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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전과 함께
소설

김현우 단편소설 <촌놈 둘 도방넘 하나 >

by 남전 南田 2010. 3. 9.

 

 

 

일요일 아침, 김홍배 교수는 아침을 먹자마자 나갈 차비를 했다. 그는 친구 허존수 사장 집에 걸어 줄 그림을 고르기 위해 다락방으로 가면서 아내에게 외출 준비를 하라 했다.

“당신, 알지요? 12시에 허 사장 집에 가야하는 거? 또 이사를 했다는 군. 그 사람은 4, 5년 만에 한 번은 꼭 이사를 하는데 무슨 돈이 많은지 이번에는 20억짜리 62평 주상복합 아파트로 갔어요. 그 친구 재산이 3, 4백억이 넘을 거라고 조 행장이 그러더군.”

“아이고, 난 허 사장네 짜는 소리가 듣기 싫어서 따라가고픈 생각이 통 없어요. 누가 뭘 달랬나? 만나면 궁색한 소리는 혼자서 다 해요. 돈 자랑하는 걸 빤히 아는데! 예전 고생했단 얘기는 고정 레퍼토리고요.”

“아아, 내외가 어찌 그리 천생연분인지. 둘 다 짠돌이에 자린고비 절로 가라는 판이니 돈이 그들에게 들어 갔다하면 나올 줄을 모르니 결과적으로 그런 큰 부자가 되었을꺼예요.”

“부자거나 말거나 그들 내외는 무슨 재미로 사는지 몰라요, 그저 돈! 돈! 돈 말고는 아는 것도 없고 취미도 즐거운 것도 없나 봐요. 당신 친구라기에 가서 만나지만 너무 촌티 나지 않아요? 대학 교수, 총장님과 중소기업체 사장하고 어디 어울려요? 요샌 노조도 싫고 주 5일근무제도 싫어서 종업원이 겨우 열 두어명이라나요? 그리고 부인이 지금도 회사 가서 돌아다니면서 잔소리를 하는가 봐요. 나 참!”

“어쩌면 마누라 덕에 회사도 일으키고 큰 재산을 모았지요. 처덕이 있어요.”

처덕이 있다는 소리에 김 교수의 아내는 샐쭉해져서 주방 쪽으로 가버렸다. 그녀는 평생 가정주부로만 살았지 취직을 하거나 증권이나 부동산에 손 댄 적도 없고 장사를 해 돈 한 푼 벌어온 적이 없었다.

김 교수는 아내가 샐쭉하는 바람에 ‘아이고, 또 집사람이 듣기 싫어하는 소릴했구먼.’ 하고 얼른 말문을 닫고 그림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김 교수는 법률 전공이었지만 취미는 고서화 수집이었다. 그는 생활비를 쪼개 고서화나 골동품을 하나씩 사 모으는 재미로 70 평생을 살아왔다. 오늘 허 사장 아파트 거실에 걸어 줄 동양화는 갈대밭에 날거나 앉은 기러기 그림이었다. 제법 운치 있는 그림이었다. 그는 동양화 액자를 고급 포장지로 꼼꼼하게 쌌다. 십여 년 전에 인사동 자주 다니던 화방에서 산 그림이었다. 그가 두고 많이 감상했던 그림이니 친구에게 주어도 아깝지 않았다.

━ 이 친구가 이 그림이 얼마나 좋은지 어떤지 가치를 알기나 할까? 그저 세종대왕 그림이나 최고로 알지!

김 교수가 그런 생각을 가지는 것은 허 사장이 평소 그림이고 골동품이고 그리 소중히 여기지 않고 한쪽으로 밀쳐버리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친구는 오직 세종대왕이 그려진 그 종이가 최고의 미술작품이라고 믿는 사람인 걸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김 교수가 허 사장이 이사했다는 주상 복합아파트 앞에 도착하니 벌써 조언기 행장 내외가 도착해 있었다.

“허어! 무슨 놈의 아파트 이름이 이렇게 길어? 블루스카이힐스테이트! 도대체 무슨 뜻이야?”

조 행장의 말에 김 교수는,

“야, 조 행장, 한때 유행하던 말 못 들었어? 아파트 이름이 괴상하고 외국어로 된 거 시어머니가 찾아오지 못하게 하려고 지은거래요. 그래야 요새 며느리들이 좋아한다는구먼. 아무튼 우리나라 사람들 외국어 실력은 알아줘야 할까봐.”

하고 껄껄 웃었고 조 행장은 씁쓸한 표정으로 김 교수 손에 들린 액자를 보며,

“그건 뭐야? 또 고물딱지 그림인가? 언제 그 값나가는 조선 백자를 허존수에게 선물했더니 뭐라 그러던가? 이거 뭐 낡은 술병, 오데 쓸 거라고 가져왔어? 그랬지?”

하고 타박했다.

“허어! 허 사장이 그래도 귀한 거는 안다네. 그때 내가 그랬지? 이 조선 백자가 수백 년은 된 것이고 시중 감정가로 천만 원 쯤 나갈 귀한 유물이라고 풍을 좀 쳤더니 금방 보물단지로 모시지 않던가?”

“이번에는 또 두고 보세.”

둘은 서로 마주 보며 의미 있게 웃었다. 과연 이사를 한 새 아파트는 한 마디로 넓었다. 거실이 얼마나 넓었든지 이쪽에서 저쪽으로 한참 목을 돌려야 다 보일 지경이었다. 30여 평 아파트에 사는 김 교수로는 평생 소유할 수 없는 곳일 듯했다. 골프를 좋아하는 조 행장이 큰소리로 한 마디 했다.

“허 사장 돈 많이 벌었나보네. 거실이 아니라 운동장이네. 골프연습장을 차려도 손색이 없겠는 걸.”

키가 작고 몸집 또한 작은 허존수 사장은 그들이 뭐라 하건 말건 들은 척도 않고,

“살다보면 이런 거야. 나에게 소중한 것은 바로 나 자신이야. 이젠 작은 집에 살기가 싫어졌어. 그래서 큰집응 한 번 사 봤지. 부자들을 욕하고 비난하는 가난뱅이 치고 부자가 되는 사람이 있던가 말이야. 부정적인 사고방식이 문제지! 왜? 그들도 돈이 싫지는 않거든. 그런데 왜 부자가 안 돼? 다아 게을러서 그런 거야.”

크고 묵직해 보이는 가죽 소파도 새 것이었다. 아끼고 절약하고 돈 안 쓰고 수십 년 쓰던 낡은 가구를 이사 할 때면 버리지 않고 그대로 끌고 다니던 허 사장이 이번에는 가구들을 몽땅 새로 들여 놓은 모양이었다. 집 구경을 한다고 안방이고 건넌방이고 주방을 한 바퀴 돌아봤는데 낡은 것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 그 전에 선물했던 조선 백자도 새 문갑위에는 보이지 않았다. 김 교수는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 그게 고물이라고 내버렸군. 아이고! 무식한 놈!

친구 셋은 거실 응접의자에 앉고 부인네들은 주방으로 가서 자리 잡았다. 김 교수는 현관에 놓아두었던 액자를 가져와 포장지를 뜯어 허 사장 앞에 내 보였다.

“존수 네가 새 집에 이사를 했다는데 빈손으로 오기가 뭐 해서 그림 한 점 가져 왔어. 마음에 들란가 모르겠네?”

아니나 다를까? 허 사장의 반응이 시큰둥했다. 은행장을 지낸 조언기 행장이 그림을 보며 아는 척 너스레를 떨었다.

“이거 민속화가 아니야? 누가 그린거지? 김 박사가 수집 소장했던 거라면 모두 문화재급인데····· 감정가격이 아무리 적게 나가도 수백만 원짜리이겠지?”

“허어! 조 행장! 자넨 돈만 주물렀던 은행장 아니할까봐 그러나? 그림을 그냥 그림으로 감상하면 되지, 웬 돈으로 따져? 안 그런가? 허 사장.”

그러나 허 사장은 별로 그림에 관심이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려버리며,

“대학 총장까지 지낸 김홍배가 가져 온 것, 가치가 있는 거지 뭐. 내가 어디 그림 볼 줄이나 아나? 간혹 텔레비전을 보면 고물들 내놓고 몇 백만 원이니 어쩌느니 감정을 하더라만······ 무식한 난 기계 만질 줄이나 알지, 도자기고 그림이고······ 도통 모른다고.”

하고 김 교수의 성의를 싹 무시하는 소리를 그냥 내질러 버렸다. 초등학교 동창, 앞뒷집 한동네에서 젖먹이 때부터 싸우며 놀며 같이 자란 허물없는 사이이니 떠들고 싶은 대로 조금도 주저하거나 거리낌이 없이 내뱄었다. 버릇대로. 김 교수는 으레 그러려니 하면서 그림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는다. 물론 허 사장이 그의 말을 알아듣는 것도 있고 이해하지 못할 말도 있으리란 걸 알면서도 그는 말을 시작한다.

“이 그림은 노안도(蘆雁圖)라 하는데······ 노안이란 갈대와 기러기야. 이봐! 갈대숲에 기러기 두 마리가 앉아서 뭔가 먹는 듯하고, 기러기 댓 마리는 갈대숲으로 날아들고 있지? 뭐 같어? 늦가을 우리 고향 들붓(월평·月坪) 풍경 같지 않아? 들붓 강변이나 들판에 정말 기러기가 많이 날아 왔지. 고니, 청둥오리 갈가마귀 같은 철새들도 무한정 날아와 강가와 논밭에 앉아 뭔가 찾아 먹는지 와글거렸고······.”

“아따! 그 놈들 보리 뜯어 먹으려고 왔제. 나와 아부지는 기우나 오리, 갈가마구떼 쫓느라 겨울이면 들판을 정신없이 뛰어 댕깄다 아이가!”

허 사장의 대꾸에 고개를 끄떡거려 주고는 김 교수는 그림 설명을 계속했다.

“왜 이게 의미심장한 그림이냐 하면 갈대 노(蘆)자에 기러기 안(雁), 노안(蘆雁)이 늙을 노(老)자에 평안할 안(安), 노안(老安)과 통하거든. 늘그막에 몸도 마음도 평안하고 병들지 않고 걱정 없고 괴로운 거 없는 것이 바로 노안이 아니던가? 이 그림의 뜻이 바로 그거야. 나이가 들고 늙어서도 편안하라는 기원이 담겨 있어. 예전 양반네 노인이 늙으면 으레 이런 그림 한 장 쯤 사랑방 벽에 족자로 해서 걸어놓고 감상을 했지.”

“그러니까 늙은 날 생각해서 가져온 거로군. 벼랑빡에 붙여 놓고 오래오래 살도록 해라 이 말이제?”

“암! 똑 바로 알아들었구만. 허 사장이 기계 기름칠만 하는 것 아는 줄 알았더니 이제야 유식해 졌네? 김 박사가 이런 심오한 뜻이 담긴 민속화를 이 넓은 새 집에 걸어두라고 가져 왔으니 얼마나 동창생이 좋은 것이고? 그림 값을 따지자면 수천만 원은 나갈 거야. 안 그래? 김 교수!”

“허어! 그림 값은 왜 물어? 그냥 성의로 생각해야지.”

김 교수 말에 조 행장이 쐐기 박듯 말했다.

“김 박사! 허 사장 저 사람이 어디 예술품 감상 할 줄이나 아나? 아주 고가품, 수천만 원짜리 그림이라고 해야 소중한 줄 알지. 돈 백만 원짜리라면 아예 새 집 벽 버린다고 걸지도 않고 사나흘 방치했다가 쓰레기통에 처박아 버릴 사람이란 말야.”

그 말에 허 사장이 버럭 화를 냈다.

“야야! 조언기 이 도방넘! 니 말 다했나? 너 말이다, 예전부터 도방에 산다꼬 말끝마다 우리 보고 촌놈 촌놈하고 없이 여깄제! 그렇잖아도 내가 한번 따져 볼란다. 내가 그리 무식한 촌놈이가? 김홍배 저 친구는 집안 형편이 넉넉해서 중학교까지는 내하고 10리길을 같이 통학하면서 다녔지만 후에 부산에 있는 일류 고등학교 나오고 서울대 법과를 나오고 고등고시 낙방만 하지 않았어도 판검사를 지내며 떵떵거릴 친군데 말이야.”
그는 우선 김 교수의 약점을 꼭 꼬집어 놓고는,

“미국 유학에 석·박사 되고 대학교수 안 되었나? 지방 대학이지만 총장도 지냈고! 그에 비해 나는 그래 근근이 공고 나왔다. 공고 나왔으니 당연히 공장에 취직했지. 우리 집이 가난했으니 그것이 최선이었단 말이다!” 하는 말에 김 교수가 부드럽게 말했다.

“허어! 허 사장, 말이 왜 삐딱해? 우리 셋이 부랄 친구가 아니던가? 무슨 허물이 많이 있다고 예전 얘기를 꺼내나?”

“아니야! 홍배. 저, 저 도방넘 저게 우리 어릴 적부터 얼마나 유세를 떨었노? 저거는 부자라꼬 방학 때만 되면 서울에서 내려와 가꼬는······. 말씨부터 흉을 잡았지. 보리문딩이 경상도 툭배기 사투리 쓴다꼬! 그 뿐이가? 알사탕인가, 쪼꼬랫또 인가, 두어 개 가져 와서 지 혼자 처 묵으면서 우리보고는 ‘야, 촌놈들아! 이거 뭔지 아나? 미제다, 미제!’ 하고 지랄방정을 했어. 심심하면 촌놈 둘이라고 우릴 놀렸지.”

“허어! 허 사장! 그만 안둘 끼가?”

김 교수가 정색을 하며 화를 내자 조 사장은 슬그머니 말문을 닫는다.

 


그들 셋은 낙동강변 외지고 오지였던 작은 마을에 살았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김 교수와 허 사장은 들붓에서 태어나 자랐고 조 행장은 N면의 대지주의 아들로 방학 때면 들붓에 있는 집안 소유의 월평정에 내려와 머물렀던 도시 태생 아이였다. 도시 아이답게 허약해서 방학 때면 시골로 내려 보내 건강을 돌보게 했고 허존수와 김홍배 두 아이를 함께 딸려서 뒷바라지하도록 했던 것이었다. 낙동강이 마을 북쪽을 흐르는데 강을 뒤로한 산 언덕배기와 골짜기에 의지해 20여호 집이 있는 마을이 바로 들붓이었다. 마을 남쪽에 들이 있었지만 높은 앞산이 가로 막아 들판이라기에 너무나 좁았고, 강을 따라 산모롱이를 돌아가면 큰 들이 있었다. 그 큰 들의 대부분이 조언기 집안의 소유였고 들붓 사람들 대부분 그걸 소작했던 것이었다. 물론 해방이 되고, 토지가 소작인들에게 소유권이 넘어가는 분배농지 분란이 일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조언기 집안은 부자였고 들붓에서는 큰소리 떵떵치는 세도를 부렸다. 해방이 되었을 때, 망하기는커녕 조언기 아버지는 일본인이 버리고 간 공장들을 인수하고 사업을 크게 해 큰돈을 벌었기 때문에 시골의 농지를 잃었다지만 별 영향을 받지 않았던 것이었다.

시골은 위험한 것이 많았다. 여름이면 아이들이 강에서 미역을 감으며 지냈는데 도시 아이는 물에 빠져 죽기 십상이라 조언기 뒤에는 허존수와 김홍배 둘이서 지켜봐야 했다. 행여 깊은 곳으로 헤엄쳐 들어가면 소리치며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야 했다. 들판을 쏘다니면 또 위험한 것들이 많았다. 뱀도 있고 지네도 있고 모기도 있었다. 앞산은 높고 험하고 가파른데 가딱하면 넘어지고 자빠지고 무릎에 상처도 생기고 발목을 삘 수도 있었다. 그런데 조언기는 기를 쓰고 쏘다녔다. 그는 시골이 좋았다. 무작정 두 아이를 거느리고 강에 미역을 감으러 가고 미꾸라지를 잡는다고 도랑을 치고, 운동을 한다며 가파른 산으로 가면 소나무에 오르기를 좋아했다. 그들이 중학생이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셋은 언제나 뭉쳐서 쏘다녔다. 그러면 마을 사람들이 그랬다.

“촌놈 둘이 도방넘 하나 한테 매여서 끌려 댕기네. 쯧쯧.”

농사일을 거들어야 될 판인데도 조언기가 불러내면 목맨 송아지처럼 꼼짝없이 둘은 따라 나서야 했다. 조금 머리가 커지면서 조언기는 둘을 데리고 이십 리나 떨어진 읍내로 놀러 다녔다. 호왈(乎曰) 영어로 보디가드라 했다. 허존수는 키가 작고 몸집 작았지만 몸이 단단하고 악바리여서 아이들과 싸움을 하면 곧잘 이기곤 했다. 힘이나 주먹보다는 담력과 오기로 버티니 읍내 아이들조차 허존수를 만만히 대하지 않았다. 김홍배는 키가 크고 허여멀쑥하게 생겼지만 중학교에서 1, 2등을 하면서 성격이 무던하여 그런대로 잘 대처했으므로 조언기로서는 든든한 셈이었다.

서울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녔던 조언기에 비해 어릴 때부터 N읍의 천재라 소리를 들었던 김홍배는 고등학교를 부산에서 다녔다. 그의 누나가 부산으로 시집을 갔기 때문이어서 하숙비도 안 들고 큰 회사 사원이었던 자형이 잘 돌봐 주었다. 고교를 졸업하자마자 서울대에 들어 갈 수 있었다. 그는 판·검사가 꿈이었다. 고등고시를 두 세 번 봤지만 운이 트이지 않았든지 번번이 낙방이었다. 그래서 판·검사 꿈을 접고 미국유학을 떠났던 것이었다. 조언기는 부잣집 아들이었으니 그의 앞길은 순탄하기만 했다. 서울대는 아니지만 서울의 일류 대학을 나와 그 당시 선망의 대상이었던 은행에 쉽게 들어가 별로 힘들이지 않고 잘 먹고 잘 살았다.

셋 중 고생을 죽어라 한 사람은 허존수였다. 중학교만 마치고 나면 농사나 지어야 될 팔자였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고등학교 진학은 아예 꿈도 꾸지 말라고 당부하고 또 당부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1년을 들붓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그러다 마산으로 나가기만 하면 공장에 취직을 할 수 있다는 얘기에 아버지 어머니를 설득해서 출분(出奔)을 할 수 있었다. 또 1년을 공장 직공으로 나다니면서 야간 공업고등학교에 다닐 수 있다는 걸 알았고 그래서 공고에 입학할 수 있었다. 낮에는 공장에서 밤에는 학교에서, 참 열심히 뛰어 다녔다. 야간 공고를 졸업하자 그는 전자제품을 주로 생산하는 재벌회사인 K상사에 입사할 수 있었다. 그때부터 그에게는 오직 돈만 눈에 보였다.

- 어짜든지 돈을 벌자. 돈이 내 인생의 전부다. 돈이 없으면 천덕꾸러기고 돈이 없으면 인생 낙오자요 실패자다. 돈이 내 인생을 말해준다. 돈이 나를 큰소리치게 해 준다.

그는 다른 공장에서 일한 경력이 있어 K전자에 입사하자마자 두각을 들어냈다. 전자 기술 습득을 위해서 참고서적들을 뒤지고 새로운 아이디어나 연구를 해 상사에게 내 놓았다. 그는 높은 사람에게는 제 실력을 알리는데 혈안이 되었고 인정을 받는 일이라면 화약을 지고 불에 뛰어들 기세였다. 그는 입사 2년쯤 냉장고 생산 라인의 한 공장을 책임지리만큼 실력자가 되었다. 그는 그것에 만족할 수 없었다. 입사 5년차에 그는 사장을 찾아갔다.

“하청업체 하나를 하고 싶습니다. 냉장고 부품이나 선풍기 부품 몇 가지를 제가 납품할 수 있도록 선처해 주십시오.”

참 얼토토않은 청이었다. 그런데 사장이 선뜻 허락했다. 평소 부지런하고 연구하는 열성을 눈여겨보았던 모양이었다. 그가 요청한 냉장고나 선풍기 부품이 아니라 진공청소기 부품 몇 가지 만들어 납품하는 하청공장을 얼마 지나지 않아 차릴 수 있었다. 직공 셋과 함께. 그 당시 처음 개발되어 시중에 팔리던 진공청소기 부품이라 만들기에 바빴다. 그때 막 결혼한 아내도 팔을 걷고 도왔다. 자잘한 부품들을 정리하고 포장하는 일을 아내가 곧잘 해 냈다. 아내는 결혼 전에는 방직공장에 다녔는데 직공 셋과 함께 부품을 만드느라 매일 쩔쩔 매는 남편을 도우기 위해 그곳을 그만두었던 것이다. 사실 직공 열 명 정도를 고용해야할 정도로 일감이 많았으나 허존수는 셋으로 버티어 내고 있었던 때라 아내의 도움이 큰 힘이 되었다.

그런데 처남이 사무원 일을 하겠다고 나섰다. 처남이란 작자는 큰소리나 떵떵치는 허풍장이로 무엇이든 많이 아는 척했다. 공장일은 뒷전이고 시중에 떠돌아다니며 이것저것 치근덕거리다가 구전 떼먹기를 좋아하는 다분히 거간이나 사기꾼 기질이 농후한 사내였다. 물론 자형에게 와서 용돈을 얻어가려고 일을 거들어 주는 척도 하고 관공서나 세무서 은행 등에 볼일이 있으면 자청해서 나서니 자연히 처남이 사무원 구실을 해 냈다. 이게 또 큰 몫의 도움이 되었다. 그러던 처남이 어느 날인가 국회의원 사무실을 드나들더니 여당 당원에 감투를 하나 얻어 쓰고 정치에 뜻을 둔다고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하여간 말발이 넓은 처남은 여러 정보를 물어오기도 하고 자형의 작은 회사를 크게 키우는데 일조를 하였다. 물론 알 게 모르게 제 용돈을 우려 나가는데 허존수로서는 월급을 더 주는 셈치고 모르는 척 넘어가곤 했다.

어쟀거나 허존수에게는 단 한 가지 원칙은 어김이 없었다. 제 호주머니에 들어온 돈은 절대 나가는 일이 없게 움켜쥐었다. 좋게 표현하자면 재투자하는데 그는 철저하게 부동산에다 돈을 파묻었다. 그걸 도맡아 한 사람이 바람잽이 처남이었다.

“자형! 소답동에 헐한 땅이 있는데 그거 사소.”

“자형! 명곡동에 집을 지어 팔면 재미있다는데 그거 한 번 하이소.”

“자형! 창원공단 저쪽에 공장부지가 났소. 급하게 처분해야 한다니 당장 그거 사이소.”

처남은 중개업소를 수시로 떠돌아다니며 열심히 정보를 물어오고 적당하다 싶으면 허존수는 처남 말을 들어 매물을 사곤 했다. 그래서 팔용동에 널따란 공장 부지를 확보해 직공 50여명을 고용하는 업체로 발전할 수 있었다. 그러구러 20여년이 흘렀다.

 


허존수, 김홍배, 조언기 셋의 관계는 결코 우정이랄 수도 주종관계이라고도 할 수 없겠지만 세월이 많이 흘러가면서 계속 유지되었고 셋 다 나이가 많아지자 친구가 되었다. 김홍배나 조언기가 마산이나 고향을 찾는 일이 있을 때면 허존수를 찾아왔고 비록 재벌 전자회사의 하청업체에 불과하지만 사원 100여명을 거느린 회사 사장으로 장족의 발전을 한 그를 무시하지 않았다. 그러다 환갑 진갑을 지난 김 교수가 근처 지방대학교의 총장으로 서울에서 내려오고, 연이어 은행장을 지내던 조 행장이 은행장 직을 물러나고서 창원으로 내려와 정착하고 보니 월평초등학교 동창생 촌놈 두 명에 도방넘 하나가 자연히 어울리게 된 것이었다.

허존수는 에어컨이나 냉장고 모터 부품으로 들어가는 동 파이프로 제품을 만들어 납품하는 일을 오랫동안 해 오면서 치부하게 되었다. 물론 공장 규모도 점점 늘어나 납품해야 될 물량을 감당하기에 벅차게 되면서 공장을 확장해야 했다. 그래서 제2공장을 짓고 종업원 수도 늘였다. 그런데 노조가 생겨날 판이었다. 채용할 때 철저하게 따졌건만 노동조합을 만들려는 사람이 숨어들어 온 것이었다. 허 사장은 노조가 무조건 싫었다. 사사건건 회사 일에 개입하고 자기들이 주인도 아니면서 감 놔라 배 놔라하는 게 영 못마땅해서 그는 노조 설립을 여러 예방책을 써 철저하게 막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움직임이 여러 번 있었다. 그럴 때마다 그 정보를 처남이 먼저 알아채고는,

“자형! 야단났소. 박덕성이란 놈이 노조를 만들겠다고 도장을 받으러 댕긴다는데 당장 모가지를 비틉시다.”

하고 키질을 해 댔다. 그들은 궁리 끝에 박덕성을 회유하기로 했다. 박덕성에게 회사내 하도급을 하도록 주선해 주었다. 그리곤 노조 설립을 저지했는데 1년이 조금 지나서는 박덕성에게 준 하도급 일을 끊어버려 스스로 두 손을 들게 만들고 말았다.

“어허! 그거 인정머리 없는 거 아니야? 회사엔 당연히 노조가 있어야 하는 거야. 노조가 있어야 노동자들의 이익도 제대로 챙겨 줄 수 있는데”

노조를 만들려다 허존수의 못된 책략에 걸려들어 자멸하고만 박덕성의 일을 못내 아쉬워한 사람은 김홍배였다. 그래서 회사가 잘 되려면 노조가 설립되도록 배려해 줘야 한다고 충고를 했던 것이다. 그런데 허 사장은 성을 발칵 냈다.

“뭐어? 니가 뭘 알아서 노조가 어떻고 하노? 노조란 거 말이야! 빨갱이처럼 무서운 거야. 절대 내 회사에서는 용납을 못해!”

“허어! 넌 시대에 뒤떨어진 사고방식으로 어떻게 큰 회사 경영인이 될래? 너도 중소기업인이 아니라 조금만 노력하면 중견 기업의 오너가 될 건데 사원들에 대한 복지도 염두에 두어야지! 노동조합에 대한 편견이 그렇게 심해서야 되나?”

“에레기! 난 널 친구라 믿고 있었는데 대학교수라꼬 봐 줏더니만 영 파이네!”

김 교수가 한마디 했다가 그만 큰코다치고 말았다. 아마 1년여간 전화도 안부도 주고받지 않고 냉담하게 지냈다. 겨우 조언기 행장이 회사운영자금을 빌리러 온 허 사장을 구슬려서 위기를 넘겼다.

“너희들은 아직도 들붓에 살았던 초등학생 시절처럼 만났다 하면 쌈박질하니 어린애들 버릇을 아직도 못 벗어났어. 그것이 무슨 싸울 거리라고 내왕을 않고 1년이나 버텨? 홍배는 대학교수이니까 그런 말을 할 수 있지. 그런 사람이 바른 말을 해야 이 사회가 바로 가는 거야. 서로 화해해라?”

“내가 언제 눈에 불을 키고 싸웠나? 쪼금 말다툼을 했는데 홍배 그 아가 속이 좁아 삐끼가지고 연락을 끊었제.”

조 행장의 중재로 김 교수와 예전처럼 돌아갔지만 얼마 후에는 허 사장이 조 행장과 비틀어져서 대판 싸운 일도 있었다. 그때 허 사장은 국내에서 회사 운영이 점점 어려워짐을 알고 중국으로 생산라인을 옮기려 했다. 물론 처남의 귀띔으로 시작된 일이었다. 냉장고와 진공청소기 등의 납품물량을 생산하자면 공장 규모도 늘려야 하고 따라서 종업원도 많이 채용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포클레인이나 중장비 등에 사용되는 유압펌프장치 부속품 생산을 새로 시작하게 됨에 따라 시설 증설이 불가피해 졌다. 그런데 인건비도 문제려니와 회사가 커지면 노조가 생길 것이 크게 염려되었다.

“몽땅 중국으로 옮깁시다. 자형. 중국으로 가면 인건비고 노조고 골치 아픈 일이란 싹 사라지는 겁니다.”

“안 그래도 중국으로 공장 옮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돼 중국의 공장 후보지도 가서 둘러보고 그쪽 조건들을 따져보니 국내보다 월등 유리했다. 그래서 중국으로 생산시설을 옮기기로 하였는데 자금 조달이 힘들었다. 평소 조 행장과 금융 거래를 하고 있었던지라 허 사장은 조 행장에게 달려가 자금 융통을 부탁하였다. 그런데 조 행장이 은행장직을 후배에게 물려주고 퇴직을 한 상태였던 것이다. 조 행장이 친구들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그의 퇴직은 단순한 것이 아니라 경영 부실에 책임을 지고 쫓겨난 것이었다. 그러니 허 사장의 부탁을 들어 줄 처지가 아니었다.

“이제 나에게 힘이 없어. 허 사장에게 도움을 줄 형편이 아니야. 다른 데 알아봐.”

하고 자세한 설명 없이 좋은 말로 거절했는데 그게 허 사장을 격분하게 만들었다. 그는 김 교수에게 전화를 걸어 조 행장 귀에 들어가라는 듯 욕을 퍼부어 댔다.

“씨발 넘! 내가 뭐 거지처럼 동냥 달랬나? 비럭질을 하자고 했나? 언제는 예금 좀 유치해 달라고 사정사정하더니 인자 내 부탁을 일언지하에 거절해? 아무리 퇴직을 했다고 하지만 전관예우란 거 있는 걸 안단 말이야. 담보물이 좀 부족하니까 저 도방넘에게 부탁했지. 아니면 내가 뭐 아쉬워서 그 자슥을 찾아 갔겠나? 인자 언기와 말을 하면 내가 인종지말짜다!”

김 교수는 하도 기가 막혀 한동안 ‘응, 응······.’ 하고 코대답을 하다가,

“허 사장! 니가 어린애가 뭐꼬? 지금 조언기가 코너에 몰려서 퇴직한 걸 왜 몰라? 은행장직에서 은퇴한 거 겉으로야 후배에게 양보한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쫓겨난 거란 말이야.”

하고 조 행장의 난처한 사정을 말해 주며 아해하라고 설득했다. 그러나 허 사장은 코웃음쳤다.

“쫓겨 나? 자알 됐네. 유세를 떨더니만 잘 됐네. 화무십일홍이라꼬 지깐 놈이 누대로 은행장 해 묵을 끼라꼬 여깄던가?”

 “허어! 그 친구가 하도 기가 막히고 분하고 실망감이 커서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이 좋다고 아니, 친구 좋다고 우리가 있는 창원으로 낙향한 거란 말이야. 좀 흥분을 가라앉히고 친구 형편도 생각해 주더라고. 명심보감에 이런 말이 있네. 군자지교(君子之交)는 담약수(淡若水)하고 소인지교(小人之交)는 감약례(甘若醴)니라. ‘군자의 사귀는 것은 맑기가 물과 같고 소인의 사귀는 것은 달기가 단술과 같으니라.’란 뜻이여. 쓰면 뱉고 달면 삼키는 게 우리 우정이 아니지.”

“우정이고 목닥이고! 지 놈이 달면 삼키고 쓰면 뱉았지 난 아니야! 5, 60년 우정을 걷어차 버린 그 놈이 소인이지, 내가 왜 소인이야? 아직 그 놈은 능력이 있다고. 전화 한 번이면 해결될 걸 봐 주지 않는 거라고.”

허 사장은 끝내 분해하며 조 행장의 냉정함을 성토했다. 후에 김 교수가 들으니 허 사장은 다른 은행에서 자금을 융통해서 거액의 현금만을 싸 들고 중국으로 갔다고 했다. 김 교수가 허 사장을 비난할 수밖에 없었던 사실은 그 후에 일어났다. 공장을 중국으로 옮기면서 아무런 대책도 세워주지 않고 종업원을 무더기로 해고해 버린 것이었다. 200여 명의 사원들 중 기술자 몇 명은 중국으로 가게하고 새로 시작할 국내 유압펌프 생산라인에 겨우 20여명의 사원들만 남겨두고 그 외에는  인정사정 없이 해고한 것이었다. 냉장고 부품을 만들던 생산시설도 중국으로 일부 뜯어 옮겨 갔지만 대부분 그대로 방치해 버렸다.

너무 제 개인이익만 추구하고 사원들의 복지나 처지는 무시해 버리는 몰인정한 행위에 그는 못마땅해서 일간 지방지에 ‘기업인의 의무와 역할’이란 제목으로 허 사장의 일을 예로 들며 기업인들의 비정하고 염치없음을 비난하는 글을 썼다. 신문이라면 제목만 슬쩍슬쩍 보고 넘어가는 허 사장인지라 김 교수의 칼럼이 눈에 띌 리가 만무했다. 그러니 허 사장이 관심을 갖고 살피지 않았으면 그냥 넘어갈 일이었는데 불행하게도 전무이었던 허 사장 처남 눈에 그게 뜨인 것이었다.

“자형! 자형! 이것 보세요. 이, 이 양반이 자형 욕을 공공연하게 신문에 썼네요.”

김 교수의 칼럼이 실린 신문지를 허 사장의 코앞에 들이밀며 흥분해서 처남은 길길이 날뛰었다. 그제야 허 사장도 글을 읽고서 역시 크게 성을 냈다.

“허! 김 총장이 죽마고우라 내가 기댈 마지막 보루라 생각했는데! 그 놈도 망할 자슥이네!”

“에! 그 양반도 노망이 드는 기라요. 종업원에게 퇴직금을 쥐꼬리만큼 주고 모두 해고한 것은 부당하고 비정한 폭력이라 그랬네요. 기업 경영이라곤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사람이 기업인의 고충을 어떻게 알아요? 이런 사람이 자형 친구라니! 소가 들어도 개가 들어도 웃겠네요.”

처남의 들쑤시는 소리에 바짝 성이 난 허 사장은 그 자리에서 분기탱천하여 김 교수에게 전화를 걸어 상대방이 변명할 여지도 주지 않고 욕설을 퍼부어댔다. 기가 막힌 김 교수는 해명이고 뭐고 못하고 듣고만 있어야 했다. 나중에 조 행장이 중간에서 허 사장을 나무랐다.

“넌 어린애야 뭐야? 그 칼럼 자세히 읽어보라고. 어디 허 사장 니 얘기 한마디나 있는가? 요즘 보따리 싸들고 중국으로 어디로 달아나는 기업인들에게 따끔하게 충고 한 마디 했을 뿐인데! 우리가 어제 그제 만난 친구야? 김 박사가 어찌 널 표적으로 해서 글을 썼겠나?”

“잔소리 군소리 말아라! 니나 그 놈이나 날 공부 많이 못했다고 무시하는 거 다 알아! 그래서 나는 씨가 빠지게 돈을 벌었제. 무시당하는 거 싫어서!”

“허어! 누가 누구를 무시해. 우리 모두 중우 벗고 큰 불알친구 아니던가?”

“그라니까 내 말이 그거야. 내가 백 번 잘못해도 내 약점이나 허물을 신문에다 까발리면 안 되지! 뭐라 카더라? 그 자석이 그라데? 명심보감에 불결자화(不結子花)는 휴요종(休要種)하고 무의지붕(無義之朋)은 불가교(不可交)니라 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꽃은 꼭 심지 말 것이오, 의 없는 친구는 사귀지 말찌니라.’ 그런 뜻이라매? 씰개도 의도 없는 넘 하고 다시는 친구하는가 봐라!”

“어허! 허 사장 얘기가 아니라니까!”

시간이 조금 흐르니 그럭저럭 위험한 사태는 봉합되었지만 그 앙금은 한참동안 남아 있었다. 그러다 조 행장의 제안으로 셋이 부부동반으로 허 사장의 중국공장도 둘러보고 북경 관광도 하는 중국 여행을 하면서 풀어졌다.

허 사장의 중국 공장은 생각보다 규모가 엄청 컸다. 종업원의 수도 500여명으로 냉장고와 유압펌프 관련 부품을 생산해서 국내로 반입하는 공장이었다. 그가 창원 회사에 머물 때는 일요일 아침이면 화상 전화로 저쪽의 일을 깐깐하게 따지고 점검했다. 창원의 공장은 정식 종업원은 겨우 10여명에 불과했다. 덤프트럭이나 굴삭기 등에 쓰이는 유압펌프를 만들어 대기업에 납품하면서 일거리가 많이 몰리면 인력회사에 연락해서 일용직을 대량 불렀다. 그러다가 나이 일흔이 가까워지자 김 교수나 조 행장의 충고를 받아들여 기업 일선에서 물러나기로 했다. 아들에게 사장 자리를 내 주었지만 일주일에 한 두 번은 공장에 나가 빙빙 돌아다니다 점심시간이면 사원식당에 느지막이 가서 잔반으로 남은 밥이나 불어터진 국수를 먹었다. 여전히 전무 감투를 쓰고 있는 처남은 얼마 전 시의원에 당선되어 거들먹거리며 다녔고, 회사 돈을 축내지만 모르는 척 하고 있었다. 처남이 사기성이 농후하더라도 그 자신의 치부(致富)에 큰 역할을 했으니 당연하다 싶어 아파트도 사 주었고 부동산 몇 곳도 처남 명의로 넘겨 놓고 있었다.

 


허존수 사장의 집들이는 세 부부가 아파트 내부를 한 바퀴 둘러보고 과일 한 접시 먹고 그 곳 상가단지 4층에 있는 중국 요릿집으로 옮겨 식사를 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이제 우리 셋이서 슬슬 놀러나 댕기자!”

조언기 행장의 제안에 허 사장이,

“그래자. 6인승인가 9인승인가 SUV인가······· 이왕지사 기사가 딸린 그런 거 빌리고······. 우리 중 누가 운전하면 통 술도 못 마시고 놀지도 못해.”

하고 맞장구 쳤다.

김 교수는 그들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며 아내에게 그랬다.

“들붓 조무래기들이 이제야 시근이 들었어. 좀 여유가 생겼고 말이야.”

“백년하청이에요. 허 사장네가 돈! 돈! 소리를 안 하게 되면 몰라도. 부동산이 엄청 많은데 남의 명의로 숨겨 둔 것이 많아 골치 아프데요. 요즘은 세금 폭탄을 맞을까봐 전전긍긍한데요.”

“이제 그런 소리에 현혹되지 맙시다. 그 아주머니도 고생을 좀 많이 했어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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