 못했다. 그의 파란만장하였던 인생에 비하면 턱없이 짧은 세월이었다. ****

 

가을 우포(촬영 서정애`한국사진작가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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