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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단편소설 <검버섯들의 한담>

by 남전 南田 2010. 12. 30.

 

  단편소설

검버섯들의 한담(閑談)

김 현 우

 

느티나무는 으레 마을 초입 동구 밖에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수백 년 세월을 버티며 서서 만고풍상을 이겨낸 늠름함이 있어야 제격이다. 그 둥치도 장정 서너 아름은 되고 뿌리 가까운 곳에는 커다란 구멍이 났거나 썩고, 그 가지는 휘어지다 못해 땅에 닿을 듯 하고 폭풍우에 벼락에 폭설에 가지가 꺾이고 죽어 마른 가지가 이곳저곳에 걸려있어야 문화재 대접을 받을 노거수(老巨樹)란 이름에 걸맞을 것이다. 또 한쪽은 반쯤 폭염 때문에 잎이 누렇게 마른 듯 쇠잔해 보이거나 또 다른 쪽은 푸르다 못해 거무죽죽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그런 고목이어야 진정 느티나무라 할 만할 것이다. 그 그늘아래 논밭에서 일하다 더위를 식히러 나온 동리 사람들이 댓 명 모여 세상인심 돌아가는 얘기에 귀신 씨나락 까먹는 잡담에 웃음소리가 들려도 좋다. 아니면 한가하게 삼베 잠방이 입은 노인 서너 명이 장기판을 가운데 두고 둘러앉아 담소를 나누는 여유작작한 신선놀음 풍경이라면 느티나무의 수채화로는 딱 제격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작은 도시, 그것도 백여 년 동안 불리어지던 이름마저 이웃 큰 덩치 도시에 밀려 사라져 버린 어이없는 일이 생기고만 허름하고도 허울뿐인 도시, 그저 그만인 작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은 쪼그라든 양은 냄비 같은 동리, 거미줄처럼 가느다랗게 끊길 듯 이어지며 얽혀 겨우 숨길만 유지하는 골목들, 오후가 되면 뜨거운 볕만 내려 쪼일 뿐 바람기마저 한 점 없는 답답한 곳, 그곳은 그 흔한 내비게이션이나 인터넷 지도에도 뜨지 않는다. 재개발한다고 요란을 떨다가 부동산 불경기에 그것마저도 잠잠해 버린 퇴락한 골목에 선 느티나무는 이제 겨우 십 년생쯤 되는 그야말로 멍석 크기만 한 그림자를 가진 나무다. 옮겨 심을 적에 버티어 놓은 지주목이 아직도 함께 있는 그런 나무다.

몇 해 전, 게딱지같은 집 수 십 채를 들어내고 차가 다닐만한 폭의 마을길이 생겼다. 도로공사 때 삼각형으로 남은 자투리땅에 어른 팔뚝 굵기 만한 느티나무를 심고 그 주변에 꽃나무 몇 그루 서있는 화단이 만들어졌다. 느티나무 둘레에는 등받이 없는 나무의자 4개를 설치해 누구나 쉴 수 있는 공간이 함께 만들어진 것이었다.

골목의 느티나무는 올 여름 들어서야 그 아래 그늘은 조금 넓은 멍석 크기로 커졌고, 작은 차일을 친 듯 얇은 그늘을 만들어 한낮이면 나무 아래는 시원한 바람이 잠시 머물다 갔다. 그곳은 자연히 마을 늙은이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해 요긴한 쉼터로 애용되곤 했다. 물론 곧 뜨거운 태양 볕에 말라버릴 작은 물웅덩이에 모여든 올챙이 같은 신세들이었지만 검버섯이 낀 얼굴들이 슬금슬금 모여 들었다. 그러다가 해가 중천에 솟기만 하면 따가운 볕이 내려 쪼이고 후끈거리는 판이라 그곳에서는 더 버틸 수 없어 자리를 뜨곤 했다. 해를 따라 이리로 저리로 그늘을 따라 옮겨 다니다가 결국은 답답한 자기들 집으로 숨어들어야 했다.

오래 이 골목에 살아서 스스로 토박이로 자처하는 김영감은 아침을 먹자마자 나와서 빗자루 질을 한다. 간밤에 젊은이들이 놀며 버린 담배꽁초, 술병, 종이컵, 통닭 포장지에 얼음과자 봉지까지 널 부러져 있어 느티나무 아래는 쓰레기장을 방불케 했다. 음식물쓰레기에서 악취도 나고 개미가 바글바글 달라 들고 파리도 어김없이 날아들어 군무를 한바탕 벌리니 늙은이들이 모여 놀자면 청소를 해야 했다. 그래서 김영감은 느티나무 아래에 왔다하면 빗자루를 들기 마련이었다.

“아따! 처먹었으면 남은 건 싸 가든지 쓰레기 버리라고 둔 통에다 버리지. 망할 놈들! 꽁초는 또 제 마음대로 휙휙 던지니, 제 안방에서도 이러나! 여하튼 젊은 놈들이란 다 싸가지가 없어. 제 놈들도 늙으면 신세타령을 할 놈들이 생전 늙고 병들지 않을 것처럼 기고만장하니!”

구시렁거리며 김영감은 빗자루로 쓰레기들을 쓸어 나무아래에 둔 쓰레기통에다 모은다. 그 쓰레기는 열 시 쯤 되면 희망근로인가 공공근로 인가 일당 얼마에 청소를 하는 늙은이들이 나타나서 어김없이 가져가 버린다.

느티나무 그늘 아래는 보통 아침 8시 반 쯤 되면 커피를 즐길 늙은이들 서너 명이 늦은 아침을 먹고서 모여 든다. 토박이 김영감, 건설 공사판을 떠돌며 일했던 이 사장, 최근까지 공장에 다녔던 배씨, 전직이 공무원인가 선생인가 잘 밝히지 않는 박 선생이라 불리는 샌님 영감 등. 커피라야 젊은이들이 즐기는 값비싼 이름들의 원두커피가 아니라 참기름 집 옆 모퉁이에 서있는 자판기에서 뽑은 것이라 단돈 300원짜리다. 하지만 그게 맛이 기 막힌다는 토박이 김영감의 주장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통한다. 다른 자판기의 커피보다 맛이 좀 유별난 게 있을지 모르지만 사실 그게 그거 일 텐데. 내 입에 익은 맛이 제일이라는 영감들의 생각일까? 아니면 관리를 하는 참기름 집 아주머니가 매일 씻고 닦고 맛보고 그래서일까? 하여간 이곳 커피는 다른 곳 자판기의 커피맛과 사뭇 다르게 달지도 쓰지도 않으면서 커피향이 진하고 늙은이들이 수십 년간 길들여졌던 그 맛을 느끼게 만들었다. 서로 돌아가며 자판기에 돈을 넣고 커피를 뽑았다. 어제 김영감이 동전을 넣고 뽑았다면 오늘 아침은 이 사장이 1000원짜리 지폐를 빳빳하게 펴서 조심스레 구멍에다 넣었다. 지폐는 구김살이 있으면 들어갔다가 도로 나오고 또 밀어 넣으면 도로 나와서 그들을 짜증스럽게 하기도 했다.

인생살이가 대체로 즐거웠다기보다 고달팠던 기억이 많은 마을 늙은이들이라 커피 한 잔 가지고 구시렁거리기 일 수인데 느티나무 아래에 모여드는 그들은 이구동성 제 입맛에 딱 맞는다고 만족해한다. 그러면서 다른 곳 자판기에 가서 빼 먹을 한 잔의 커피도 일부러 참았다가 참기름 집에 와서야 커피를 빼들고서 느티나무 아래로 오곤 했다.

느티나무 아래 검버섯이 핀 얼굴들의 한담(閑談)은 쉴 새 없고 거칠 것이 없다. 선거철이면 당연히 출마자에 대한 지지와 비방이 화제의 첫머리에 오르듯 그때그때 변화무쌍한 세태에 대한 개탄이나 성토가 주류를 이룬다. 화제는 언제나 정해져 있는 것이 없다. 텔레비전 뉴스, 근거도 출처도 분명치 않은 유언비어들, 난무하는 소문들······. 어쩌다 성희롱이랄 농담까지. 이야깃거리는 늙은이들 제 마음대로였다.

“왜 그러나? 의료보험금을 올리면서 또 노인네들 핑계를 대? 스스로 구조조정 하거나 어쩌거나 해서 운영을 잘 해야지! 걸핏하면 노인요양비가 급증하니 어쩌고 한단 말이야.”

“그래! 정부도 심심하면 노인 인구가 증가 하네 어쩌네 하며 사회문제가 곧 노인문제인 것처럼 떠벌린단 말이야. 그게 난 못마땅해.”

“나도 노인복지가 어떻고 저떻고 하는 그 놈으 소리는 듣기 싫어!”

“늙은이들이 저들 동네 북인거야.”

의료보험, 노인복지 얘기가 지나가니까 야박한 세상인심에 때늦게 군대 생활 때 겪은 체험담으로 열을 올린다. 영감들에게는 심각하고 분하고 원통하고 복수심에 불타는 너무나 절박한 주제이더라도 조금도 그런 기색이 없다. 그런 것들이 그들에게 당도하여 입에 오르내리면 어느새 그것은 보통이고 재미없고 너무나 흔하고 평범하게 유치하게 변하고 만다. 아무리 문제성 있는 발언일지라도 느티나무 아래 영감들에게 이르면 그것은 부드럽고 안이하고 느리고 별로 가치가 없는 일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니 열심히 상대를 설득할 일도 없었고 내 주장을 핏대 올리며 내 세울 형편도 되지 못했다.

보통 화제의 물꼬는 욕지도 영감이 튼다. 욕지도 영감은 절대 자판기 커피를 마시는데 동참하지 않았다. 그는 아예 집에서 커피를 한 잔하고 나오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커피 값을 부담하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놈팡이 주제에. 그는 쉰이 넘도록 어부로 남해에서 동해로 제주도로 인천 앞바다까지 누비고 다녔던 사람이었다. 섬 욕지도가 고향으로 배타고 다니며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다가 결국 견디지 못하고 배 팔아 말을 샀는지 어떤지 모르겠지만, 느지막이 섬을 떠나 육지에 상륙해서 금성사 하청업체 선풍기, 냉장고 부속품을 만드는 공장에 취직을 했다. 창원에 있었던 그 공장은 나중에는 자동차나 중장비에 사용되는 유압파이프 만들었는데 그곳에서 십오 년이 넘게 일한 영감이었다. 그는 파이프의 녹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염산을 다루는 생산직으로 일했는데 처음에는 정식 사원이었으나 나이가 많아지자 일용직으로 내려 앉아 일했다. 그것도 65세가 되어 퇴직금조차 없이 그만두었는데 언제나 바다와 힘을 겨루던 얘기로 신명을 낸다.

그러면서 공장 얘기도 했는데 공장일은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러웠다고 엄살을 떨었다. 아니 사실이 그랬다. 공해로 찌들어 그 독한 염산 냄새가 얼마나 지독했던지 마스크를 하고서도 견디기 힘들었는데 건장한 젊은이나 중노동에 이력이 난 중년 신참이라도 입사하면 사나흘을 견디지 못해 공장에서 도망가 버리곤 했다고 한다.

“여름에는 공장 안은 완전히 찜통이지. 독한 가스와 냄새가 공장 주위에 새나가면 민원이 생긴다고 작업장은 완전 떼려 막아 놨다니까! 그리곤 환기를 하려고 황(팬)을 돌려 집진기로 뽑아냈지만 어디 그 놈의 독가스가 빠져 나가는가? 작업장 안에 언제든 가득 차 있지. 그러니 사람이 어디 버틸 수 있능가? 작업하면서 대형 선풍기를 여러 대 돌린다고. 바로 내 앞에 대형 선풍기가 다섯 대, 천장에도 선풍기가 매달려 있고 등 뒤에도 선풍기가 있었지. 그런데도 온통 땀범벅이었지. 마스크에 장갑에 작업안전모까지 중무장을 했으니 말이지. 그러다 하도 귀찮으면 마스크고 뭐고 벗어 던진다니까!”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그는 16여년을 버티어 냈으니 그의 몸이 온전할 리가 없었다. 욕지도에서 선원 생활을 청산하고 마산으로 나와 창원공단의 그 공장에 취직할 무렵 7, 80kg 나가던 거구가 요즘은 60kg을 겨우 넘는다고 한다. 그래도 산업재해 신청 한 번 하지 않았고 돈을 적게 받아도 일 시켜 주는 사장에게 고마워했다고 한다. 물론 노조가 없는 회사라 근무 환경에 대해 구시렁거리는 불만스런 말 한마디 못했다. 그저 주는 월급 고맙게 받았고 사장 말이라면 7, 8할은 곧이곧대로 들었다. 추석 설이면 다른 회사에서는 보너스네 떡값이네 하면서 봉투를 주는데 그것마저 없는 몰인정한 회사였다. 그래도 끽 소리 않고 모두들 일했다. 나이가 많아 나가야 한다는 부장 말에 욕지도 영감은 두 말 못하고 영대로 따랐다. 그게 나이 들면 당연한 것으로 받아 들였지만 수 년 전에 퇴직금을 정산했다면서 위로금 한 푼 주지 않고 월급만 달랑 주고 마는대도 그게 매정한 처사이고 수십 년 근무한 사람에게 너무 인정 메마른 짓이 아니냐고 하는 항의 한마디 하지 못하고 말았다. 아니 이제 그만두면 병원으로 직행해야 할 테니 산업재해로 혜택을 받을 수 있게 조처해 달라고 조르다가 제풀에 지치고 말았다. 그가 잘 알아듣지 못할 전문용어를 써 가면서 산업재해 신청을 해 줄 수 없다는 사장, 상무, 서기의 단호한 말에 토를 달며 대항하기에 그의 상식이나 배경은 힘이 벅찼다.

“그기 그런 기라. 세상 이치가 그렇지 뭐. 내가 돈 있고 공부 많이 해 똑똑했으면 어디 그런 공장에서 죽어라 일했겠소?”

그런 것이다. 욕지도 영감은 퇴사 후에는 체중은 푹푹 느는데 허리가 아파서, 어깨가 아파서 정형외과를 매일의 일과처럼 드나들며 효험도 없다면서 물리치료를 받거나 침을 맞고 살았다. 그저 바다 이야기만 나오면 신이 나게 어부 시절을 회상해댔다.

그의 맞상대는 박 영감이다. 박 영감도 한일합섬에, 삼미특수강에서 죽어라 근무하다 끝이 난 인생이었다. 그는 갑상선 이상으로 여러 해째 고생을 하고 있었다. 그 바람에 눈이 툭 불거지고 몸이 바짝 말랐다. 마산 창원 이곳저곳 용하다는 병원 안 다닌 곳이 없다. 지금은 한 달에 한 번 쯤 종착역 부산의 대학병원까지 가서 약을 지어다 먹는다. 박 영감은 매일 수 십리 길을 걷는다. 그게 운동이다. 한 곳에 가만히 앉아 있지를 못하고 이리 기웃 저리 기웃거리며 돌아다닌다. 이름이 지워져버린 작은 도시의 역 광장에 노인네들이 많이 몰려 나와 노는데 거기도 잠간 들리지만 오래 머물지 않는다. 무료급식소 앞에 모여드는 그들이 아귀(餓鬼)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간혹 교회, 구호단체에서 커피나 라면을 나누어주는 때도 있는데 줄 서 있는 후줄근한 차림의 사람들을 보노라면 그 자신도 맥이 빠졌다. 그래서 더더욱 꼴 보기 싫어 잠시 머물다가 자리를 떴다. 정처 없이 떠도는 나그네처럼 건강 유지를 위해서 하는 걷기운동이 아니라 방황이나 다름없는 박 영감의 행보에 욕지도 영감은 그걸 비꼰다.

“오늘도 돈을 좀 주웠나? 돈이 길에 떨어져 펄펄 날던가?”

“그라지 말고 영감이 날 따라 다니면 돼. 큰돈은 다 양보해 줄 테니. 지금 당장 날 따라 어시장에 안 가려나? 거기 돈이 길에 쫙 깔렸다니까. 히히히!”

“박 영감은 푼돈 주워 모갯돈 만들었제? 그래서 그 무슨 차고? 태풍이 불면 홱 날아갈 쪼깨만한 그 차 샀제?”

박 영감의 소형차는 시집간 딸이 사 준 것임을 뻔히 알면서도 욕지도 영감은 우격다짐으로 비꼰다.

두 사람의 수작에 입맛을 다시며 담배를 피워 무는 이 사장은 과묵하기가 이를 데 없다. 남아일언중천금을 그대로 증명이라도 해 보겠다는 자세로 여러 사람이 중구난방 떠들거나 격론이 벌어져도 말이 없었다. 넙죽하고 큰 입은 한 일자 다물어져 더 길어 보였다.

이 사장이 그렇게 된 것은 병이 들었기 때문이다. 철근 공사를 도급받아 일하는 사람이라 사장이란 소릴 들으며 살았는데 3년 전 중풍이 오는 바람에 다리도 팔도 힘이 빠져버려 반거충이가 돼버렸다. 이 사장은 별로 말이 없다. 3년을 병치레로 돈을 벌지 못하고 보내니 그 동안 모아 두었던 돈은 꼬치에서 곶감 빼 먹듯 솔솔 빼먹는 판이었다. 보다 못해 아내가 나서서 창녕, 고성 동서남북을 불문하고 양파나 감자 캐는 들일, 홍합, 굴 까는 작업장, 병원의 청소부로 부지런히 일하러 다니며 생활비를 벌고 있었다. 아내가 새벽 6시경이면 일하러 나가는데 그때쯤 밥상을 차리고 아침밥을 먹는데 통 입맛이 없어 두어 숟갈 들었다 놓으면 점심이고 저녁이고 그가 손수 찾아 먹어야 했다. 그는 팔 다리에 힘이 없으니 동사무소에 가면 늙은이들을 위해 만들어 주는 희망근로사업, 마을 청소 일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2,500원 짜리 담배는 이틀에 한 갑이었다. 아니 어떤 날은 하루를 넘기지 못했다.

“중풍으로 병원에 들락거리며 약을 타 먹는 사람이 담배를 피우다니!”

하면서 담배를 끊어야 된다고 열심히 말리는 배 사장이 있어 이 사장은 영 성가시다. 말이야 옳지만 담배를 안 피우니 심심해서 죽을 맛이라고 구시렁거린다. 배 사장은 전에 이 근처 시장에서 빵집을 했던 사람으로 이제는 장사도 접고 사위가 하는 재활용센터 점포에 나가 잔손을 거드는 형편이었다. 그는 일요일이면 교회에 나가는 독실한 신자다. 그러니 그 옆에서 누구나 담배를 피우는 것은 용납을 못한다. 이 사장도 그걸 아니까 담배를 피우려면 아예 느티나무 곁 의자에서 일어나 멀찍이 배 사장이 보이지 않는 곳에 가서 한 개비 물곤 한다. 그러면서 한 마디 구시렁거린다.

“빵집을 할 때는 교회도 잘 나가지 않던 사람이 무신 놈으 잔소리고? 남이사 담배를 풋든지 말든지······.”

빵집 배 사장은 한때 도심에서 뚝 떨어진 진동면 한적한 마을에 빵공장을 차린 적이 있었다. 그는 불법적인 영업은 꿈도 꾸지 않았다. 제대로 집도 짓고 기계도 갖추고 정식 허가를 내 영업을 하려고 준비를 했다. 그래서 공장 건물도 돈을 들려서 적법하게 신축하였고 이것저것 빵을 생산하기 위한 시설이나 기계설비들도 기준에 맞게 들여 놓고 허가절차를 밟았다. 하지만 예상 밖으로 하도 걸리는 게 많고 준비할 게 많았다. 거기다 담당 공무원이 까탈을 하도 부려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물론 두툼한 봉투를 찔러 넣어주면 단번에 허가가 나리라 예상을 하였지만 그는 예수쟁이 양심이랄까 그런 순진한 고집으로 버티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빚도 지고 손해가 막심했지만 어디다 항의하고 하소연할 자리조차 없었다.

이 느티나무가 있는 골목 곁에는 상설시장이란 이름을 건 장마당 건물이 있는데 그 길목에 빵집을 차리면서 빵공장 사업은 접어야 했다.

그런데 몇 년 지나지 않아 시장골목 빵가게도 문을 닫아야 했다. 삼랑진에서 진주로 가는 경전선 철로가 무슨 복선 전철이 된다면서 시장건물 한복판을 잘라버리면서 노선이 지나가니 점포를 철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상설시장 건물 반쪽이 날아가면서 동시에 그 옆에 붙은 그의 빵집도 사라져 버렸다. 보상금을 얼만가 받기는 받았지만 시내 어디 가서 다시 빵집을 차리기에는 턱도 없이 부족했다. 결국 그는 실업자가 되었고 아내는 이 사장 부인처럼 병원 청소부로 나가고 있다. 그는 아침이면 낡고 작은 승용차로 아내를 병원까지 실어다 주는 게 하루 일과의 시작이요 끝이었다. 그 다음은 갈 곳이 마땅찮았다. 집은 내서면 중리였지만 예전 활동무대가 서마산시장 일대였으니 자연히 차를 끌고 와서 팔자가 비슷한 김영감이나 이 사장, 배씨 등과 어울리기 마련이었다. 그는 생활에 여유가 조금 있어 자주 점심을 샀다. 점심이라야 2500원짜리 국수, 3000원짜리 칼국수였다. 어쩌다 박 선생이 끼이면 5000원짜리 보리밥 뷔페를 먹으러 가는데 그때는 박 선생과 이 사장이 나누어 밥값을 치렀다. 나이로 따지면 제일 젊었을 배씨는 배 사장과 동향이다. 다 같이 산청 사람이었다. 그래서 서로 이심전심 걱정거리는 나누고 기쁨은 함께하려 한다.

아내가 2, 3년 전 죽고 홀아비인 배씨는 얼굴이 새까맣다. 돋아난 검버섯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마 간이 나빠서 그럴 거라고 주위에서는 짐작을 하지만 아무도 그걸 내색 않았다. 그는 환갑을 갓 지내 이 느티나무 쉼터에선 중늙은이 취급을 받는다. 그는 지금 실업수당을 한 달에 80만원 쯤 받고 있었다. 실업수당을 받으려니 노동청인가 취업안내소인가 뭔가 들락거리며 취업을 위해 여기저기 업체에 돌아다녔다는 확인 사인이나 도장도 받아 제출해야하고 그런다. 실직을 한 지 몇 달이 지났으니 그것도 끊길 형편이다. 그래서 취업안내 벽보를 보고 찾아 간 곳이 스티로폼 공장이었다.

사실 구직을 위한 활동이니 도장이나 받으려고 공장을 찾았는데,

“당장 일하실 수 있소? 오후부터 일하면 하루 일당을 드릴 테니 오늘 당장 일하세요.”

하고 사장이란 사내가 그를 붙잡았다. 일당이야 고하간에 당장 일하라고 붙드는데 뿌리칠 수가 없었다. 적당한 핑계를 대고 돌아서면 그만일 텐데 배씨는 주저주저하는 사이에 현장 담당에게 이끌려 작업장으로 가고 말았다. 그가 할 일이란 단순 노동일 것이 틀림없을 테니 무슨 기술이 필요할 것인가? 기술자 뒤따라 다니며 이것 해라 하면 하고 저것 가져와라 하면 가져다주고 그걸 것이라 생각했다. 바로 그의 예측대로 이기는 했는데······그게 아니었다. 복병은 바로 무서운 무더위였다. 장마철이 끝나가는 7월 하순 오후였으니 공장 마당에는 불볕더위가 쏟아져 돼지 갈비 굽는 불판처럼 활활 달아올라 있었다.

그런데 그가 할 일은 스티로폼을 생산해 내면서 규격이나 형태가 잘못돼 불량품으로 판정을 받은 것들을 공장안에서 마당으로 운반해 내거나 아니면 마당에서 햇볕에 말린 불량품을 파쇄 하는 기계 앞으로 옮겨야 했다. 스티로폼이 가볍기도 하지만 몇 장을 겹쳐 들면 그것도 무게가 나갔다. 거기다 크기가 3자☓6자 아니면 4자☓8자로 커서 취급하기도 곤란스러웠다. 하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라 더위가 더 큰 문제였다. 공장 안과 마당을 몇 번 들락거리며 불량 스티로폼을 운반했더니 그만 온 몸이 땀범벅이 되고 말았다. 식수가 있어 마셨더니 미지근한 것이 영 마음에 차지 않았다.

겨우 반나절 일하고 나가지 않는다는 게 마음에 걸려 이튿날 출근을 했다. 역시 폭염이 계속되는데 작업은 어제나 다름없었다. 불량품이 쏟아져 나오면 마당으로 날라서 볕에 건조시키고 일단 건조된 것들은 주워 모아서 파쇄기 앞으로 져다 날랐다. 무게는 별로 나가지 않는 게 규격을 커서 다루기에 애를 먹였다. 반복되는 단순 노동에 피로가 너무 쉽게 오는 것이었다. 제품을 만드는 직원이나 파쇄기를 돌리는 직원 앞에는 커다란 선풍기가 돌고 있어 시원했지만 그가 나다니는 통로나 마당에는 35, 6도가 아니라 40도가 넘는 살인적인 볕만 내려쬐였다. 그는 퇴근을 하면서 몸이 아파 한 사나흘은 쉬어야겠다고 말하면서 뺑소니치 듯 공장을 빠져 나왔다.

“일 안하다가 일을 해서 그런 거야. 날씨가 좀 더웠어야지. 하필 그런 날 일을 시작했으니…….”

“얼굴이 많이 상했어.”

이 사장과 김영감이 안쓰러워했지만 배씨는 하루하고 반나절 작업에 몸이 말을 듣지 않아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예전 같으면 그깟 일쯤이야 쉽게 견디어 냈을 것인데 말이다.

“인자 나도 몸이 절딴 났는가 봐요. 그걸 이겨내지 못하다니!”

그는 사흘을 꼬박 누었다 앉았다 병원에 가서 피로회복에 좋다는 주사까지 맞았지만 쉽게 피로가 풀리지 않았다.

“그런데 이놈으 재개발은 할 끼가? 말 끼가? 내 골치가 아파서!”

김영감이 운을 떼는 재개발사업은 몇 년 전 시의원을 지낸 사람이 들고 나서서 이 일대의 허름한 집들을 뭉개고 30층짜리 고층 아파트를 열 채나 짓겠다는 야심찬 호언장담에서 시작이 되었다. 그 바람에 주민들이 인감증명을 7통씩 떼 주며 동의서에 인감도장을 찍고 어쩌고 해서 재개발조합도 구성되고 재개발의 청사진도 마련되어 뭐가 잘 되어 가는 듯했다. 그런데 조합장을 맡았던 사람이 주민을 위해 희생 봉사를 하겠다는 처음 했던 말과는 달리 제 사리사욕을 채우려는 그런 야심이 발동됐던지 어땠는지 함께 일을 하던 임원, 간부들끼리 내분이 일어나더니 드디어 서로 검찰에 고발하고 명예훼손으로 누군가 벌금형을 받고 하는 소용돌이가 휘몰아 쳤고 재개발사업은 중도에 멈춰서버렸다.

재개발사업 시행회사는 대기업 건설사였는데 처음에는 무이자로 수십억을 대주고 일이 잘 되도록 했는데 전국적으로 불어 닥친 부동산 불경기에 그 쪽에서 한 손을 놓고 숨고르기에 들어가니 재개발은 점점 일이 꼬여 하수상한 시절을 맞고 말았다. 임원이나 추진위원들은 어느 쪽이 잘했느니 못했느니 싸움이 벌어지고 그 판가름은 법정에서 하게 되었겠다. 무고하고 법도 잘 모르고 일의 추이도 아리송한 주민들만 허허벌판에 내동댕이쳐 진 고아 신세가 되어 목을 빼고,

“제발 재개발 일이 하루속히 추진되어야제. 이때껏 쓴 돈이 2~3십억은 된다던데 그걸 고스란히 주민들이 물어내야 한다는구먼.”

김영감은 잔뜩 겁에 질린 목소리였고, 답답하기는 다 마찬가지인 늙은이들이라 뾰족한 해결책을 들고 나타날 사람이 기존 추진위 사람들인가, 부정을 폭로하다 명예훼손으로 벌금을 물은 정상화 추진위원회 사람들인가 가늠하기에 힘이 달리는 것이었다.

“난 보상금 받고 나갈 사람이야. 어느 쪽이 하던 간에 일을 빨리 추진하는 편에 힘을 실어줘야지.”

박 선생의 말에 김영감도 공감한다는 듯,

“정말 그렇다니까! 막상 재개발에 찬성한다고 도장을 찍었지만 조그만 오두맥이 열 평도 안 되는 터에 사는 노인네들이야 서른 평 아파트를 어떻게 분양받을 끼고? 그냥 잘 살고 있던 제 집만 빼앗기는 거지. 오도 갈 데 없는 사람들 위해 임대아파트를 짓는다꼬 했지만 당장 월 10만원도 벌기 힘든 노인네들이 수십만 원이 될 관리비에 임대료는 어떻게 낼 것이며……. 아이고! 생각만 해도 기가 막히네.”

하고 동리 인심 돌아가는 걸 얘기했다. 느티나무 아래 모여든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문제점이라 그 소리에 고개만 주억거릴 뿐 반발도 찬성도 없었다. 모두 앞으로 되어 질 일에 대해서 전망은 어둡고 비관적인데도 그리 크게 성내지도 화를 내지 못했다. 물론 분풀이할 데도 없었다.

박 선생은 제 형편을 여럿에게 떠들지 않았지만 그 역시 낭패감은 다른 이들과 똑 같았다. 그는 삼십 여년 공직에서 일하다 정년퇴직을 해 매월 통장에 입금되는 연금으로 살고 있었다. 그런데 퇴직 당시 장래 예측을 서툴게 하는 바람에 현재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퇴직 당시 현금을 많이 받으려고 연금을 조금만 받겠다고 신청했더니 이제 와서야 보니 매월 나오는 돈이 내외 둘이서 쓰기에도 너무나 여유가 없고 빡빡해 목돈이 들 일이 생기면 마음이 졸렸다. 그러니 부부가 항상 절약 절약하며 돈쓰기에 신경을 써야하니 넉넉한 사람살이를 잊은 지 오래였다. 청첩장 한 장 오면 그게 겁이 나고, 친구 만나 점심 한 끼 사는 게 열두 번도 더 마음속으로 재보아야 되니 편안하고 안락한 노후는 포기한 지 오래였다.

재개발도 박 선생에게는 너무나 버거운 존재였다. 처음 재개발을 한다고 했을 때는 낭만적이고 낙천적인 생각으로 찬성한다고 도장을 찍어 주었지만 그 후에 되어가는 꼴을 보니 30평짜리 아파트 한 채도 분양받기에 힘이 부친다는 걸 점차 깨닫게 된 것이었다.

“지금 내가 사는 주택 시세가 고작 5, 6천만 원인데 새로 짓는 아파트는 최저 작은 형의 평수가 30평이고 평당 분양가가 500만원이면 그게 1억 5천만 원짜리인 거라. 솔직히 말해 내가 지금 현직에 있어 수입이 있으면 은행융자금 떠안고 분양을 받아볼 욕심을 내겠지만 내가 백수 아니오? 아이들 용돈 좀 안주나? 하고 넘어다보고 있는 주제에······. 아이들이 모자라는 분양대금을 감당해 주겠소? 그러니 포기해야지.”

“정말 그래, 자식들이 대부금을 감당해 준다면야·······. 어디 자식들 제 살기에도 허덕이는데 그럴 수야 없지. 보상금 받아 지금 사는 집보다 작더라도 그런 걸 구해서 이사 가는 수밖에!”

세상일이란 그런 것이다. 정상적으로 매월 들어오는 돈이 없으면 만사를 포기해야 하는 것이다.

배씨는 오후 대여섯 시가 되면 술 생각이 간절한 지 이 사람 저 사람 붙들고 은근 슬쩍 유혹한다. 그러나 모두들 냉담하다.

“욕 영감! 갑시다. 가요.”

“어어! 난 생각 없는데·····.”

욕지도 영감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다. 그는 술값 내기도 싫고 그렇다고 날마다 공술을 얻어먹는 것도 자존심 문제라 아예 설레발을 친다. 그러면 중풍이 들어 절대 금주 금연을 해야 할 이 사장에게 시선을 보낸다.

“이 사장, 내 따라 갑시다. 요새 막걸리 인기가 있잖소? 젊은 놈들 막걸리 앞에 놓고 맥주 양주 마시는 기분 낸다 카던데요? 우리도 그래 봅시다.”

“아! 그래! 예전에는 막걸리를 밀가루로 맨들어서 영 맛이 없더니만 요새는 그게 쌀 술이라 그런지 제법 먹을 만하데. 인자 소주 장사 잘 안될 거 아니야? 참 왕년에 소주 많이 마셨는데······.”

이 사장은 배씨의 말에 엉뚱하게 막걸리 예찬으로 맞받으며 술 마실 생각이 없는 듯 한 표정이 된다. 술을 못 먹는다고 선언한 갑상선 박 영감이나 기독교인 배 사장이야 당연히 제외되지만 샌님티를 내는 박 선생이나 건강이 안 좋아 금주를 하는 김영감도 고개를 내어 젓는다. 그러고 보면 중풍으로 절대 금주를 해야 할 이 사장이 배씨에게 손목 잡혀 근처 시장으로 간다. 이 사장은 끌려가면서도 비죽비죽 웃다가 말다가 배씨의 간청을 딱 거절하지 못하는 우유부단을 보인다. 원래 성격이 좋은 것인지 중풍으로 판단력이나 결단력이 손상을 입었는지 모르는 이 사장을 아무도 잡지 않고 버려둔다.

막걸리 한 병에 부침개 안주 한 접시 시켜 놓고 앉으면 중풍 든 이 사장은 한 잔이고 나머지는 배씨의 몫이다.

 

멍석만한 그늘을 따라 다니다 더 햇볕을 피할 곳이 없어 자기 집으로 피신을 했던 늙은이들이 다시 모여 들기는 오후 대, 여섯시쯤이었다. 그랬다가 다시 저녁밥 한 술 뜨고 느티나무 아래로 갈 곳 없는 영감들이 모여들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헤어지고 만다. 모기 때문에 더 버틸 수가 없었다. 이제 그들이 갈 곳이라곤 제 집 밖에 없었다. 그래서 자의반 타의반 집으로 돌아간다. 그러면 느티나무 아래는 맥주 캔을 든 젊은이들이 모여든다. 치킨을 배달시켜 잔치를 벌이고······. 그 이튿날 아침이면 또 그곳은 쓰레기장을 방불케 하는데 청소 담당은 역시 늙은이들이다. ***

(마산문학 2010, 제34집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