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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군지명사/남지읍

지명유래 / 남지읍 칠현리

by 남전 南田 2012. 5. 13.

 

 

 경남 창녕군 남지읍 칠현리 지명유래를 올립니다.

 

옻고개에서 바라본 칠현리 전경

 

11. 칠현리(漆峴里)

 

 

남지읍의 중서부 지역인 칠현리(漆峴里)는 아지리의 서편이며, 고곡리의 서남쪽에 있다. 『호구총수』에 창녕현의 남곡면 칠현촌으로 기록되어 있음을 보아「漆峴」이라는 지명이 오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칠현은 우리말로 옻고개라 불리었으니 옻나무가 무성한 고개 아래의 마을이었으므로 고개와 마을 이름도 그렇게 불리게 되었다.

옻고개는 마을 앞에 있는데 이 고갯마루에는 가난한 현민을 잘 보살피며 어려운 사건과 범죄를 추리력으로 재판을 잘하고 잘 해결해서 명판관 고창녕(高昌寧)이라 추앙되는 고유(高裕) 창녕현감의 선정비가 서 있다.

고유는 본 이름보다 '고창녕'이란 별호가 더 유명한 인물로 조선 영조 때의 학자이며 창녕현의 명환(名宦)으로 『창녕현읍지』에 등재되어 있는데, 역시 많은 치적을 남긴 명환이었던 한강 정구 현감과 함께 창녕사람이라면 기억해 둘 만한 인물이다. 그가 이곳 옻고개에 살던 여인의 살인 혐의를 무죄로 밝혀냄으로 말미암아 인근 현민이 비석을 세워 그의 공을 기리게 된 것이다.

칠현리는 1920년에서 최근까지 뽕나무를 많이 심어 양잠(養蠶)을 크게 하였던 마을로 이름나 있다. 산지(山地)는 물론 낙동강 강변의 모래밭에 대대적인 상전(桑田)을 조성하여 농가의 소득증대에 앞장섰던 마을이었다.

행정리는 단일리로 칠현 마을 한 곳이다.

 

 

◉ 11-1 칠현(漆峴)

 

옻고개의 기사(記寫)로 칠현이라 하였는데 법정, 행정 리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마을은 옻고개 북쪽 아래에 있다. 전에는 103호가 살았으며 지금은 68호이다.

능성 구씨의 세거지로 김녕 김씨, 김해 김씨, 밀양 박씨 등도 살고 있다.

 

◎ 옻고개[漆峴]

칠현마을의 동편에 있는 고개로 고개 마루에 행인이 쉬어가는 주막이 있었다. 또 정자 나무도 있는데 예전에는 이 고개에 옻나무가 무성하여 옻고개라 불리었다. 그래서 이에 연유되어 고개 아래 마을도 옻고개, 칠현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 날끝

지방도에서 칠현 마을로 들어오는 입구와 박진으로, 창아지로 가는 삼거리로 근처 정미소와 두 집이 사는 뜸이다. ‘날’은 ‘나루’의 축약으로 이곳에서 강을 건너다니던 나루터가 있었던 곳이었으나 강의 주류는 남쪽으로 밀려나 그 흔적은 없다. 이곳 서편을 스무날이라 부르니 날이 가물기나 하면 강물이 잦아들어 숨어버리는 나루여서 숨은나루, 스무날 이라 불린 듯하고 날끝은 그 나루의 끝이란 뜻이다.

 

 

 

 

◆ 비(碑) 껄

옻고개 마루의 동편 바위위에 비가 두 개 서 있는 길거리이다. 하나는 창녕현감을 지낸 고유(高裕·영조33년<1755년>~36년 재직)의 선정비고 또 다른 하나는 홍종화(洪鍾華·순조 1846~1850년 재직)현감의 선정비이다. 2기 모두 남곡면민들이 세웠다고 되어 있다.

고유선정비를 고창녕비라 하기도 한다. 이 비가 서게 된 것은 다음과 같은 일 때문이었다.

전라도 전주에서 태어난 어느 여인이 17살 때 정읍으로 시집을 갔는데 시어머니에게 미움을 사서 시집을 쫓겨나게 되었다. 죽으려 여드레를 굶었는데도 죽지를 못하고 그 후 흘러 흘러 이곳 칠현까지 와서 나이가 21살 먹은 김가라는 사람과 재혼하여 살았다.

(첫 결혼한 남자가 한센환자였으며, 시집이 전라도가 아니고 의령이라 하는 이도 있다.)

그런데 전 남편이 이 여인을 잊지 못하고 전국을 떠돌아다니다가 이곳을 찾아오게 되었다. 비록 재혼을 하였기 때문에 되돌아 갈 수는 없었지만 옛 남편에게 따뜻한 밥 한 그릇을 어찌 대접하지 못하랴? 여인은 현 남편의 허락을 받아 닭을 잡아 전 남편을 대접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이란 말인가?

닭고기와 밥을 잘 먹은 사람이 그만 죽어 버리는 불상사가 발생하였다. 꼼짝없이 전 남편을 독살한 여인으로 관가에 붙잡혀 가서 문초를 받게 되었다. 여인은 사실 그대로 말을 하며 독살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고 호소하였으나 아무런 증거가 없으니 살인자로 몰려야 되는 위기에 다다랐다.

이때 현감 고유는 여인의 진실된 호소에 관심을 갖고 비상한 추리력을 발휘하여 먹다 남은 닭고기를 개에게 주니 개도 죽어 버렸다. 현감은 즉시 사람이 죽게 된 이유를 알게 되었다. 현감은 지체하지 않고 마을 사람들에게 초가집 지붕을 벗기에 하였는데 그곳에서 큰 지네가 나왔다. 백년이나 묵은 길이 한자가 넘는 것이었다.

"이 모(某)가 죽은 것은 지네의 독이 씌었기 때문이다. 닭과 지네는 상극이라 그리 되었으니 이 여자에게는 죄가 없다,"

명쾌한 원님의 판결에 모든 사람들이 감탄하였다. 후에 이 사실을 칭송하고 기리기 위하여 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그 외 고창녕에 관한 일화와 추리소설 같은 재미있는 사건 해결은 수 없이 많아 군내에 널리 전하여 진다.(창녕군지(1984) p695 사화전설)

 

◆ 다름재

구진봉이 낙동강을 향하여 뻗어 나오다 강과 만나 끝나는 옻고개의 남쪽의 산인데 바로 강가 쪽에 위치하고 있다. 강에 다다른 산이라 하여 다름재라 불리운 것 같다.

 

◆ 구진산(九陣山)

칠현 마을 북쪽에 있는 산으로 구진산성이 있는 곳이며 칠현리의 공동묘지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낙동강이 환히 바라보여 전략상 중요지로 임진왜란, 6·25전쟁 때 격전지로 지금도 옛 전지(戰地)를 견학하기 위하여 인근 육군부대의 장병들이 오기도 한다.

 

◆ 작은재

구진산 남쪽의 작은 봉우리이므로 작은재라 불린다. 날이 가물면 기우제를 지내는 산이다.

 

◆ 잔곡에

마을 동쪽에서 고곡으로 넘어가는 구진산 남쪽 산줄기에 있는 고개로 흔히 옻고개를 큰고개(큰곡에)라 부르고 작은재에 있는 고개를 잔고개(잔곡에)라 부른다. 작은재, 잔고개에는 당산나무가 있어 당산재라 하기도 하는데 이 당산에서 매년 당제를 모신다.

 

◆ 큰곡에

다름재에 나 있는 고개로 곧 옻고개를 요즘에는 북쪽에 있는 작은 고개보다는 큰 고개이므로 큰고개라 불린 것이 이곳 사람들은 큰곡, 큰곡에 등으로 발음한다. ‘곡’은 고개의 축약이다.

 

◆ 골판

칠현 마을 바로 뒤의 골짜기를 골판이라 한다. 골안이 골판으로 변한 듯하다.

 

◆ 장골[長谷]

칠현 마을 뒤의 골짜기로 길이가 길므로 장골이라 한다.

 

◆ 땅골 만댕이

칠현과 서편 담곡 사이의 산으로 담곡을 흔히 땅골로 부르기도 한다. 높이는 164.4m이다.

 

◆ 동구재

동구(洞口), 동네어귀에 있는 재(산, 고개)이기에 동구재로 불리는데 땅골 만댕이 북쪽 봉우리, 높이는 165m이다. 칠현 서북쪽 산이다.

 

◆스무날

날끝 서편으로 담곡 사이의 산모퉁이인데 예전에 이곳은 나루터인데 날이 가물면 강물이 남쪽 멀리까지 가버리고 물이 숨어들었다하여 ‘숨어’가 수무→스무로 변한 것이다. 스무날은 숨은 나루란 뜻이다.

지금은 지방도가 지나가고 있다. 이곳에 큰 정자나무가 다섯 그루가 있어 오정지(五亭地)라 불리었다고 한다.

 

◆담실고개

칠현에서 담곡 마을을 지나 북쪽으로 반포 중촌 마을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중촌에서 남지나 곡으로 나오려면 이 고개를 이용하였다 한다.

 

◆ 앞고개

칠현에서 담실 뒤로 하여 반포리 중촌 마을 앞으로 통하는 고개이다. 반포리 중촌 마을에서 동쪽으로 구진산을 넘어 고곡리로 가는 고개를 반포에서는 뒷고개라 부른다.

 

◆ 칠현벌

아랫들이라 하기도 하는데, 칠현리 앞에 있는 넓은 들판인데 낙동강의 범람으로 자주 침수가 되곤 하여 뽕나무와 버드나무 등을 많이 심었던 들이다. 지금도 밭이 많다.

 

◆ 솔밭넘에

날끝 정미소 남쪽 바깥의 들을 가리키는데 전에는 이곳이 솔밭이었다 한다.

 

 

** 다음은 남지읍 반포리 지명유래를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