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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얘기

소야 신천희 칼럼 / 간극에 대하여

by 남전 南田 2013. 2. 9.

 

 

간극에 대하여

                           소야 신천희

 

 


남한과 북한 사이에는 휴전선 너비만큼 간극이 있고 도와 도 사이에는 경계선 폭만큼 간극이 있다 시와 군 사이에는 표지판 크기만큼의 간극이 있고 마을과 마을 사이에는 이정표 하나만큼의 간극이 있다

 

집과 집 사이에는 담장 두께만큼 간극이 있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껴입은 옷의 수만큼 간극이 있다 이 간극이 허물어지면 모든 것이 한꺼번에 무너져 원하지 않는 간섭과 구속으로 혼란에 빠지기 쉽다

 

그래서 예전부터 지역을 나눌 때 강이나 산을 경계로 나누었고 마을 또한 하천을 사이에 두고 나누었으며 집과 집 사이에는 담을 쌓았다. 자신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서는 적어도 고만큼의 간극이 필요했던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도 이와 같이 적절한 간극이 필요하다. 간극을 허물고 스스럼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주면 잠깐은 거리낌 없는 소통으로 가까워 진 것처럼 보이나 머지않아 상처받고 후회하게 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어서 그 관계를 오래 유지하려면 상대가 다가오면 다가오는 만큼 물러서고 상대가 물러서면 물러선 만큼 다가가면서 딱 고만큼의 간격을 유지할 수 있는 요령이 있어야 한다.

 

서로 모든 것을 털어놓고 흉허물이 없다고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양파가 겹겹이 싸인 켜를 다 벗고 나면 이미 양파가 아니다. 벗길 켜가 남아 있을 때 비로소 양파라고 불리며 양파로 존재하는 것이다.

 

사람도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적당한 감춤이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조금이라도 신비로움이 남아 있어야 싫증이 나지 않는 것이다. 사람 좋다는 소리를 듣자고 모든 걸 다 드러내내고 나면 존재적 가치가 하락의 길로 들어선다.

 

스님들이 법상에 올라 설법을 할 때 주장자라는 지팡이를 들고 한다. 주장자는 한낱 지팡이가 아니라 자신이 이룩한 선의 세계를 상징하는 정신적 기둥이다. 그 주장자에서 발산되는 기운이 설법을 하는 스님과 대중간의 간극을 형성한다.

 

스님도 승려이기 이전에 사람이다. 그 간극을 유지하지 못하면 무지개처럼 그 신비스러움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린다. 그 신비가 허물어지면 겉으로 보이는 것만 보고 너나 나나 그게 그거다 하는 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운수납자들이 길을 떠날 때 꼭 지팡이를 들고 떠난다. 풀길을 걸을 때 쿵쿵 울려 벌레들이 밟히지 않게 미리 피할 수 있도록 알려주고 어쩌다 만나는 길손이 다가오려고 하면 지팡이를 들어 그 길이만큼 간극을 두기 위한 것이다.

 

몸 한쪽이 허물어진 노인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살아가면서 지팡이 하나쯤은 꼭 필요하다. 정이 많은 사람일수록 더 절실하게 필요하다. 다른 사람과 관계를 가질 때 너무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게 지팡이를 들어 고만큼의 간극을 유지하려면 말이다.

 

그런 지팡이 없이 살아가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 겨우 껴입은 옷 수만큼의 간극밖에 남지 않는다. 그 간극은 너무 가깝고 허물어지기 쉬워 위험하다. 그런 위험이 닥치기 전에 간극을 유지할 수 있는 지팡이 하나 꼭 들고 살아갈 일이다. 

 

(카페 창녕문인협회의 글을 옮겨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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