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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군지명사/남지읍

지명유래 / 남지읍 고곡리

by 남전 南田 2012. 5. 13.

 

 

경남 창녕군 남지읍 고곡리 지명유래를 올립니다.

 

 

홍의장군 곽재우와 의병들의 근거지이고 격전지인 고곡산성(앞)과 구진산성(뒤 높은 산)

 

8. 고곡리(鼓谷里)

 

고곡리(鼓谷里)는 본래 창녕현의 땅으로 남곡면 고곡촌과 두곡촌으로 있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고곡촌과 두곡촌이 합하여졌고 인근의 자연 마을인 내곡, 구평, 살구징, 밤밭골 등이 포함되어 있다.

지금은 옛 남곡면의 관할지역의 민원업무 처리를 위하여 설치된 고곡출장소가 소재한 지역으로 면 소재지와 다름없는 발전을 하였다. 농협과 우체국, 지서, 남곡중학교, 오랜 역사를 지닌 남곡국민학교 등 기관들이 있으며 1954년에는 고곡시장이 허가되어 장이 섰는데 개시일은 1일, 6일이었으나 지금은 폐시되었다.

 

고곡리는 북실이라 불린 마을이름의 기사(記寫)로 마을이 있는 골짜기가 북처럼 생겼다 한다. 그러나 이 근처 마을 이름이 북실 뿐만 아니라 아지리의 ‘앞실’ 두곡의 ‘머리실’ 등과 연결하여 보면 ‘북실’은 그 마을의 위치가 앞실이나 머리실보다 북쪽에 있으므로 북실(北-) 이라 불린 것이 아닌가 한다. 지형이 북(鼓)처럼 생겼다고 하나 그보다 앞실에 비해 북쪽 골짜기에 잇는 마을이므로 북실이라 불린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옛 지명은 남곡면의 진산 격인 효자암산이 있다.

이곳은 고곡산성과 구진산성 등 2개의 산성과 임진왜란 때 의병의 훈련소라 기록되어 있는 월송정 등 전적지가 있는 역사적으로도 널리 알려진 곳이다. 낙동강을 통하여 올라오는 왜군을 격퇴하기 위하여 의병장 곽재우 장군은 고곡산성과 토성인 구진산성을 수축하고 병사들을 훈련시켰다. 그 후 이곳의 전투가 과연 치열하여 구진산성의 이름이 구진(九陣)이라 부르게 된 것도 진(陣)을 아홉 번이 쳤다하여 불리어 진 것이다. 이 아홉 번의 싸움을 다 승리로 이끌어 구전구승(九戰九勝)을 거두었다고 전해 오고 있다.

또한 6·25전쟁 때도 격전지로 이름난 곳으로 이 일대의 마을은 초토화되고 사람들은 밀양쪽으로 피난을 나갔다 오는 등 많은 고초를 겪었다.

고곡리의 밤밭골은 조선 세종 임금 때부터 관가 도요지가 있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의 자도기소(磁陶器所) 란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昌寧郡 縣南 南谷里(磁器所) 下品

 

이곳은 바로 남곡면 고곡리의 밤밭골을 말하는데 이곳의 그릇은 「下品」이라 하였는데 하품은 일반 생활용 그릇을 말하는 것으로 이곳에 관요(官窯)가 있었다 하는 사실이 중요하다.

행정 리로는 2개 리로 고곡, 두곡 등이며 영산 - 박진을 잇는 지방도와 남지 - 유어를 잇는 지방도 등 2개 노선이 교차하는 곳이라 교통이 대체적으로 편리하다.

 

북쪽 수개를 바라보며 고곡산성에서 - 고곡 구평 마을

 

 

◉ 8-1 고곡(鼓谷)

 

마을이 있는 골짜기가 북처럼 생겼다하여 북실이라 불리었는데 고곡으로 쓰이고, 행정리 명칭으로 사용되고 있다. 남곡국민학교, 남곡중학교를 비롯하여 고곡출장소, 고곡지서, 고곡우체국, 고곡농협 등 여러 기관들이 있으며, 고곡시장이 1일, 6일에 장이 섰으나 지금은 폐시되었다.

자연마을이 여러 개 있는데 밤밭골, 머찔, 구평, 장터걸, 살구징 등이 있다. 70여호가 살고 있다. 월송정(月松亭 : 忠翼公 忘憂堂 郭再祐가 壬亂時에 사용한 義兵 練武所), 종산재(鐘山齋 : 成大亨 제각), 나산재(奈山齋: 성씨 봉선소), 모은정(慕恩亭 : 나주정씨 봉선소) 등이 있다.

*지금은?-- 남곡초등학교와 남곡중학교는 폐교되었고, 고곡출장소는 민원상단실로, 고곡지서는 폐소되었다.

 

고곡 북실 마을

 

북실[鼓谷]

높은배기라 불리는 산 아래의 마을로 이 산의 남쪽 기슭 일대의 모양이 북처럼 생겨 북실이라 하였다고 한다. 한자로는 고곡(鼓谷)으로 기사되었으니 「실」은 골[谷]의 옛말로 「室 . 谷 . 士 . 絲」등으로 쓰였다. 그러나 아지리의 앞실, 두곡의 머리실(머실) 등 이 근방의 지명에 따라 살펴보면 북실의 ‘북’은 앞실[南谷]과 대비되는 북쪽 골로 북녘 북(北)으로 추정되며, 북 고(鼓)를 쓴 것은 일종의 아화로 보인다.

창녕 성씨가 시거(始居)하였는데 처음에는 뒷산이 종처럼 생겨 종산(鐘山)이라 하였다가 뒤에 앞산이 북처럼 생겨 북실, 고곡(鼓谷)이라 하였다 한다. 마을 가운데 당산나무가 두 그루 있는데 둘레가 한 아름쯤 된다.

 

 

◎ 밤밭골

북실 서편 뜸으로 이 마을 북쪽으로 용수골이란 긴 골짜기가 있는데 이 일대에 밤나무밭이었다 한다. 조선시대에 관요(官窯)가 있었던 도요지로 그곳 산비탈을 파면 그릇조각이 나오고 불을 땐 흔적도 있다.

 

◎ 정지뱅이

옛 남곡국민학교 근처 뜸으로 전에 정자나무가 여러 그루 있었던 곳으로 사람들이 쉬었던 곳이었다, 정지는 정자나무가 있는 곳으로 「亭地」이다. ‘뱅이’는 논배미할 때의 ‘배미’가 변한 것이다.

 

◎ 구평(龜坪)

북실의 동편 고국우체국, 농협 등 여러 기관과 남곡중학교가 있었던 도로변 마을이므로 교통의 요지로 고곡리의 새로운 중심부를 이루고 있다. 산줄기가 평지와 만나며 약간 융기하여 들판이 거북등과 같으므로 구평이라 하였다.

이 지명은 들의 이름에서 왔는데 이곳에 5일장이 생기면서 장 이름은 구평장이라 부르기로 한 이후 마을 이름으로 된 것이라 한다.

 

◎ 머찔[內谷]

고곡 남쪽에 있는 뜸으로 벚나무가 많았다 한다. 고곡의 안 동리라하여 안곡, 내곡으로 불리기도 하고 멋질이라 하기도 한다. 2호가 사는데 최근 절이 생겼다. 내견재(乃見齋 : 成天祺 제각)가 구진산 줄기 중턱에 있다.

 

◎ 살구징

고곡 남쪽의 뜸으로 살구나무 정자가 있었던 곳이어서 살구정(亭)이라한 것이 살구징으로 변했다. 영산-박진간 1008번 지방도변에 있다.

 

◆ 용수골

북실보다 먼저 사람이 살았던 곳으로 1650년대에 진씨, 문씨, 원씨 등 삼성이 살다가 이사를 갔다고 한다. 용수골은 고곡 북실의 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이곳 입구에 밤밭골이 있다. 북으로 월평으로 가는데 골짜기가 좁고 깊어 마치 용수처럼 생겨 용수골이라 불린다.

골짜기 제일 안쪽에 못이 있는데 이것을 용수골못, 고곡지 등으로 불린다. 길이가 2,250m이다. 최근 이 골짜기에 임도가 개설되었다.

 

◆ 장터껄

구평에 구평장이 서는 곳을 장터걸이라 속칭한다. 고곡시장은 1954년에 허가되었는데 1일, 6일에 장이 섰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예전부터 이곳에 술집과 주막들이 있었다.

 

◆ 다리껄

고곡교가 지방도에 걸쳐 있는 근처를 다리껄이라 부른다. 구평 마을의 입구이고 버스가 서는 정류소가 있다. 이 옆에 최근 남지농협고곡분소가 신축되었다.

 

 

◆ 높은배기[高雲峰]

고곡 북실 북쪽에 있는 산으로 높은 산이라 하는 뜻에서 높은 배기라 불리었다. 한자로는 높은 구름이 걸렸다하여 고운봉이라 하였다. 노운봉(老雲峰)이라 쓰기도 하는데 높은배기의 음차로 보인다. 높이는 240.7m이다.

임진왜란 때 곽재우 장군 휘하의 의병들이 골짜기 아래 월송정에서 훈련을 하였고 군사들이 산봉우리에서 지키며 왜군의 동정을 살펴 봉화를 올린 봉수대가 있다.

 

◆ 구진산(九陣山)

구진봉, 구진재라고도 불리는데 고곡리의 서편 높이는 311m인 산으로 칠현리 외에 반포, 대곡리와 경계를 이룬다. 구진봉이 와전되어 구시봉이라고도 불린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 곽재우 홍의장군이 이곳에서 구전구승하였다 하여 구진산이라 불린다. 이 산의 정상은 평평하여 네모진 토성(土城)이 있는데 바로 가야시대의 성으로 알려진 구진산성이다.

 

 

앞이 고곡산성이 있는 앞산이고 멀리 있는 산이 구진산이다.

◆ 구진산성터(九陣山城)

구진산 정상에 있는 성터로 가야시대의 성으로 추정된다. 임진란, 6·25전쟁 때 격전지로 알려져 있다. 성은 흙과 돌을 섞은 성벽이므로 그동안 수축하지 않아 다 허물어졌고, 또 성안의 부지를 마을의 공동묘지로 사용하여 옛 흔적이 사라졌다.

이 성터는 고곡리 193번지 일대 9정보 넓이로 550m, 동서로 262m되는 장방형의 모양이다. 토성의 높이는 3.7m정도로 강 건너 의령군 지정면 성산리 산성과 같은 능선에 낙동강을 마주 건너다보이는 산에 축조되었는데, 아래 낮은 곳에 있는 고곡산성 등과 비교하여 보면 이 성이 가야시대의 것이라 추정된다.

 

◆ 앞산[鐘山, 鼓谷山城山)

고곡 마을 앞의 산이므로 앞산이라 속칭하는데 가야시대의 성터가 있어 고곡산성 산이라 부른다. 높이는 90m정도 된다. 이 산의 형상이 마치 종과 같다 하여 종산이라고도 한다.

 

 

◆ 고곡산성(鼓谷山城)

고곡마을 앞산에 축조되어 있는 산성으로 가야 때의 축조로 추정되는 산성이다. 둥근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하여 돌을 쌓았는데 내성과 외성이 있고 성벽의 길이는 1.5km된다.

성터의 넓이는 고곡리 산 220번지 일대 약 6,600평 정도 되며, 성벽의 높이는 3.5m인데 석재가 허물어져 있었는데 최근 지표조사 결과 통일신라 때 축조된 석성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성을 크게 수축 복원공사를 해 성벽이 많이 살아났다.

 

수축된 고곡산성의 성벽

 

◆ 마당바우

구진산 동편 산줄기 중간에 있는 바위로 마당처럼 편편하게 생겼으므로 마당바우라 불리는데 이 근처의 지명으로도 사용된다. 이곳은 머찔 위로 예전부터 명당이라 소문이 난 곳이다. 창녕 성씨의 선산이다.

 

◆ 절터

머찔 남쪽의 터로 예전에 절이 있었다 한다. 이 근방에 내곡지(內谷池)가 있다.

 

◆ 잣고개

북실에서 남쪽으로 머찔(내곡)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낮고 작은 고개여서 작은고개 - 작고개 - 잣고개로 변하였다. 까치고개란 뜻으로 까지 작(鵲)을 써 작고개로도 쓴다.

 

◆ 범한골

구진산 동편 아래의 산으로 형국이 범이라 하여 범한골로 불린다. 잣고개의 북쪽이다.

 

◆ 대칭이고개[大層峴]

대춘이 고개로도 불리는데 북실에서 서편으로 대곡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한다. 구진산 높은 산등을 넘어간다. 이 고갯마루는 너덜겅으로 풀만 우거지고 큰 바위들이 층층이 쌓아져 있는 고개이므로 대층(大層)고개로 불리어진 것이라 한다. 1995년경 임산도로가 개설되어 대곡리 까지 통행이 편리해졌다.

들붓고개

들붓은 월하리 월평 마을을 지칭하는데 용수골 안에서 북쪽으로 난 고개로 이 고개를 넘으면 들붓에 닿으므로 들붓고개라 한다. 들붓에 나루가 있어 낙동강을 건너면 의령군 낙서이므로 예전에 사람들이 의령군 낙서나 신반으로 가려고 이 고개로 많이 다녔다.

 

◆ 꽃등만댕이

들붓고개 옆 서편의 산등으로 봄이면 참꽃(진달래)이 많이 피므로 꽃만댕이라 부른다. 이곳 북쪽 아래가 월하리 월평마을이다.

 

◆ 진주고개

고곡리 북실에서 북쪽으로 수개리 금곡과 통하는 고개이다.

 

◆ 웃고개와 아랫고개

고곡에서 북쪽으로 수개리 반월등 서편으로 가는 고개이다. 이 고개 아래쪽에 아랫고개가 있는데 모두 수개로 가는 고갯길이다.

 

◆ 고곡수리들

고곡리 남쪽의 들로 머찔벌이란 늪지가 있어 해마다 수해를 입던 곳이었다. 1970년대에 수리시설을 하여 점차 개답이 이루어져 지금은 옥토가 되었다. 이 들은 아래 낙동강까지 뻗어 내려가 칠현리와 창아지들로 이어진다.

 

◆ 구평들

구평마을 일대의 들이다. 고곡수리 제방을 만들기 전에는 홍수가 들면 강물이 수개, 시남앞들까지 올라와 배가 다닐 수 있을 지경으로 수해가 잦았던 들판이었다. 그러므로 비만 오면 큰 늪이 생겼다가 날씨가 가물면 늪지가 말라 땅이 거북등처럼 갈라졌다 하여 거북 「구」(龜), 들 평(坪)을 써 구평이라 하였다고 한다. 제방이 생기고 나서는 논이 되었다.

 

◆ 개우들

고곡 동북쪽 일대에 있는 들로 옛날 늪과 소(沼) 있어 개[浦] 오지(奧地), 오미란 뜻으로 개오지들이라 불린 것이 개호지, 개호대, 개우들로 변하였다고 한다.

 

◆ 머찔벌

머찔 앞에 있는 늪지대를 말하는데 예전에는 낙동강이 범람하면 이곳까지 물이 올라오고 , 또 수개, 시남의 물이 쏟아지므로 항상 물이 가득 차는 늪이었다. 지금은 수리시설이 완비되고 개간되어 저습지가 많이 줄어들었다.

 

◆ 고곡제방(鼓谷堤防)

고곡수리들을 보호하는 제방으로 강에서부터 시작하여 소재미까지 이어져 골짜기에서 쏟아지는 물을 모아 강으로 가는 고곡천을 따라 축조되었다.

 

◆ 고곡천(鼓谷川)

고곡리 일대에 있는 내로 북쪽 수개리에서 오는 물과 남쪽 아지리에서 오는 물이 모여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두곡마을 전경

 

 

◉ 8-2 두곡(頭谷)

 

고곡리의 동부로 장마면과의 경계에 있는 마을인데, 창녕현의 입구라 하여 머리실로 불리었던 것이 두곡으로 기사되어 행정리 명칭이 되었다. 『호구총수』에 나오니 오래된 지명이다. 소재미에 왜정 때 고곡출장소 사무실이 있었다. 가구수는 51호인데 전에는 80여호가 되었으며, 진양 하씨의 세거지이다.

두남재(斗南齋 : 河就源 강학소), 삼사재(三斯齋: 成昌遠配位 제각), 원모재(遠慕齋 :하씨 봉선소), 청원재(淸源齋 : 하씨 봉선소), 두산재(斗山齋 :하씨 봉선소) 등이 있다.

 

◎ 머실[頭谷]

이 마을은 남, 동쪽에서 가자면 창녕현의 첫 마을이며 머리가 되는 골짜기이므로 머리실이라 한 것이 머어실 - 머실 등으로 변하였다. 머리 두(頭)를 써 두곡이라 기사했다.

 

남지, 영산, 박진으로 가는 삼거리 소재미 마을

 

◎ 소재미[孝子岩]

머실과 북실 사이에 삼거리에 있는 마을인데 남지로 가는 길과 영산과 박진으로 가는 길이 만나는 삼거리 마을이다. 두곡정미소가 있었으며 6·25 전사에 나오는 격전지이기도 하다.

예전에 효자가 살았다하여 효자마을로 불린 것이 효자를 이곳 사람들은 ‘소자’라 발음함에 따라 소자뫼 - 소재미 등으로 변하였다. 「미」는 「마을 . 말」이 「ㄹ」밭침이 탈락하며 변한 것으로 보이나 뫼「山」, 돌맹이를 「돌미」라 함에 따라「돌」이 탈락한 「미」로도 보여 한자로 기사할 때 효자암(孝子岩)으로 쓰였다.

그러나 『동국여지승람』 창녕현 산천란의 산 이름 기록을 보면 효자암산(孝子菴山)으로 되어 있으니 후대에 와서 암자 ‘암(菴)’이 바위 ‘암(岩)’으로 바뀌었다.

 

◆ 효자비석걸(孝子碑石걸)

소재미와 두곡마을 사이에 있는 비석이 서 있는 거리로 김녕 김씨 효자를 칭송하는 비석으로 이 일대를 지칭할 때 거명한다.

 

◆ 효자암산(孝子庵山)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기를 남곡면의 진산(鎭山)으로「孝子庵山 在縣南二十五里」라 하였다,

두곡 마을에 예전에 김녕 김씨 효자가 살았는데 5형제들이 산소옆에 막(암자)을 짓고 그 부모 시묘살이를 하며 있었던 산이라 하여 효자암산이라 한 것이다. 이 산은 엄나무징 고개와 연결되는데 거기에도 이들 효자의 행실에 대한 전설이 남아 있다.

산의 높이는 별로 높지 않으나 6·25 전쟁 초기, 네임 클로버고지(高地)의 격전지로 유명하고 많은 사상자가 났으나 미군들의 용전으로 승리를 거둔 곳이다. 유엔군들에 의해 네잎 클로버고지라 불리게 된 것은 남쪽 대봉리 쪽은 잎자루이고 북쪽으로 수개, 두곡, 동정 쪽으로 네 개의 산봉우리가 있기 때문이었다.

 

◆ 올창고개

두곡마을에서 북쪽으로 수개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올창고개라 부른다. 효자암산과 큰갓 만당 사이에 있다.

 

◆ 고랑 골짝

두곡 마을 뒤의 골짜기로 동쪽으로 나 있으며, 성씨의 재실이 있는 골짜기이다. 고랑은 「골안」의 토박이말이다.

 

◆ 엄나무징이[頭谷峴]

두곡마을 남쪽 앞에 있는 고개로 엄나무 고목 정자나무가 있었다 하여 엄나무정 고개라 한 것이 엄나무징이로 불리고 고개는 생략되는 등 변하였다. 이 고개의 엄나무는 두곡에 살았던 김녕 김씨 5효자가 심었다 한다.

장마면 대봉리에서 두곡으로 넘어오는 고개이므로 두곡고개라 하기도 한다. 1008번 영산 - 월상 간의 지방도로가 고개를 통과하는데 1991년도에 고개를 낮추고 도로확장 공사로 옛 모습을 잃었다.

 

 

 

 

** 다음은 남지읍 수개리 지명유래를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