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남전과 함께
소설

단편소설 <며느리 모시기>

by 남전 南田 2010. 12. 30.

 

단편소설

며느리 모시기

김현우

 

세상일이란 알 수가 없다. 더더구나 백덕조는 기가 막히고 숨이 막혀 세상을 도저히 읽을 수가 없다. 이게 그건가 싶었는데 그게 아니라 저거라고 확 뒤집어 버리는 세상이니 말이다.

그가 더욱 기막혀 여기게 된 것은 ‘어찌된 세상이기에 사지나 정신이 멀쩡한 아들이 나이 서른이 훨씬 넘어 마흔 줄에 들어설 판인데도 장가를 못 간단 말인가?’ 하는 절박한 심정 때문이었다.

백덕조에게는 2남 2녀, 아들 둘에 딸이 둘이다. 큰 아들, 딸 둘은 그가 별 신경을 쓸 틈도 없이 제 짝들을 찾아내 애비 앞에 데려와 인사를 하게 하더니 즉각 결혼식을 올렸고 어정어정 몇 달을 보내더니 손자들이 태어나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할아버지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작은 놈이 어정쩡 취직도 못하고 친구들 사귀는 붙임성도 없고 여자를 사귀는 재주도 영 신통치 않아 조금은 걱정이 되었지만 나이가 들고 때가 되면 장가를 가겠거니 생각했다. 허우대야 키 170cm, 보통 키에 덩치도 듬직하게 살이 찌고 목청도 평범한 남자 그대로 사내다웠다. 학교도 비록 2년제 대학을 나왔지만 그런대로 바보 멍텅구리는 면했고 남자라면 다 가는 군대도 잘 갔다가 제대를 했다. 그런데 장가를 가는 게 어려웠다. 결혼을 할 당자가 통 뜻이 없는 듯 내색을 않으니 더더욱 난감했다.

백덕조는 빵집을 서마산시장에서 하는 제빵, 제과 기술이 있는 사람이었다. 시장에서 점포를 열고 영업을 하면서 좀 큰돈을 벌어보고자 창원 북면에다 제빵공장을 열어 한동안 운영하기도 했다. 사실 그 공장은 무허가여서 이 눈치 저 눈치를 보면서 간을 조리면서 해야 했다. 식품제조업법인가 뭔가 법에 맞춰 제대로 된 제빵공장을 차려 경영해 보려고 처음에는 시도를 했었다. 그런데 시청으로 어디로 쫓아다니면서 허가를 내려고 알아보니까 무슨 놈의 절차가 복잡하고 서류가 그리 까다롭고 또 구비해야할 시설은 또 그리 많은지 반년이 넘게 허비하고서는 결국 두 손 두 발 들고 말았다. 관에서 하라는 기준에 맞추느라 큰돈을 들였는데 나중에는 공장에서 생산하는 빵이 위생적인가 아닌가 검사하는 시설과 연구원까지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소규모이고 판매망이 좁고 거래선이 적더라도 갖출 것은 다 갖추어야 허가를 내 준다는 것이었다. 우선 관에서 요구하는 그걸 또 장만하려면 엄청난 돈이 들어야 하는데 더 이상 자금을 구할 길이 막연했다. 결국 이판사판 거금을 들여 갖추어 놓았던 제빵시설을 내버릴 수도 없으니 불법이라 하든 말든 단속 당하면 벌금에 유치장 갈 각오를 하고서 빵을 만들어서 마산 창원 빵집이나 슈퍼에 내다 팔았다.

그때 그와 큰 아들이 기술자와 함께 빵 만드는 일을 했는데 딸들도 거들고 군대에 갔다가 막 제대를 한 작은 아들 상호도 취직을 한다면서 몇 군데 다니더니 여의치 않자 그냥 빵공장에 눌러 앉아버렸다. 빵이란 채소나 생선처럼 그날그날 만들어서 그때그때 팔아 치워야 하는 생물이었다. 그날 제조한 분량을 다 처분하지 못하면 공장 식구들이 둘러 앉아 끼니 대신 먹어 치워야 적자가 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새벽부터 밀가루를 반죽하기 시작해 오전 8시면 당일 팔아야 할 분량의 빵을 다 만들어내야 하고 연달아 그걸 차에다 실고 한시라도 빠르게 배달을 나가야 했다. 프로판가스가 하루에 50kg짜리 한통이 들었다. 기계가 고장이 났다든지 밀가루나 재료가 모자랐다든지 해서 조금이라도 삐끗 차질이 생긴다면 그날 장사는 만사휴이, 고정적으로 납품하던 곳에다 코를 박고 용서를 빌어야 되는 것이었다.

그러니 작은 아들 상호가 빵공장에 나와 일을 도와주는 것은 반가웠다. 물론 제빵 기술자 말고도 사람을 서너 명 더 쓰고 있었지만 오전 작업은 항상 바쁘고 분주했으므로 한사람이라도 더 필요했다.

막무가내로 불법을 저지르면서 시작했던 북면 제빵공장은 그래도 3, 4년을 돌리다가 문을 닫고 말았다. 단속을 나오면 얄팍한 봉투를 내밀고 불원장래에 규정된 시설을 다 갖추어서 허가를 내 운영하겠다고 싹싹 빌어 위기를 모면했다. 사실 공장 건물을 짓고 생산시설을 하고 그랬지만 끝내 무슨 검사시설은 꼭 해야 한다고 해서 적당하게 설치했지만 번번이 불합격을 당하니 난감했었다. 관에서 요구하는 그러한 시설을 완벽하게 갖추자면 더 많은 시설비가 들어가야 하는데 그는 그만 기진맥진해져서 빚을 더 이상 감당할 수가 없어 포기하고 말았던 것이었다. 배짱을 부리며 불법 영업을 몇 년 하고나니 이판사판 사람이 조금 뻔뻔해 지기도 했다. 그러나 왔다 갔다 하는 관리들마저 이젠 더 눈감아 줄 수 없노라 탕탕 큰소리를 치는 데는 사람이 차차 지치기 마련이었다. 사실 그동안 눈감아 준 것만도 큰 인심을 쓴 것처럼 관리들은 생색을 냈다. 하여간 제과상인조합장이나 사무국장 등의 지원에다 찔러준 봉투 덕도 있었지만 턱도 없는 시설기준을 내세우며 허가를 미루는 관리들의 타성 또한 불법 영업을 조장하고 있었다.

그러나저러나 빵공장 문을 닫고 도로 서마산시장 빵집으로 영업장을 옮기니 이제 제대로 양과나 빵을 만들게 된 큰 아들, 딸 그리고 아내까지 한 집에 개구리 한 우물에 모이듯 모여 복작거리니 장사가 잘 되는 듯 하면서도 티격태격 분란이 잦았다. 그래서 북면 빵공장 정리를 해 생긴 자금으로 합성동에다 제과점을 차려 큰 아들에게 맡겼다. 그 즈음 큰 아들이 결혼을 했고 큰 딸도 가구공장에서 일하는 청년과 연애를 해 시집을 갔다. 작은 아들은 창원공단에 있는 전자회사에 취직을 해 몇 달을 다니더니 아무런 이유도 변명도 없이 출근을 하지 않았다. 서너 해가 금세 지나갔다. 작은 딸도 어느 날 Y중공업에 다닌다는 청년을 데려와 인사를 시키더니 배가 불러 급하게 결혼식을 올려 주었다.

백덕조 내외도 그러구러 환갑, 진갑을 지냈다. 손자 손녀가 그 사이 다섯이나 생겼다.

이제 남은 걱정은 작은 아들 상호였다. 이놈만 제대로 된 직장을 잡고 장가를 보내고 나면 금방 죽어도 여한이나 걱정이 없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집안에서 아무 할 일 없이 빈둥거리는 상호를 보고 있노라면 울화가 치밀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상호가 제과점에 나와서 일을 제대로 거들어 주는 것도 드물었다. 어쩌다 단체 주문이 있어 대량으로 빵을 만들어야 할 때면 제 어미가,

“내일 납품해야할 빵 주문이 들어와서 손이 필요하데이. 좀 나와서 거들어도!”

하면 고개를 끄덕이고 나오는데 그럴 때를 빼고는 제 방에 들어 앉아 컴퓨터 게임을 하는지 취직 시험 준비를 하는지 어떤지 모르지만 방문을 처닫고 하루 종일 기척이 없었다. 별 일이 없으면 빵집에라도 나와서 아버지 어머니 일을 거들어 주든지 아니면 팥빙수나 생 음료수를 만들어 서빙이라도 하면 좋으련만 그럴 생각이 통 없어 보였다.

큰 아들 상태가 합성동 제과점을 접고 충청도 옥천인가 어딘가 산업공단에 공장이 많은데 그 인근 시가지 뜨내기 유동인구가 많은 곳으로 이사를 간 것이 4, 5년 전이었다.

“아버지, 마산보다 장사가 잘 될 것 같아요. 제 친구가 거기 사는데 공장도 많고 젊은 사람들이 많답니다. 아시다시피 제과점이란 데가 젊은 사람 상대 아닙니까? 좀 큰 점포를 얻어서 요새 인기 좋은 무슨 OO바게트라 하는 체인점으로 계약해 장사를 해 볼랍니다.”

아들의 구상을 듣고 보니 그게 그럴 듯했다. 사실 갈비집이나 국밥장사도 무슨 체인점이니 하고 이름 번듯한 간판을 내걸고 장사를 하면 손님이 들끓고, 하다못해 국수집을 하더라도 서울이나 부산의 이름난 무슨 무슨 칼국수 체인점이란 간판이 붙어야 제대로 영업이 되는 판이 아니던가?

“그래, 네 생각대로 해 봐라. 그런데 저 놈, 저 상호 좀 데려가거라. 객지 타향에서 영업을 하자면 생판 남인 종업원보다야 좀 나을 거야. 장가도 안가고 취직도 안하고 빈둥거리는 상호를 난 영 보기 싫다.”

“상호를 데려 가라고요? 즈거 형수하고 의논 좀 해봐야겠는데요?”

“이놈아가 뭐라카노? 언제부터 니가 마누라 눈치보고 그랬나? 이 애비가 시키면 시키는 대로 따를 것이지!”

“아, 알았습니더. 그래도 힌트는 조금 줘야지요. 안 그러면 지만 빼놓고 멋대로 한다꼬 안 하겠습니껴?”

“잔소리 군소리 말고 네 동생 데려간다꼬 작정을 해라.”

옆에 있던 아내도 거들자 큰 아들은 고개를 끄떡거렸다.

“상호가 도와주면 한결 장사가 잘 될 겁니다.”

결국 큰 아들이 충북 옥천으로 이사를 갈 때 상호가 따라 갔다. 합성동 코딱지만 한 가게 전세를 뽑아 가서 서너 배 큰 점포를 얻었고 그동안 벌어 모은 돈에 백덕조가 돈을 보태어 살림집도 장만해 주었다.

이사를 할 때 따라 갔던 백덕조는 상호를 붙들고 잔소리를 했다.

“인자····· 장가갈 궁리를 좀 해봐라. 니는 와 맘에 드는 여식애 하나 사귀지도 못했나? 다른 아아들은 잘도 연애를 해서 결혼을 하드 마는····· 넌 부모 속을 팍팍 썩이고 그랄 끼가?”

상호는 아비의 말에 고개를 죽 빼고 땅바닥만 내려다보면서 대답이 없었다.

“잘 생각 해 봐라. 요새 중매한다는 것도 어렵다더라. 오데 중매쟁이가 있어야지. 결혼상담소 같은데 가면 제대로 책임지고 소개를 해 주지 않으면서 소개료만 아주 비싸게 받아먹는다더라. 그라니 내 일가친척 이웃 친구들 주변에 알아봐도 처녀가 마땅한 게 없응 께 장가갈 네가 째보고 곰보고 잘 잡아 오너라.”

“걱정 마이소. 내 알아서 때가 되면 장가갑니다.”

“태평스런 소리 말고! 좀 심각하게 이 애비 말을 생각해 봐라.”

“아, 알았다니까요!”

아들이 팩! 하고 대답하는 바람에 더 채근을 못하고 말았다.

옥천에서 마산 집으로 돌아오고 나서도 상호만 떠올리면 걱정이 밀려들고 가슴이 울렁거리곤 했다. 어쩌다 아들 장가보낼 생각만 하면 속이 답답해지고 갑자기 산다는 재미가 싹 사라지고 마는 것이었다. 길을 가면서도 결혼을 하지 않은 듯 한 여자가 지나가기만 하면 속으로 ‘우리 며느리로 올지 안 올지 물어 볼까? 말까?’ 하고 유심히 살펴보는 버릇이 생긴 것도 그 지음이었다. 뚱뚱한 애가 지나가도 ‘저 정도쯤이야 괜찮아! 우리 며느리가 되고나면 살을 빼라고 하지 뭐.’ 했고, 예쁘고 날씬한 여자가 지나가면 ‘저 정도 외모쯤이면 상호와 어울리겠어.’ 하고 김칫국부터 마시기도 했다.

그러다가 그와 절친하게 지내는 친구와 무슨 얘기 끝에 백덕조는 작은 아들 상호가 나이가 서른 대여섯이 넘었는데 결혼을 못시켜 밤에 잠이 오지 않는다고 하소연을 했더니 뜻밖에도,

“야! 이 친구야! 그거 걱정을 말아! 요새 국제결혼을 많이 하는데 그거 괜찮더라고.”

하고 외국 여자들이 한국 농촌 총각들과 결혼을 많이 한다는 걸 말하면서 백덕조에게 그걸 권하는 것이었다. 백덕조도 아들의 국제결혼을 생각해 본 적이 없지도 않았다. 길가에 흔히 걸려 있는 <베트남 처녀와 결혼하세요> 하는 플랜카드를 자주 봤기에. 그러나 국제결혼의 병폐나 문제점도 많다는 걸 텔레비전을 통해 알고 있으니 쉽게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누가 그러던데 돈만 보고 온다고 하데. 그래서 집전화는 국제전화 못하게 막아놔야 하고, 신용카드는 아예 만들어 주면 안 되고·····. 특히 인터넷은 더 안 된다고 해. 안 그러면 인터넷으로 저희들 끼리 연락해서 도망간다는 거야.”

“그거, 좀 풍을 친 것이야. 외국여자들이 한국에 시집오는 게 다 가난하게 사는 제 나라 친정을 돕겠다는 심정이란 건 당연지사이고! 100% 한국에 시집와서 이곳에 정 붙이고 살기란 힘든 거 아닌가? 우리나라 사람끼리도 결혼을 했다가 이혼하는 것들이 많은 판에 낯설고 물설고 말도 통하지 않는 이국에 와서 파탄이 날 수도 있는 거지. 안 그래?”

“그래도 믿을 수가 있어야지. 보따리 싸서 도망가는 여자들이 많다더라. 도망가서 음식점이나 공장에 취직을 하면 돈을 벌어 제 나라 자기 집에 보내 줄 수 있으니·····.”

“허어! 내가 다니는 교회에 한국에 시집와 사는 중국 여자가 있는데. 물론 연변 출신 우리 민족 이지. 한국말도 썩 잘하고 아이들도 둘이나 낳아 잘 키우고 시부모도 잘 모시고 남편과도 잘 지내고······.”

“그런 사람이라면 좋겠어. 국적이 중국이지 우리나라 사람이 아닌가? 말씨가 조금 함경도 가까우니 사투리 억양이 좀 거슬리겠지만 얼마 지나지 않으면 이쪽 말씨를 쓰겠지. 그러면 연변 사람이란 표도 덜 날 꺼고.”

“암! 그렇고말고! 구더기 무섭다고 장 못 담그나? 내 한번 알아보지. 시아버지 되는 황 집사나 그 집 식구들이 모두 독실한 신자이니 허튼 소리를 할 사람들이 아니거든.”

“그래, 적당한 사람이 제 친정 쪽에 있는가 알아 봐 줘. 그나저나 상호 이놈이 내 말을 들어야 할 텐데. 중국 여자라고 싫다면 낭팬데?”

“아, 말씨가 문젠가? 처녀가 예쁘고 살림 잘하고 시부모 공경하고 착실하면 되지. 아마 황 집사 며느리가 소개를 한다면 믿을만하지. 국제결혼 전문으로 하는 결혼소개소보다야 수십 배 나을 걸.”

“그래, 직접 소개를 받으면 소개소를 통하는 것보다야 사람 하나는 믿을 만하겠지.”

백덕조는 당장 옥천 큰 아들, 며느리, 작은 아들 상호에게 친구의 얘기를 그대로 전하면서 설득을 시작했다. 상호는 처음에는 거부감이 많더니 여럿이 달려들어 이렇게 구슬리고 저렇게 달레니 결국,

“아, 알았어요. 아버지 말대로 어디 추진해 보세요.”

하고 승낙하고 말았다. 쇠뿔은 단김에 빼라고 친구에게 연락하고 친구는 교회에 같이 다니는 황 집사와 그 며느리에게 부탁을 해 얼마 지나지 않아 며느리 후보감의 처녀 사진이 백덕조 손에 쥐어졌다. 사진을 받아 보니 처녀가 얼굴도 잘 생겼고 인상도 그걸 듯 했으며 키도 몸매도 반듯해 보여 단번에 마음에 쏙 들었다. 그는 사진을 들고 상호를 만났다.

“처녀가 거기서 우리나라로 치면 고등학교까지 다닌 모양이야. 성격도 쾌활하고 성적도 보통이었다고 해. 소개를 해 주는 황 집사의 며느리와 같은 동리 사람이라고 하더구먼.”

큰아들 상태나 큰 며느리도 처녀 사진을 보고서 마음에 든다면서 당장 중국 연변으로 선보러 가서 혼사를 매듭지어라고 성화를 부렸다. 상호는 마지 못해하면서도 부모의 명령을 할 수없이 따른다는 태도로 비행기를 탔다. 그 후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연변 처녀가 백덕조의 며느리로 호적에다 올리는 혼인신고 등등 절차를 거쳐서 초청비자를 받아 한국으로 입국하는데 그리 오랜 시일이 걸리지 않았다. 물론 중국 며느리를 법적으로 맞이하는데 출입국 절차를 밟는다든지 저쪽 사돈댁과의 논의 등이 복잡했다. 그렇지만 백덕조는 그가 아는 국제결혼 전문 상담소를 하는 사람에게 부탁해 일처리가 쉬었다. 일을 하는 사내가 호적등본, 주민등록등본을 떼어 달라면 떼어다 주고 재산증명서를 해 오라면 해다 가져다주었다.

드디어 며느리가 중국에서 한국으로 오던 날 백덕조 일가가 김해공항에 나가 맞이했다. 그런데 며느리 혼자가 아니라 안사돈과 며느리의 이모란 여자까지 끼어 온 것이었다. 조금 뜨악한 생각이 들었으나 딸이 이역만리 타향으로 시집을 오니 당연히 따라온 것이겠거니 여겨 환대를 했다. 백덕조는 옥천에다 상호와 새 며느리가 살 전셋집을 마련해 주었고 새 살림을 차린 아들은 한껏 기분이 좋았다. 그도 아들과 마찬가지로 생김새나 행동거지가 국내 여자들이나 별반 차이가 나지 않아 내심으로는 좋은 며느리를 얻었다 싶었다. 앞으로 살기만 잘 살면서 손자 손녀 낳고 재산을 모으면서 착실히 살게 되기를 빌었다. 한두 달 쯤 지나 한국생활에 익숙해지면 마산으로 데려다 정식으로 한국식 결혼식을 올려주기로 안사돈과 이야기를 했다. 안사돈도 그러는 게 좋겠다고 승낙했다.

“혼인신고를 해 놨으니 법적으로 정식 부부임에 틀림없으니 걱정 마십시오. 안사돈.”

“아, 한국식 결혼식은 몇 달 지나서 해도 무방합니다. 우리도 그때까지 서울로 가서 지낼까 합니다.”

“아니, 연변으로 돌아가지 않고요?”

그런데 사단은 안사돈이란 여자와 이모란 여자들에게서 시작되었다. 그 여자들은 서울로 가더니 식당엔가 공장엔가 취업을 하고서 돈을 벌기 시작했다. 몇 달이야 합법적일지 모르지만 얼마 지나지 않으면 불법 체류일 것이고 딸 시집오는데 따라와 취업을 하였으니 그것도 불법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새 며느리만 착실하게 살아 준다면 고마울 데가 없지 않은가? 그래서 백덕조는 친정 떨거지들이 며느리 곁에 붙어 있지를 않고 서울로 떨어져 나간 것이 다행이라 여겼다.

그런데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상호가 급한 목소리로 전화를 했다.

“정화가! 정화가 도망을 갔습니다. 내가 해 준 옷이랑 패물이랑 몽땅 갖고 말입니다.”

“뭐야? 며느리가 도망을 쳐? 언제?”

“사 나흘 됬습니다.”

“야! 이 바보자석아! 사내가 여자 하나 제대로 간수 못하고 놓쳐? 어허!”

그는 탄식밖에 나오지 않았다. 급히 서울로 어디로 수소문하고 달려갔지만 취업을 해서 돈을 번다는 안사돈이나 이모를 찾기에도 며칠이 걸렸고 가까스로 그 여자들을 찾았으나 딸의 행방을 전혀 모른다고 시치미를 떼는데 사람이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이리 다그치고 저리 구슬리며 파출소 끌고 가 당장 고발을 하겠다고 엄포를 놓아도 여자들은 막무가내로 모른다고 버티는데 어쩌지를 못할 지경이 되고 말았다. 며느리 행방이 묘연하니 상호도 백덕조도 헤매고 다닐만한 곳도 없었다. 그 동안 행적을 더듬어 두어 곳 찾아가 봤지만 허사였고 황 집사 며느리도 백방으로 수소문을 했지만 오리무중이었다.

결국 며느리만 잃어 버렸다. 자취를 감춘 여자가 끝내 나타나지 않으니,

“이제 남은 것은 호적에서 그 년의 이름을 파내는 것뿐이네. 그거 이혼소송을 해야 돼.”

“허어! 이혼소송이라니!”

“아니, 그걸 그냥 두고 지낼 꺼요? 당장 경찰서에도 알리고 실종신고도 해서 법적으로 정리해야 되지요. 그래야 다시 장가를 가든지 우짜든지······.”

“허어!”

주변 사람들의 조언에 너무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런 소동이 일어난 얼마 후에 조금 잠잠해 지려니까 기다렸다는 듯 또 다시 혼담이 들어 왔다. 상태가 제과점을 하는 마을의 사람들 여럿이 국제결혼을 해서 사는데 주로 베트남 처녀들이 와서 잘 산다는 것이었다. 베트남 처녀들은 우리 한국 사람들처럼 어른을 공경하고 한번 결혼하면 어떤 난관이 있어도 그걸 지켜내고 버티어 내는 힘도 강하고 생활력도 있으며 또 도시처녀들처럼 닳아빠지지도 않아 한국으로 결혼해 와서 잘 적응해 잘 살고 있다고 했다.

“아버지, 우리 가게 단골 중에 베트남 처녀와 결혼해 잘 사는 청년들이 몇 명이 있는데 상호가 중국 여자에게 당한 얘기를 듣고서 베트남 처녀를 권합니다. 베트남 처녀는 절대 한국에 와서 도망치는 법이 없답니다. 한번 알아볼까요?”

“그래라! 이왕 엎질러진 물 퍼 담을 수 없고! 도망친 년 붙잡아도 우째 같이 살겄노? 안 돼지.”

“그라면 한 번 알아 보겠습니더.”

중국 처녀 이름을 상호 호적에서 파내는데 장장 6개월이 걸렸다. 그것도 이혼 수속이라 갖출 서류나 밟아야 하는 절차는 다 갖추고 밟아야 했다. 이리저리 백덕조가 아들 대신 돌아다니며 일을 처리했는데 골머리가 아팠다.

상호는 제 형 상태의 말에 고분고분 따랐다. 상호도 국제결혼을 해 왹국여자와 살고 있는 옥천 청년들 얘기를 듣고 보고 해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옥천 사람에게 시집와 사는 베트남 여인으로부터 소개를 받아 처녀 사진을 받았다. 국제결혼을 전문으로 하는 소개소를 통하면 단 한번 출국에 여러 명 후보를 만나고 그 자리에서 상대를 결정하고, 결혼식도 올리고 첫날밤을 보내고 귀국하는데 일주일이 안 걸린다고 했다. 하지만 중매인 없이 직접 해야 되는 일이라 시일이 걸렸다. 상호는 날을 잡아 비행기를 탔고, 하노이에서도 제법 떨어진 마을까지 가서 처녀를 만나 선을 보고 결혼을 결심하였고 한 달 쯤 지나서 한국 베트남 사이의 수속을 하고 그 쪽으로 가서 한 일주일을 있으면서 베트남식 결혼식을 올리고 어쩌고 여러 과정들을 모두 마치게 되었다. 상호의 얘기로 처녀가 순수해 보이고 말씨도 고분고분 해서 지난번 연변여자보다는 훨씬 좋아 보이고 제 말도 잘 들을 것 같다고 해서 조금 안심을 했다.

외국 젊은 여자가 한국에 오려면 우선 결혼신고를 먼저 해야 되는 것이 절차이니 연변 며느리 볼 때와 다름없이 베트남 처녀의 호적을 받아 혼인신고를 하였고 그러고 난 후에야 비자가 발급되어 입국을 하도록 연락이 되었다. 저쪽 나라에서 일을 봐 주는 사람과 이쪽에서 일을 보는 사람들끼리 연락을 주고받는데 상호가 인천공항까지 마중을 나가면 베트남 처녀가 비행기에서 내릴 테니 거기서 서로 만나 옥천으로 데리고 오면 된다고 했다.

상호가 여자를 마중하러 일정대로 인천공항에 나가서 기다렸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이란 말인가?

여자가 탔다는 비행기는 분명히 도착했는데 입국장을 통과해 나타나야할 사람이 입국 수속을 밟고 화물을 찾고 어쩌고 하는 시간이 넉넉하게 지나갔음에도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었다. 상호는 눈이 빠지게 입국장에서 빠져 나오는 사람들을 열심히 살펴보았지만 끝내 베트남에서 만나 결혼식도 올리고 며칠 함께 잠도 잤던 여자를 발견할 수 없었다. 그는 한국에 오는 여자가 탔다는 비행기의 항공사 사무실까지 찾아가 승객 명단을 확인했더니 거기에는 제 아내(?)의 이름이 분명히 있었다.

“아이고! 고객님께서 놓쳤군요. 이 분은 분명히 우리나라에 입국해 수속을 모두 마치고서 정상적으로 공항을 나가신 것이 틀림없습니다. 다시 찾아보시죠? 혹시 낯선 곳이라 헤매고 다닐지 모릅니다.”

그러나 끝이었다. 다시 발이 부르트라 황급히 입국장뿐만 아니라 출국장 까지 오르내리면서 찾아 다녔지만 여자의 모습을 발견할 수 없었다. 중매를 했던 옥천의 베트남 여인과 그 남편에게 전화연락을 하고 난리를 쳤으나 오리무중 끝내 찾을 수가 없었다. 여자가 그 혼잡한 공항 건물 안에서 길을 잃고 우왕좌왕하리란 생각에 해가 지도록 돌아다니며 미친놈처럼 달려가 외국 여자라면 살펴보았다.

“형님! 여자가 사라졌어요. 황 씨 형님, 그 형수에게 무슨 연락이 왔는지 급히 알아보고 연락해 주세요.”

그는 상태에게, 아버지에게 긴급 상황임을 알렸다. 상태가 중매를 한 황 씨 부인에게 공항에서 여자가 증발해 버렸다고 무슨 연락이 없었느냐? 수상한 낌새가 있었던 것 아니냐? 다그쳤으나 그 쪽에서도 어리둥절 통 모르는 일이라는 대답뿐이었다.

그 여자는 입국하면서 상호의 눈을 피해 자취를 감추었음이 분명했다. 황 씨 부인에게도 종내 소식이 없었다. 상호로부터 돌발사태가 발생했다는 전화연락을 받고서 백덕조는 그만 기가 막히고 숨이 막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때까지 그는 상호가 새 며느리를 인천 공항에서 만나 서울로 가서 남산 타워도 구경시키고 일류 호텔로 데려가 숙박하고 이튿날은 경복궁 구경도 시키고 그럴 줄로 기대를 걸고 있었다.

―-- 우떻게 이런 일이!

그는 벌러덩 안방에 드러누워 버렸다.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빨리 뭔가 알아보고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다짐을 하지만 속수무책 갑자기 머리가 텅 비어버린 듯했다. 옥천에서 상호와 상태가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수습책이 뭔지, 공항에서 감쪽같이 사라진 베트남 며느리를 과연 찾을 수가 있을 것인지 뛰어다니며 움직이고 있었지만 좋은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사 나흘 만에 사건의 윤곽이 짐작되는 소식이 왔다. 새 며느리의 사촌인가 오촌인가 하여간 친척 오빠란 청년이 울산공단에 있다는 것과 또 전화가 황 씨 부인에게 왔는데 잘못했다고, ‘상호 오빠에게 너무 큰 죄를 지어 갈 수 없다고’하더라는 것이었다.

“뭐라꼬? 당장 오라꼬 하제. 모든 걸 용서해 줄 터이니 당장 오라꼬······.”

그는 전화에다 대고 고함을 치니 상태가 그랬다.

“아버지, 이번에도 틀렸습니다. 벌써 제 나라에서 올 때 도망칠려고 계획을 세웠던 모양인데 쉽게 나타나겠습니까? 하여튼 황가 마누라, 그 여자가 자기들 나라 사람들을 통해서 알아본다고 했으니 기다려 보입시더. 그 사람들끼리는 무슨 연락망이 있답니더.”

그럴 수밖에. 지난번 연변 여자 때문에 경찰에 있는 친척에게 도망친 며느리를 찾을 방도를 물었으나 별 뾰족한 방법이 없었음을 알고 있었으니 이번에도 여자가 제 발로 나타나지 않으면 영영 찾을 수 없을 것이라 낙담하고 체념부터 하고 말았다.

서, 너 달이 흘렀다. 새 며느리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찾을 수도 없었다. 그런데 상태로부터 전화가 왔다. 솔깃한 얘기였다.

“아버지, 황가 여자가 너무나 미안하다면서 자기 사촌 동생을 불러와 상호와 살게 해 주겠다는데 어쩔까요?”

“그거 믿을만한 얘기냐? 신분보장이 확실하게 돼야해. 또 한국 나와서 감쪽같이 사라질 사람이라면 이젠 나도 손들었다. 연변 여자에, 이번 일, 두 번으로 돈이 이천만원이나 축이 났다. 돈은 돈대로 쓰고 속고 속아서 사람 병신이 안 되었나? 친구들에게, 이웃에게 부끄러워 죽겠다.”

“이번에야 그리 되겠습니까? 삼 세 번인데·····.”

“상호는 뭐라 카더냐?”

“상호도 생각이 있는 갑습니더. 벌써 말하는 처녀 사진도 봤는걸요.”

“상호가 좋다카문 한 분 진행해 봐라. 2천만 원이 날라 갔는데 또 천만 원쯤이야 날아가면 대수냐?”

“이번에는 느낌이 좋습니더.”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이 되었다. 상호가 또 베트남으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한 번 다녀왔던 길이라 이번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간다고 했다. 그런데 문제는 난데없는데서 생겼다. 백덕조가 얼굴 코빼기도 보지 못했던 베트남 여자가 버젓이 그의 며느리로 호적에 올라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호적에 올려야 한국으로의 입국이 가능했기 때문에 베트남에서 결혼식을 올리면서 입적을 시켰던 것이었다. 호적에서 그 원수 같은 여자 이름을 지워야 새 며느리를 베트남에서 데려 올 수 있다는 것이었다. 지난번 연변여자 때문에 이혼수속을 해 본 경험이 있는 백덕조는 다시 마음을 추스르고 시청으로 동주민센터로 출입국사무소로 대서소로 뛰어 다녔다.

베트남을 다녀 온 상호에게 이번 여자는 어떻더냐고 물었더니 하는 말이 그를 웃겼다.

“소나 닭 키우는 거는 싫데요.”

“그거 무슨 소리냐? 빵공장 한다고 얘기 안했어?”

“했지만 믿지 않고요, 내 주민등록 주소를 보고 그래요. 마산시 내서읍 호계리이니까 농촌이 아니냐고요. 시라면 당연히 무슨 동이라야 하는데. 한국에서 온 사람들이 처녀들에게 농사를 짓지 않고 장사를 하네, 회사에 다니네 해 놓고요, 막상 시집와서 보면 돼지 키우고 농사를 짓는데요.”

“허어! 그 쪽도 사기 치는 놈들 더러 만나본 모양이다.”

이번에는 이혼수속이 꽤 시일이 걸렸다.

거의 1년이 지나서야 또 다른 베트남 새 며느리를 한국으로 모셔올 수 있었다. 성격이니 외모니 뭐니 그런 조건들을 따지지도 못했다. 그저 한국으로 시집와서 제 남편과 십 년이고 이십년이고 해로하면서 자식들 서너 명 낳고 살림만 잘 할 수 있다면 그게 최고 덕목이고 바라는 바였다. 그러니 못난 자식에 그 잘난 며느리를 상전으로 모실 각오였다.

이번에는 상호 혼자 인천 공항으로 내보내지 않고 식구라는 식구는 모두 출동했다. 백덕조와 아내는 물론 딸 둘, 사위 둘, 상태 내외, 중매를 선 황 씨와 그 아내까지. 그리고 새 며느리 사진도 여러 장 복사해 각자 지니고 입국장에 그물망을 치듯 총총 서서 맞기로 했다. 만약 지난번에 식구가 모두 다 나가서 여자를 맞이했더라면 도망치지도 빠져 나가지도 못했으리란 생각이 백덕조에게 들었기 때문이었다. 참 남들이 알면 웃을 일이었지만 그에는 당면한 위기였고 심각한 상태였었다.

비상사태로 대기했던 백덕조 앞에 새 며느리는 방긋방긋 웃으며 공항에 나타났고 시댁 식구들의 총출동 마중에 환대에 너무나 감격하고 놀라워했다.

“아버지, 어머니, 오빠·····.”

상호가 지난번 베트남에 가서 가르쳐 준 한국말을 잊어버리지 않고 까무잡잡한 얼굴의 새 며느리가 또박또박 말하며 인사를 해 백덕조는 입이 함박 벌어지고 말았다. 키도 몸도 자그마하고 어딘가 이국적인 촌티가 났지만 ‘아버지, 어머니!’ 하고 한국말로 부르는 바람에 그만 마음에 쏙 들었다.

상호의 결혼식을 마산에서 치른 것은 거의 1년이 다 흐른 후였다. 또 도망가 버리지 않을까, 아니면 무슨 핑계를 대고 ‘사네 안 사네.’ 하고 야료를 부리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며느리가 임신을 했고 서툴지만 저녁이면 꼭 전화를 걸어 서툰 한국말로 문안 인사를 하기까지 1년이 걸렸는데 그제야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백덕조는 일가친지 친구 이웃에게 안심하고 베트남 며느리를 자랑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청첩장을 수백 장 찍어 아는 사람이라면 빠지지 않고 다 돌렸다. 그리곤 전화도 걸었다.

“아아, 내 며느리 하나 모시기에 얼매나 공이 들었는지 모른데이. 꼭 와서 자랑스런 우리 며느리 좀 봐다오.” *****

(경남문학 2010년 겨울호, 통권 93호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