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남전과 함께
소설

편조왕사 신돈 이야기 / 제5장 수행길 개경과 연경(2)

by 남전 南田 2022. 11. 23.

제5장 수행길 개경과 연경(2)

* 일미사 개칭과 중창

임미암에 들어서니 여러 스님과 사람들이 몰려나와 환영하는데 그가 떠날 때와 달리 절 식구들이 많아 보였다. 편조는 스승인 진묵대사를 먼저 찾았다. 그러자 각조가 고개를 떨구고 침중한 태도로 조용히 말했다.

스승님께서는 지난달 열반에 드셨네.”

편조는 황망한 마음으로 암자 뒤 스승의 유골을 모신 부도를 찾아가 절을 올렸다. 진묵대사는 곧 그의 부모와 같았다.

승방으로 돌아오자 암자를 책임진 각조가 진묵대사의 유언을 편조에게 전했다.

스승님께서 사형에게 이 암자를 맡겼네. 이제 사형이 일미사로 개칭하고 대웅전 불사를 일으켜 번듯한 당우를 지으라고 분부하셨네. 옥천사 청송 주지 스님도 찬성하셨네.”

알았네. 우리 모두 힘써보세.”

편조는 그길로 옥천사에 올라가 청송 주지 스님을 뵙고 그간 행각승으로 순력했던 수행을 보고했다. 주지 스님이 칭찬 겸 당부를 했다.

잘 했다. 득도의 길은 멀고 험한데 고행을 하면서 큰 깨달음을 얻었으니! 특히 화엄경을 궁구했다니 반갑도다. 앞으로 진묵 대사님의 뜻을 받들어 일미사로 개칭하고 그에 맞은 금당을 짓기 바라네. 본사에서도 지원을 아기지 않겠다.”

 

편조는 그 후 1년여 창녕 영산 계성의 불자들을 방문하고 대웅전 불사에 공덕을 쌓으라고 권해 협력을 받아냈다. 절터도 전보다 넓게 확보하였다.

대웅전과 부속 건물의 건립 공사를 맡을 기술이 좋고 일 잘하는 업자를 수소문하였는데 뜻밖에도 어머니(유모) 박소새와 재혼한 일문역(一門驛)에 사는 강상재였다. 그는 전에 사복시 주부(主簿)를 지내다 낙향한 후 건축 사업을 하고 있었다. 강 주부는 인근의 관아 건물과 사찰을 수축하거나 건립 공사를 전문적으로 맡고 있었다. 강 주부를 만나 당우 건립을 의논하니 흔쾌히 일을 맡겠다고 승낙했다.

편조 자네는 내 아들과 다름없제. 우리 집사람 젖을 먹고 열 살이 넘도록 친자식처럼 키웠으니 그 인연이 보통 인연인가? 내 성심을 다해 당우를 번듯하게 짓겠네.”

유모이자 어머니의 남편이니 이부(異父)라 아버지라 불러도 될 듯하여 그렇게 부르자 강 주부는 더욱 좋아했다. 강 주부는 박소새와 재혼해 아들과 딸을 낳았는데 열두세 살 먹은 강성을(姜成乙)을 데려와 편조에게 인사를 시켰다.

이놈이 통 내 말을 듣지 않어. 목수 일을 가르치려 하니 싫다 하고 글공부해서 벼슬을 하고 싶다네.”

목수 일이 싫다 하면 그러지요.”

중도 되기 싫다 하니 행여 중을 만들 생각일랑 말게.”

강 대목의 부탁으로 편조는 성을이를 절에 있게 하면서 글을 가르쳤다.

훗날 강성을은 후에 궁궐 건물을 짓거나 수선, 토목공사를 관장하던 선공시(繕工寺)의 판사(3)로 일했다. 그런데 <고려사> 신돈전에 강성을이 편조의 이부동생으로 기록되어 있다.

― …… 신돈의 이부동생인 판사(判事) 강성을(姜成乙)의 목을 베고……

편조 신돈의 아버지 신원경은 저명한 문중 영산 신씨로 지후(祗候) 벼슬까지 한 사람의 양반집 소실이 또 다른 남자에게 재가하다니 어불성설이다. 남편 신원경이 멀쩡하게 살아 있었는데 개가할 리가 만무한 일이다. 필시 편조의 신분을 비천하다고 조작하려니 강성을을 이부동생이라 하면서 모략하였으리라. 유모 박소새가 강 주부와 재혼해 강성을을 낳았고 훗날 신돈의 집권 시절에 궁궐 관리를 맡았던 강성을이 흔히 우리 어머니가 신 첨의의 어머니다.” 하고 자랑하며 떠들고 다녀 그 소문이 퍼졌는데 그 와전된 소문을 <고려사>에서 그대로 써먹은 것이다.

 

강 대목은 일 잘하는 목수를 여러 명 동원하고 일꾼들을 많이 모아 열심히 일했다. 1년 여 공사 끝에 번듯한 대웅전을 전날의 작은 불당 앞에 그리고 극락전이나 승방과 요사채, 새로운 탑과 석등을 건립할 수 있었다. 비록 옥천사나 관룡사의 위용에 미치지 못하나 암자의 단출한 옛 자취를 벗게 되었다.

<琵瑟山 一味寺>라 쓴 현판을 건 일주문을 계성천을 건너 들어오는 산문에 세우니 모두들 편조가 명실상부한 일미사 주지임을 알아주었다.

일미암을 일미사로 개칭하고 대웅전 불사를 마치니 행자승으로 순력을 마치고 돌아온 지 2년이 지나서였다. 다시 1년 여 강원(講院) 조성 불사를 위해 일했다. 옥천사의 큰 스님들과 주지 편조가 강원에서 직접 반야심경과 화엄경을 강론하기도 하였다.

그럴 즈음 영산의 신씨 가문 집사인 박출이 개경의 소식을 갖고 왔다. 속히 올라오라는 신예의 전갈이었다.

편조는 원나라로 가게 되어 옥천사 방장의 허락을 받아 개경으로 올라갔다. 동행하게 된 성을이와 여동생 연이와 혜조 스님은 새로운 세상을 만날 기대에 부풀어 밝은 얼굴이었다.

그는 개경가는 길에 양주 회암사에서 수도 정진하고 있는 지옹 혜근 스님을 만나러 갔다. 그간에 큰 깨달음을 얻은 혜근은 석옹(石翁) 대사로부터 대오(大悟)를 인정받았다고 하였다.

정말 깨달음을 얻었으니 축하하네. 그런데 이제 연경으로 갈 기회가 생겼네. 전에 우리가 약조했듯이 그곳에 계시는 지공 선사를 만나 뵙고 가르침을 받고자 하지 않았던가?”

아아! 요공 사형! 그럴 기회가 생겼소?”

우리 형 신예가 연경에서 돌아왔는데 이번에 원나라로 돌아갈 때 날 데리고 간다네. 그러니 사제도 준비하고 있다가 내가 통지할 테니 그때 함께 가세.”

편조는 혜근에게 장담하며 걱정을 말고 기다리라 하고 회암사에서 개경으로 향했다.

 

개경에 올라가 신예의 집을 찾았다. 원경에서 돌아와 있던 신예뿐만 아니라 형제들이 편조를 반갑게 맞이하였다.

신예는 그때 막강한 권력을 가진 전리판서 기철과 끈끈한 친분이 있었다. 원나라 황궁에서 환관으로 권력을 잡고 있던 매부 고용보 자정원사의 지원이 큰 힘이 되었다.

신예는 편조를 만나자마자 대뜸 금강산 유점사로 가라고 했다.

유점사에 좀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