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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편조왕사 신돈 이야기(시리즈4) / 제4장 행각승 편조의 길(5)

by 남전 南田 2022. 9. 30.

옥천사지 축대

편조왕사 신돈 이야기

제4장 행각승 편조의 길(5)

 

4장 행각승 편조의 길(5)

 

* 금강산 순력(巡歷)과 혜근 스님

 

반야심경은 외우기 힘들지요. 그저 나무아미타불 여섯 자만 부지런히 염불하시면 극락엘 가실 테니 자주 하시오. 소승을 따라 한번 염불해 보시겠소?”

편조는 일어나서 나무꾼과 봇짐 장사꾼들을 향해 우렁차게 나무아미타아불!” 하고 소리했다. 그러자 일고여덟 사람들이 염불을 큰 소리로 따라 했다. 소리가 아니라 고함이었다.

나무아미타아불! 나무아미타아불!”

그 함성은 산 메아리가 되어 골짜기를 이곳저곳 울렸다. 편조는 그들의 칭찬과 마음껏 목청껏 염불했던 것 때문이었는지 억눌렸던 심정이 시원하게 풀리는 듯했다. 행인들과 헤어지면서 부처님을 믿고 절에 다니라고 마지막까지 포교하기를 잊지 않았다.

 

훗날 개경에서 불자가 되라고 행인에게 권연(勸緣-포교)하기를 외치며 거리를 다닐 적에 그의 구성지고 은근한 염불 소리를 듣고서 불자가 된 사람들이 많았다. 요즘 말로 하면 인기 가수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으니 드디어 공민왕을 만나는 인연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었다.

 

편조는 그 길로 곧장 장안사 유점사 표훈사 신계사 정양사 등 100개가 넘는 사찰과 암자가 있다는 불교 성지 금강산을 찾아갔다.

먼저 금강산에 들어서면 제일 남쪽에 있는 법흥왕 때(7:520) 고구려 승려 아도가 창건하였다는 원각사(나옹선사 혜근이 공민왕 때(7:1358) 중건하고 건봉사(乾鳳寺)로 개칭)를 찾아보았다. 그리고는 유점사에 들렸다. 고구려 유리왕 때(23:서기 4)에 창건된 고찰로 4대 명찰이라 소문이 났었다.

유점사 가는 길에 젊은 스님을 만났다. 그 스님은 편조보다 앞서가고 있었는데 걸음을 빨리하여 따라잡았다.

스님! 스님은 저기 유점사에 계시는가요? 소승은 떠돌아다니는 행각승이올시다.”

힐끗 뒤돌아보더니 합장하면서 인사를 건넸다.

아니요. 소승도 금강산에 사찰이 많고 고승이 많이 계신다기에 만나 뵙고 싶어 왔소. 원각사에 들려왔으니 소승도 행각승인 셈입니다.”

그렇구려. 반갑소.”

금강산에는 법기보살(法起菩薩)이 머문다고 합니다. 중국의 오대산에 문수보살이, 인도의 보타락가산에 관세음보살이 머물 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불교 성지로 중국에서도 승려들이 이 산을 찾아온다고 합니다.”

편조는 젊은 스님이 얼굴이 곱고 온화한데 나이가 그보다 적어 보였다.

아아! 나보다 어려 보이는데 일찍이 사찰 순례를 나섰구려. 소승은 2년여 여기저기 다니며 고승의 법어나 설법도 듣고 수행하고 있소. 이렇게 만났으니 노중이지만 인사나 합시다. 소승은 영산 옥천사 일미암의 편조요.”

그때 젊은 스님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반색하며 되물었다.

아니! 영산이라면 여기서 천 리, 이천 리나 멀리 떨어진 곳이 아니요? 옥천사가 화엄사찰 이지요. 가야 고찰 관룡사도 인근에 있고요. 행각승으로 거기서 오셨다니 대단하십니다.”

아아! 우째 옥천사도 관룡사도 아시오? 젊은 스님이.”

편조는 젊은 스님의 말에 매우 놀랐다. 금강산에서 옥천사를 아는 스님을 만나다니. 그러자 젊은 스님이 정색하고 합장하며 인사를 정중하게 했다.

고향 선배를 만나 반갑습니다. 소승은 혜근이라 하는데 영산에서 태어났지요.”

혜근(慧勤 ; 나옹懶翁) 스님의 말에 편조는 끌어안다시피 하며 반가워했다. 천 리 머나먼 타향에서 고향 사람을 만나다니! 그것도 같은 길을 가는 행자승으로.

정말 반갑소. 반가워! 유점사 가는 길이 이제 즐겁소.”

소승은 출가한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문경 공덕산 묘적암(妙寂庵)의 요연(了然) 대사께…… 금강산 사찰들을 찾아왔지요.”

잘 되었소. 나는 편조요. 법호가 요공(耀空)이라 하오. 우리 같이 금강산 구경에 유명 사찰들을 찾아봅시다.”

둘은 걸어가면서 이 일 저 일 이야기를 나누었다. 혜근 스님은 21살 때 친구의 죽음 계기로 출가했는데 영산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내다 아버지의 고향인 영덕에 가서 살다가 문경 묘적암으로 출가한 것인데 편조처럼 여러 사찰을 순력하고 있었다.

혜근 스님은 2000년대인 지금도 널리 알려진 고승으로 그의 법호인 나옹(懶翁)선사라 하면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靑山兮要我以無語)……이란 유명한 게송(偈頌) 시가 애송되고 있다.

혜근과 함께 편조는 유점사에서 10여 일을 머물며 다른 절에서 해 왔던 대로 그곳 스님들과 예불도 드리고 주지나 불정암, 보덕암을 비롯한 암자의 큰스님들을 만나서 법어와 법문을 들으며 그의 불심을 돈독하게 했다.

후일 편조는 유점사와 인연을 가지게 된다. 형 신예가 충예왕 시절 유점도감(楡岾都監)을 주관하게 되었을 때 유점사를 관리 내지 후원하였는데 그때 편조를 유점사에 머물게 하며 유점도감의 일을 하도록 했다. (고려사 권 132, 열전 45, 반역 6, 신돈)

유점사 다음에 혜근과 함께 내금강 최고봉인 비로봉, 장경봉에 있는 장안사와 장경암 안양암 지장암 영원암 도솔암 등 암자들과 정양사, 표훈사, 신계사를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덧 석 달이 걸렸다.

하행 길에 묘향산 보현사(普賢寺)에 들렸다. 이 절은 광종 때(19:968) 창건되었는데 이름난 고승으로부터 화엄교관(華嚴敎觀)을 전해 받아 묘향산을 대표하는 큰 절이 되었다고 전해 오고 있었다.

소승은 화엄사찰인 비슬산 옥천사에서 왔소이다.”

편조도 같은 화엄종의 승려임을 밝히자 주지의 대접은 더욱 친절해졌다. 편조의 특이한 염불 소리와 반야경 염송을 들은 주지는 절에 오는 불도들을 위한 법회를 열고 편조가 염송과 법문을 하도록 하였다. 절에 모여든 불도들이 편조의 불경 염송과 법문이 다른 스님들과 달리 쉬워서 큰 감동을 받아 보현사에 오래 머물기를 청했다. 그러나 편조는 혜근과 의론하여 개경으로 떠나기로 했으므로 달포 만에 남행길을 나섰다.

 

<창녕신문> 2022. 9. 27일자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