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웠던 시절의 창녕문학
김 현 우
창녕문학회가 창립되기는 <만년교>가 발간되어 그 뜨거운 열기가 한창 창녕의 문인들의 가슴에 펄펄 끓어 오를 때였다. 임신행 선생이 하재홍 선생과 손잡고 군내 교사들의 작품을 모아 1973년에 발간한 <만년교>는 그래서 창녕문학회의 모태(母胎)이며 <창녕문학>의 창간호라 할 것이다.
내가 1978년 3월 회장을 맡게 된 것은 하재홍 회장의 갑작스런 별세 때문이었다. 창녕문학회가 창립되면서 내가 부회장을 맡았으나 <창녕문학>의 원고를 모으고 편집과 교정을 도맡아 하기는 상임이사 임신행 선생과 하재홍 회장으로 나는 부회장이란 이름만 걸었을 뿐 두 분에게 신세만 질 뿐 큰 도움을 주지 못했다. 하 회장은 그때 영산면 자택에서 <집현전> 이란 인쇄소를 경영하고 있었다. 그래서 <창녕문학>의 창간 작업은 오로지 두 분의 공력으로 이루어 졌다.
1978년경 하 회장의 별세로 막상 회장을 맡았으나 <창녕문학> 발간은 난관에 봉착하였다. <집현전>도 문을 닫았고 인쇄시설은 팔려버렸으니 어디로 가서 인쇄를 할지 막연해 졌다. 그때 회원들의 노력은 눈물겹고 호주머니를 털어 연간집을 꼭 만들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모두들 열성을 보였다. 그런 노력의 결집으로 4집의 편집과 출판 의뢰를 할 수 있었다. 그때 출판사는 부산의 출판사 였다. 그런데 회원들 대부분이 <창녕문학>으로 치면 4집이지만 <만년교>를 창녕문학회 연간집의 창간호로 계산을 한다면 5집이니 그렇게 바로 잡자는 의견이었다. 그래서 결국 그렇게 되고 말았는데 이제와 보니 4집이란 것을 사용하지 않은 사유를 모르는 사람들은 4집을 결본으로 여기니 아쉬움이 남는다.
5집은 회원들의 과감한 희생으로 1978년에 발간되었으나 그 이후 연간집 발간은 어려움이 많았다. 6집을 2년이나 지난 1980년 4월에 발간하였으나 다시 한 해를 걸러야 했다. 군내에서 우리 창녕문학회를 위한 지원을 기대할 수도 없었고 회원들의 희생을 계속 강조하는 일도 어려웠기 때문에 해마다 발간은 불가능하였다.
그때 신문보도를 보고 한국문화예술진흥원에서 동인지 발간을 지원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 당시 경남에는 몇몇 문학동인이나 문협지부가 있었으나 동인지 발간 지원을 받는 곳은 전무하여 언제 어떻게 신청을 하는지 신청 서식은 어디서 구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결국 문예진흥원에 전화를 하고 편지를 보내 신청서식을 구할 수 있었다. 경남에서는 유일하게 1982년에 문예진흥원의 지원금 50만원을 받아 <창녕문학> 7집을 겨우 발간할 수 있었다.
이듬해도 문예진흥원의 지원금 50만원을 받아 연간집을 발간하였는데 이후 몇 년간 문예진흥기금을 지원받았다. 어느 때인가(아마 신용찬 회장 시절) 지방 문학단체의 지원은 경상남도로 이관되어 지금은 경남도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다. 하여간 경남에서 중앙의 문예진흥기금을 지원받기는 아마 우리 <창녕문학>이 어느 문학단체보다 앞섰을 것이라 생각이 된다.
지금 돌이켜보면 활동력이라곤 통 없는 사람이 여러 해 회장이란 직분을 맡아 지냈지만 내 힘이나 능력으로 지탱한 것이 아니었다. 원고 보따리 둘러메고 싸게 출판해 줄 출판사로 달려가고 편집과 교정 보고 책 보급까지 책임졌던 임신행 선생과 부회장으로 희생을 통째 감내한 남기태 시인이나 신용찬 시인 등등 많은 분들의 열성과 도움으로 회장직을 부지(扶持)했던 것이다.
특히 공무원이었던 관계로 마산으로 근무지를 옮기면서 1984년 봄, 남지에서 마산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그야말로 나는 출향문인이 되었고 회장은 고향을 지키고 살고 있는 문인이 맡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후임 회장을 신용찬 시인에게 떠맡겼다. 그때가 1985년 5월로 기억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