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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군지명사/남지읍

지명유래 / 남지읍 아지리

by 남전 南田 2012. 5. 13.

 

경남 창녕군 남지읍 아지리 지명 유래를 올립니다.

 

 

아지 마을 앞의 서낭나무

7. 아지리(阿支里)

 

남지읍의 남부 옛 도사면의 지역이 영산현 소속인데 비해 북부인 남곡면은 창녕현의 소속이었다. 따라서 아지리(阿支里)는 본래 창녕현 남곡면의 땅으로 조선 정조 때(1789년)의 기록으로 각 방·면의 인구와 호수를 기록한 책인 『호구총수』에 본남곡촌(本南谷村)과 아지촌(阿枝村)으로 나뉘어 기록되어 있다.

 

 

이곳을 본남곡촌이라 기록하였던 것은 남곡면의 소재지가 이곳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남쪽의 골짜기이므로 앞실이라 불리었고, 앞은 곧, 전(前)이며 방위로는 남(南)이니 ‘남’의 고훈(古訓)은 「앏」이다. 그래서 앞실을 남곡(南谷)으로 기사하였으니「谷」의 고훈이「실」이니 그 차자로는 「谷, 室, 士」등이 있으니 앞쪽 골짜기, 또는 앞쪽에 있는 고을, 마을이란 뜻이 되는 것이다.

법정 리 명칭인 아지리는 지금의 창아지를 『호구총수』에서 아지촌이라 한 것에서 왔다. 산으로 앞이 가려있는 동리라 하여 아까리라 부르던 것을 「아지」로 차자한 것인데 앞실 아까리가 서로 그 음이 비슷하므로 조선조 말에 본남곡촌과 아지촌이 합해지면서 이동명이 아지리로 된 것이다.

아지는 앞실의 음훈차로 보는데 「앞」을 언덕 아(阿)로 썼고, 「실」은 골(谷)의 훈이니 이것이 산의 뜻으로 변하여 「支」를 사용, 고개[峴], 티(峙)의 차자로 쓰면서 높은 지대를 나타낸 「池, 旨, 遲」와 같은 뜻으로 쓰인 것이니 역시 앞마을이란 뜻은 변하지 않았다 할 것이다.

「阿」는 상징적인 의미로도 쓰였는데, 인체에는 대개 여자의 봉곳한 젖가슴이나 둔부, 음부의 도톰한 부위를 연상시키는 곳을 지칭하였다. 아지리의 북쪽에 있는 산이 옥녀봉으로 이 산이 옥녀탄금형(玉女彈琴形)이라 하여 산이 둥글어 여자의 둥글고 부드러운 선을 가진 것에서 연유되었으니 마찬가지로 아지리의 「阿」도 다분히 옥녀봉과 연관된 지명이라 추정된다.

앞실은 남곡이라 씀에 따라 남리(南里), 본남리(本南里), 본아지(本阿支)등으로도 쓰였다.

본아지라 쓰인 것은 아지의 본마을 이란 뜻이다. 700여년 전에는 마을 앞의 늪을 용이 등천하였다 하여 용강(龍江)이라 불리는데 그 용강에 오리들이 많이 날아오므로 압실(鴨室)이라 하였다고도 한다. 그러나 이는 마을 이름을 미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아지리는 남지읍의 중부로 리 전체가 읍의 중부에 위치하고 있어 그 동서의 길이가 4km이다. 행정 리는 2개 리로 아지와 창아지가 있다.

 

아지 마을 전경

 

 

◉ 7-1 아지(阿支)

 

아지리의 동부로 남지쪽에서 성사고개를 넘으면 바로 아래에 있는 마을로 압실, 앞실의 행정 리 명이다. 마을 남쪽에 둘레 두 아름되는 큰 정자나무가 1043번 지방도 도로변에 있다. 전에는 51호였는데 지금은 34호가 살고 있다.

 

◎ 앞실[鴨室]

앞에 있는 골짜기, 마을이라 하여 앞실이라 하였는데 남곡(南谷) 또는 아지로 기사되었다.

앞실이 남곡으로 기사된 것을 「南」의 훈이 남녁[午方], 금[金名]외에 앞[前也]이기도 하므로 「南」자가 쓰였으며, 「谷」은 실, 담에 흔히 사용된 글자이다.

그런데 오리가 많이 날라 온다 하여 압실(鴨室)로도 쓰였다 하나 부회일 뿐이며 원래 뜻과는 거리가 멀다 할 것이다.

 

◎ 정자땀

아지 마을 남쪽 정자나무가 있는 옆에 몇 집이 있는 뜸이다.

 

◎ 법석껄

마을 동쪽 지방도 곁의 뜸으로 3, 4호가 살았다. 아마 동리 초입으로 장승, 벅수가 서 있었던 듯하며 벅수거리가 법석껄로 변한듯하다.

 

◆ 절골[寺谷]

전에 절이 있었던 골짜기이므로 절골이라 부른다. 아지 동쪽, 성사고개 아래에 있는 골짜기이다. 이곳은 뽕나무밭[桑田]으로 개간되었으며, 아지소류지(절골저수지)가 위에 있다. 전에 마을이 있엇다 한다.

 

◆ 새마

절골 안에 있었던 뜸으로 전에 5집이 살았으나 지금은 1호뿐이다.

 

◆ 둔터골

도둑골이라 하기도 하는데 아지에서 성사로 넘어가는 성사고개 동편의 골짜기로 예전에 성사고개를 넘어가는 행인을 노려 도둑들이 은거하였다 한다. 둔터는 흔히 군대가 주둔했던 곳을 이르는 말이다. 이 일대를 뽕나무밭으로 개간하여 잠실이 있었는데 최근에는 축산 농가가 몇 집 있다.

이 골짜기 동편으로 길이 있어 고개를 넘으면 장마면 대야로 간다.

 

◆ 조산분(造山墳)

법석껄에 있는 돌무더기 무덤이다. 아지리 216-1번지에 있는 조산으로 예전에는 이곳에 깊은 우물이 있었는데 어느 해 불행하였던 마을의 처녀가 이 우물에 몸을 던져 자살을 하였다. 그 후 우물을 묻어 산처럼 만들었고, 처녀의 원혼을 달래 주는 동신제를 매년 지낸다고 한다.

 

◆ 앞실 : 서쪽 옥녀봉의 남쪽 골짜기로 입구에 아지마을이 있다. 옥녀봉까지 마을 안쪽을 골안[谷內]이라 부른다.

 

◆ 각골

도둑골 북쪽 골짜기로 장마면 대봉리로 넘어가는데 아지마을의 동쪽이다.

 

◆ 신전 뒷고개

아지 마을 남쪽 아지못에서 우실등을 거쳐 신전 마을 뒤로 가는 고개가 신전뒷고개이다. 지금은 고갯길의 흔적만이 남아있다.

 

 

◆ 영아지고개

남쪽 절골에서 서쪽으로 긴 골짜기를 경유하여 영아지로 가는 고갯길이다.

 

◆ 옥녀봉(玉女峰)

아지 마을의 서북쪽에 높이 솟은 봉우리로 산의 모습이 둥글고 부드러우므로 마치 여인의 고운 자태와 같다 한다. 여인이 거문고를 타고 있는 산이라 하여 옥녀탄금형(玉女彈琴形)이라 한데서 산 이름을 옥녀봉이라 하였다. 높이는 206m이다.

측량 기준 표석이 산 정상에 있다. 또 등이 큰 산이므로 큰등 만댕이라고도 불린다.

 

◆ 아까리고개

아지에서 서쪽으로 큰등 만댕이 넘어 창아지로 가는 고개이다. 앞실에 있기 때문에 앞실고개라 불리기도 한다. 아까리는 앞을 가렸다는 뜻이다.

 

◆ 산박꿈고개

아라 마을에서 북쪽 산박굼 뜸으로 가는 고개인데 아까리고개 중턱에서 세 갈레 길로 갈라진다.

 

◆ 도둑골

산빠꿈 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고곡- 창아지 간의 길목이다.

 

◆ 골안[谷內]

아지 마을 안에 있는 골짜기를 골안이라 부른다. 옥녀봉 아래 계곡이다.

 

◆ 가락등

옥녀봉의 산줄기로 가락처럼 가늘게 생겼다 하여 가락등일 부른다.

 

◆ 각골

아지 동쪽 장마면과 경계사 되는 산이 가파르다고 각골이라 하였다. 또 갓골이라 불리는데 동네 가에 있으므로 갓골이라 했다고 한다.

 

 

◆ 성사곡[阿支峴]

아지 남쪽에서 성사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므로 성사고개, 아지의 고개이므로 앞실고개, 아지고개로도 불린다. 예전부터 혼사 일이 있을 때 이 고개를 넘으면 일이 틀어져서 성사가 잘 되지 않은다는 속설이 있어 아지 사람들은 혼사 일로는 이 고개를 넘지 않았다 한다.

이 고개는 예전에는 넘기 힘든 분수령과 같아서 이 고개를 기준으로 하여 흔히 남지 사람들은 고곡지구를 ‘산너메’라 부른다.

 

◆ 장고개

아지리에서 동쪽 장마면 대봉리로 넘어가는 고개인데 예전에 아지사람들이 영산장에 가려면 이 고개를 넘어야 하였으므로 장고개라 불리었다 한다. 지금은 고갯길이 사라졌다.

 

◆ 어봉고개[漁鳳峴]

아지리에서 동쪽으로 장마면 대봉리 어봉으로 넘어가는 고개인데 장고개의 남쪽에 있다. 6·25전쟁 때 이곳에서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

 

◆ 용갱이[龍江]

아지 마을 동편에 있는 들이다. 이곳 내에서 용이 등천을 하였다 하여 용강이라 불린 것이 「강 +이」 형이 되어 용갱이라 부른다. 전에는 늪이어서 흔히 눞논이라 불린다.

절골에서 흘러내리는 냇가에 옛날에는 깊은 소(沼)가 있었는데 이곳에 수백 년 묵은 용이 살고 있었다 한다. 사람들이 항상 이 용에게 농사가 잘되게 제사를 지내며 순풍순우를 빌었는데 그 정성이 지극하였다. 용의 덕으로 매년 농사가 잘되었는데 드디어 용이 등천을 하게 되었다. 용이 등천을 하면서도 동민들의 정성을 고마워하여 앞으로 풍년이 들도록 이 들에 물이 풍부하리라 하였다. 따라서 용이 보낸 강이 들의 안쪽을 흐른다하여 용갱이들이라 한다.

들의 안쪽을 안용갱이들이라 하는데 아지마을 동쪽 들이며, 용갱이들의 바깥쪽 들을 밖용갱이들이라 구분하여 부른다.

 

◆ 우수들[牛首野]

아지 마을 앞 정자나무 주변의 들을 말하는데 남쪽 편에 있는 산이 우슬봉이니 이곳은 소머리에 해당된다 하여 우수들이라 한 것이다.

 

창아지 마을 전경

 

 

◉ 7-2 창아지(昌阿支)

 

『호구총수』에 나오는 아지촌(阿枝村)이다. 아지리의 서부로 낙동강변을 낀 골짜기에 있는 마을인데, 창녕의 아까리라 하여 행정 리 명칭으로 창아지(昌阿支)가 되었는데 이것은 남쪽에 있는 마을 영아지로 구분키 위해 붙이어졌다.

남호정(南湖亭 : 연안 車三道 건립), 망모재(望慕齋: 연안차씨 봉선소) 등이 있다.

 

◎ 창녕 아까리[昌阿支]

마을 남쪽이 산으로 앞이 가려 있다 하여 아까리라 하였다 한다. 아까리는 이곳 외에도 남쪽 편에도 있어 이곳은 창녕현의 아까리라 하여 창아지, 남쪽의 아까리는 영산현의 아까리이므로 영아지라 하였다.

아까리가 산비탈, 산기슭의 뜻이 있는 언덕 아(阿)자와 막다의 뜻이 있는 가를 지(支)자를 사용하여 아지로 기사되었으니, 뒤에 아지리의 법정리 이름으로 사용된 것이다.

 

◎ 응달[陰村]

창아지의 남쪽 뜸으로 음지쪽에 인가가 있으므로 응달, 음촌이라 한다. 전에는 5여호가 살았으나 지금은 3호가 있다.

 

◎ 산바꿈[山外沼]

아지 마을의 서쪽 산 너머에 있는 마을이라 산 밖의 굼이라 부른 것이 산바꿈이 되었다. 굼은 지대가 낮아 물이 항상 괴는 저지대를 말하는데 한자로 표기되면서 못, 늪 소(沼)로 되어 산외소로 쓴다.

전에는 5여호가 살았는데 지금은 2호 뿐이다. 이 뜸 북쪽에 큰 은행나무가 있다.

 

◆ 당산걸

마을 뒷산 정산에 당산나무가 서 있는 곳이다.

 

◆ 장승걸

앞실골로 가는 길에 장승이 섰던 거리인데 예전에 장승을 세우고 마을의 안녕을 빌었다고 한다.

 

 

◆ 개비리[川落]

영아지를 가는 남쪽의 뜸을 개비리, 천락이라 부른다. ‘개’는 곧 ‘浦’이며 ‘비리’는 벼랑, 절벽의 이곳 토박이말로 창아지에서 남지장을 가려면 영아지를 거쳐 남쪽으로 용산리에 이르는 강변의 길이 험한 절벽길이라 불리어진 지명이다. 한자로 천락이라 기사하였으니 강가 벼랑이란 뜻이 드러난다.

 

◆ 서답비리

낙동강변 너럭바위가 있는 곳인데 마을의 옛 빨래터였으며 용왕(제)를 비는 곳이기도 하였다.

 

◆ 창아지 나루

창아지 마을 서쪽 앞에 낙동강을 건너는 나루이다. 이 나루는 의령군 지정면 성산리 상촌과 통하는데 예전에 창녕에서 의령쪽으로 갈 때 이리로도 갔다 한다.

지금은 행인이 없어 이름만이 남아 있다.

 

◆ 아까리고개

창아지에서 동쪽으로 큰등만댕이 산을 넘어 아지로 가는 고개이다. 앞실로 가기 때문에 앞실고개로도 불린다.

 

◆ 산박굼고개

아까리고개 북쪽으로 갈라지는 고갯길로 산박굼으로 통한다.

 

◆ 동박골

창아지 마을 동편에 있는 골짜기로 큰등만댕이(옥녀봉)에서 서쪽으로 낙동강에 이른다. 북쪽 골짜기에는 아지로 가는 길이 있었다.

 

◆ 깐치등고개

창아지 동박골로 내려가는 고개를 깐치등고개라 부른다. 이 일대 산모양이 까치처럼 생겼다 한다.

 

◆ 장등(長嶝)

일명 속등이라고도 하는데, 창아지 마을 동편으로 큰등만댕이에서 뻗어 내려온 긴 산등성이므로 장등이라 한다. 파평 윤씨의 선대 묘소가 길게 자리 잡고 있다.

 

◆ 창아지고개(昌阿支峴)

창아지에서 남쪽으로 영아지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한다. 음촌의 동편 산 위로 지난다.

 

◆ 장구덤[蠶頭山]

가락등 서편 산바꿈 북쪽에 있는 산으로 마치 장구처럼 생긴 덤이므로 장구덤이라 한다. 또 누에가 밥을 먹고 있는 형상이라 하여 누에머리산이란 뜻으로 잠두산으로 쓰는데 장구덤은 잠두산의 와전이라 한다. 이 일대는 명당으로 머리부분과 꼬리 부분에 묘를 쓰면 후손이 발복한다는 설이 전해온다.

 

◆ 들말리

창아지 서편에 있는 들을 말한다. 요즘 비닐하우스가 가득하다.

 

* 다음은 남지읍 고곡리 지명유래를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