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원 선생님을 나는 동포초등학교 3학년 때 만났다. 그때가 1948년으로 6·25동란이 나기 2년 전으로 참 가난했고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제대로 없는 시절이었다. 그런 가난한 아이들에게 깜작 놀랄 일이 생겼다. 내가 확실히 기억하는 일로 4월인가 5월인가 반 아이들을 다 데리고 나가 출입구 계단에 키 크기대로 줄 지어 앉혀놓고 사진사를 불러 기념촬영을 한 일 때문이다. 그 시절 졸업 사진이 아니면 학교에 사진사를 불러 사진을 찍는 일이 거의 없었던 때였다. 그때 나는 정말 오랜만에 사진을 찍었다. 물론 누님이 고추 내놓은 나를 안고 찍은 카메라 사진이 있긴 하였지만 하여간 그때 외 처음 찍는 사진이었다. 아이들 대부분 다 나와 같은 처치라 사진 찍히기에 부끄러워하면서도 잘 찍히겠다고 고개를 빼들고 검은 보자기를 덮어 쓴 사진사와 커다란 사진기를 응시했다. 다 눈을 똥그랗게 뜨고서.
뿐만 아니라 선생님은 이야기를 잘 해 주시기로 유명했다. 선생님의 이야기는 매 번 달랐는데 국어를 가르치는 시간이면 으레 짤막한 얘기 한 토막 맛보기로 하셨다. 그때 들은 얘기가 무엇이었는지 50여년이 지난 지금 하나도 생각이 나지 않지만 하여간 우리는 귀를 한껏 쭝끗해 가지고 선생님 이야기 한 구절이라도 잘 들으려고 발싸심을 했던 것이다. 아마 내가 동화작가나 소설가가 된 가장 먼 계기가 바로 선생님의 구수하고도 재미난 이야기 덕분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3학년 겨울방학 때 작문(글짓기) 숙제가 있었다. 그때 나는 <눈>을 주제로 글짓기 숙제를 해 갔다. 지금 그 내용이 생각나지 않지만 아마 눈이 오는 날 우리 형제들이 눈싸움을 하던 일을 쓴 듯하다. 선생님은 그 작문을 반 아이들 앞에서 읽게 하고
“아주 잘 쓴 글이야. 앞으로 훌륭한 문인이 되겄어.”
하고 칭찬을 해 주셨다. 내가 글쓰는 사람이 되자는 황당한 결심을 하게 된 것은 바로 그 일 때문이었다. 사실 중학교 때 내가 쓴 글이 3년동안 한 편도 교지(校誌)에 실린 적이 없다. 내가 쓴 산문은 너무 길어서 내가 지은 시는 너무 시시해서 국어 선생님 눈에 들지 못해 실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초등학교 3학년 때 정호원 선생님의 칭찬 한 마디는 나를 일으켜 세우고 시인이나 소설가가 되는 꿈을 키워 나갈 수 있게 했던 것이다.
◆ 구연동화집 『용궁의 개』
수업 시간에 들었던 선생님의 이야기는 후에 한 권의 책으로 엮어져 나왔다. 그래서 우리는 선생님께서 들려주신 이야기가 어떤 이야기였는지 알 수 있었다.
선생님은 그동안 구연동화에 대한 열정을 키우시면서 연구하여 <소년동아>와 월간지 <어깨동무> 등에 많은 동화를 발표하셨다. 이것은 1970년대 초반부터 였는데 <소년동아>에 동화 ‘좋은 원님’ 등 5편을 발표하셨고, 당시 초등학생들에게 인기가 높았던 월간지 <어깨동무>에 ‘조이삭과 스님’ 등 많은 동화를 발표하여 구연동화의 새로운 경지를 닦으셨던 것이다.
남다른 노력으로 중앙지에 동화를 발표하시면서 그간에 아이들에게 들려주시고 발표한 작품들 중 아주 재미나고 아이들에게 유익한 이야기들만 모아 구연동화집을 출판하셨는데 그 당시 보기드문 일이었다.
구연동화집 『용궁의 개』는 모두 41편의 이야기를 실었다. 표지화, 삽화, 제자(題字)는 박천웅 선생이 장정은 황광주 선생이 출판사는 부성문화사로 1976년 3월 10일 발행으로 모두 84면이며 정가는 500원이었다.
목차를 살펴보면 우리나라에서 조상 대대로 전해져 오는 전설과 설화들이 있는가 하면 <검사와 여선생> 같이 신파 연극으로 <신소설>류의 소설로 왜정 때부터 인기가 높았던 소설까지 그 속살만 빼모아 놓기도 하였다.
* 실린 구연동화 41편의 목록
여우와 생선장수, 피리를 잘 부는 할아버지, 귀뚜라미가 된 효자, 쥐에게서 몰매를 맞다, 노다지 보석산, 이상한 피리, 이상한 달걀, 만다라산의 사자, 용궁의 개, 꽃피우는 할아버지, 첫 꿈과 도깨비, 토끼와 용왕국, 효자와 홍시, 지혜로운 원님, 조알 10개와 소, 약코, 빼고와 생쥐 아내, 세가지 보물, 곰과 농부, 은혜 갚은 바둑이, 사랑의 삼총사, 토끼 나라, 검사와 여선생, 나뭇가지에 꿴 호랑이들, 금 노루, 해와 달이 된 이야기, 이윤복과 일기장, 개미와 포수, 미가와 원숭이, 까치의 은혜, 은혜 갚은 두루미, 매구와 세 가지 병, 복남이의 죽음, 오뉘 탑, 며느리의 선행, 김유신과 천관사, 도둑질한 아이와 어머니, 사자 가죽을 쓴 나귀, 개미, 아들과 그림 사자, 원숭이의 고기잡이
표제작인 ‘용궁의 개’는 마치 흥부와 놀부 얘기와 비숫하다.
형은 심술궂고 욕심이 많고 동생은 착하고 가난하다. 흥부처럼 형에게서 쫓겨난 동생은 어찌어찌 용궁으로 가서 용왕이 소중하게 여기는 보물 개를 얻어 온다. 이 개가 하루 한 마리씩 산돼지를 몰아왔는데 동생은 그것을 팔아 결국은 풍족하게 살게 된다. 이 일을 알게 된 욕심쟁이 형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개를 동생에게서 뺏어 자기 집으로 끌고 가보니 산돼지는커녕 자신과 식구들을 해코지만 했다. 성이 크게 난 형은 개를 때려죽이고 만다. 동생은 죽은 개를 찾아와 집 뒤 동산에 묻어주었는데 그 무덤에서 대나무가 솟았다. 대나무가 자꾸자꾸 자라 마침내 하늘까지 닿아 하늘나라 쌀 창고 바닥을 뚫고 말았다. 그렇게 되니 하늘나라 쌀이 동생네 집에 쏟아져 내려 벼락부자가 되었다. 또 욕심쟁이 형이 가만있을 리가 없었다. 개뼈다귀를 파와서 자기 집 마당 가운데다 묻고 쌀이 쏟아지기를 기다렸다. 아니나 다를까? 대나무가 나더니 쑥쑥 자라서 하늘나라까지 올라갔는데 드디어 하늘님 똥구멍을 팍! 쑤셔 버렸다. 하늘나라 거름간에서 쏟아져 내린 것은 쌀도 보리도 아니고 똥물에 거름 따위 냄새나는 것들이었으니 욕심쟁이 형은 그것에 파묻혀서 죽고 말았다.
41편의 동화들은 표제작과 비슷한 권선징악의 이야기들로 선생님께서 다시 재구성하고 일선 교사들이나 유치원 등 동화구연가가 적절한 변화를 주면서 구연하기에 편하도록 해 놓았다. 시의 적절한 비유와 해학이 곳곳에 숨어있고 그 비유와 해학이 결코 쉽게 웃어 넘어가지 않고 동화를 듣는 아이들의 마음에 메아리치면서 착하게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책머리에 <부모님들에게>란 부제를 붙여 책을 내게 된 동기를 밝히고 있다.
“즐겨 동화를 읽게 하기 위하여
근래에 와서 상당수 어린이들이 동화를 즐겨 읽고, 구연동화는 무조건 즐겨 듣는 경향인 것 같다. 이런 경향은 보다 더 많은 어린이가 보다 더 재미있게 많은 동화를 읽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린이 자신이 읽어 이해할 수 있는 정도의 동화를 선정하여 읽게 한다든가 저학년에서는 교사가 읽어 들려준다든가 구연동화로서 들려주어 흥미를 갖게 하면 자기가 읽을 수 있는 것을 찾아서 읽어 나가게 될 것이다.
본격적인 동화 일기 지도는 3학년 때부터 이루어지리라 생각한다.
3학년이 되면 옛 이야기나 동화의 줄거리를 잡는 능력도 확실해 지고 독서의욕도 높아져서 꽤 긴 문장도 읽어 나갈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4학년이 되면 꽤 이지적으로 동화 속에 담겨진 정신을 찾아 낼 수 까지 있게 되므로 내용을 파고 들어가 주인공의 입장과 그 이야기의 정경들을 상상하고 추리해 나가면서 읽을 수가 있게 된다.·······”
그러면서 구연동화, 동화 읽기 지도를 위한 조언을 구체적으로 밝혀 놓았는데 이야기를 아이들이 스스로 한다든지, 이야기회를 만들어 특정 시간을 이야기 하게 한다든지, 읽고 싶은 동화를 스스로 찾게 한다든지 독서판을 교실에 설치해 놓고 독후감을 게시한다든지 하여 동화를 많이 읽게 하도록 하라고 강조하고 있다.
선생님은 말미에,
“······꾸준히 동화 읽기를 계속해 나간다면 어린이들은 굉장히 많은 동화를 바르게 즐겁게 읽게 되어 어린이들은 상상력이 풍부해질 것은 물론, 아름다운 마음씨, 부드러운 마음씨를 지닌 사람다운 사람으로 자라게 되어 보다 인생을 즐겁고 보람 있게 살 수 있게 되리라 믿어지는 바이다.” 라고 결론을 맺고 있다.
<용궁의 개> 외에 글짓기 지도서로 <쉽게 배우는 글짓기 공부>가 있다.
◆ 선생님의 수필
선생님은 <창녕문학> <창녕문화> 등 문예지와 여러 신문 잡지에 많은 수필을 발표하셨다.
선생님의 수필 주제는 대부분 교육자로서의 성찰과 우국지사의 면모를 내비치는 나라 사랑이었다. 선생님께서는 오호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임하신 후 마을 길가에 무궁화를 대량 심어 나라꽃 사랑을 몸소 실천하신 분이셨다.
<창녕문학> 24집(2000년)에 발표하신 수필 「다시 생각해 보는 단군신화와 단군상 수난」에서 선생님은 단군신화의 전승과 계승에 큰 관심을 보내고 있다. 사실 한국 역사를 연구한다는 학자들이 단군신화도 내버리고 고조선조차 묵살해 버리는 현실에서 선생님은 북한의 예까지 들어가면서 단군신화를 옹호하고 단군을 한국인의 선조로 받아들일 것을 강조하신다. 최근 이전하여 문을 열었던 국립중앙박물관조차 전시실에 게시된 우리나라의 연표에 고조선이 빠져 있었다는 신문보도를 보면 선생님께서 하늘에서 얼마나 분개하실까?
“······ 신화는 곧 그 민족의 원시 공동생활의 소산인 만큼, 황당무계하기 만한 이야기 가운데 그 민족의 원초의 생활과 지식과 이상이 반영 묘사되어 있다.
한국사에 전승되고 있는 국조 신화의 중요한 것들을 들면 신시시대의 단군신화, 고구려의 주몽신화, 신라의 혁거세신화와 석탈해신화, 김알지 신화, 가락의 김수로신화, 고려의 왕건신화 등 일곱 가지다. 그중에서도 신이 주인공이 되고 있는 엄밀한 의미의 신화는 단군신화로서 오랜 역사를 통하여 그 주인공은 유일의 민족신으로 숭앙되어 오고 있다.······”
단군신화의 생성과 그 과정을 재미나게 풀어 나가면서 단군신화가 통일된 단일 민족의 자존과 자부심 즉 민족 주체의식이며 자주정신임을 강조하셨다.
“···· 한말에 사직이 기울어질 때 자주 독립운동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으며, 일제하에서는 만주로 중국으로 망명한 사가(史家)들과 지사(志士)들 사이에서 대종교(大倧敎)로까지 발전하였다.····”
고 밝히면서 단군 신화야 말로 민족성이나 고유사상의 원형으로 살려야 한다고 하셨다.
◆ 선생님의 즐거움
정년퇴임을 하신 후 선생님은 축구나 야구 경기가 마산에서 열리면 경기를 보러 자주 나들이를 하셨다. 아마 고향 마을 학계리 명지에서 무료함을 달래고 그간 관심이 많았던 운동 경기를 마음 편하게 마음대로 보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또 경남신문 등 신문에 나는 낱말 맞추기 퍼즐을 즐겨 하셨다. 낱말 퍼즐은 네모난 칸에 가로 세로 주어진 풀이말을 읽고 서로 연결이 되어야 정답이 되는데 간혹 애매한 문제가 있어 맞추기에 힘들기도 하였다. 선생님께서 애매하거나 알쏭달쏭한 문제가 있으면 곧잘 김현곤 선생님께 전화를 하셨고 마침 댁에 계시지 않아서 김 선생님과 통화가 되지 않으면 내게 전화를 하셨다.
“현우야, 이러 이러 한 게 뭐꼬?”
선생님께서 정답을 모르실
리 없지만 아마 김현곤 선생님의 답을 못 들었으니 제자의 시원찮은 대답이라도 들으셔야 마음이 놓였던 모양이었다. 간혹 즉답을 하기에 애매한 것이
셍기면 한글사전을 뒤적여 선생님께 다시 전화를 드리면,
“맞다 맞어. 현우 니가 그렇게 말하니 틀림없다.”
“아이구! 선생님 제 공부 시키려고 질문하셨지예? 제가 한글사전 뒤지고 정답 맞추느라 땀깨나 흘렸습니더.”
“내가 이래저래 현우 덕을 본다 아이가!”
하시면서 신문사로부터 퍼즐 맞춘 기념품으로 탁상시계를 여러 개 탔다고 자랑을 하셨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남지에서 갈 곳이 마땅치 않았던 모양이었다. 간혹 만나는 예전의 동직자 친구들 외에 날마다 어울려 등산이나 낚시를 갈 친구가 마땅한 분이 없었든지 낚시를 혼자 다니신다고 하셨다. 소일하실 일거리가 있든지 아니면 노인들을 위한 사회교육시설이나 휴게시설이 전연 없는 곳이라 선생님은 간혹 마을 노인정에 나가셔서 마을 노인들과 어울리신 모양이었다. 그런데 노인정에 모여든 노인네들이 담배를 피우고 화투에 장기를 두는데 선생님은 그게 싫었던 모양이었다. 거기다 변변찮은 안주에 소주를 노인네들이 즐겨 마시는데 선생님은 맥주만 고집하셨다. 그러니 아침에 노인정에 나가실 때는 맥주를 한두 병 쯤 사들고 가셔서 다른 노인들이 소주를 마실 때 선생님은 맥주를 마신다고 하셨다.
시원찮은 제자가 자주 문안 전화도 드리지 못하고 내 할일에만 코가 빠져 찾아가 뵙지 못하지 오래 되었다. 최근 운동 경기 구경을 다니시지 못하시는지 마산에 오시면 주시던 전화도 없고, 신문의 낱말 퍼즐 풀기도 그만 두셨는지 전화도 뚝 끊겼다. 또 빠지지 않고 꼭 참석하시던 창녕문협의 모임에도 전과 달리 최근에는 뜸하시더니 박상선 회원으로부터 부음(訃音)이 날라 들었다.
선생님의 즐거움은 제자를 키우는 것이었을 것이다. 교직생활 사십 여년 많은 제자를 키우셨고 또 곧게 부드럽게 인자함을 잃지 않으시고 맑게 밝게 사셨다.
이제 선생님의 명복을 빌면서 제자로서 다하지 못한 것을 저 세상에서 가셨더라도 용서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
정호원 영원한 스승님과 문학
김 현 우
◆ 이야기 선생님
글을 사랑하고 문인의 길로 인도해 주신 세 분의 스승이 계신다. 한 분은 초등학교 때의 스승이요, 또 한 분은 고등학교 때 문학의 길을 열어 주신 선생님이요, 한 분은 바로 곁에서 이것저것 챙겨주시며 깨우쳐 주시고 내 문학의 지평을 넓혀 주신 선생님이다.
초등학교 때의 스승님은 곧 수필가이시며 아동문학가인 정호원 선생님이고,
고등학교 때의 스승님은 시인 강홍운 선생님으로 문학개론을 고1 때 강의를 하셨는데 문학에 대해서 까막눈이었던 나를 눈뜨게 하고 문학수업을 단단히 해 주시고 등단을 길을 열어주신 선생님이며,
수 십년 바로 곁에서 이런저런 깨우침을 주신 스승님은 수필가 김현곤 선생님으로 <창녕군지> 편찬을 위해서 1980년대 창녕군 구석구석을 답사할 때 길가 풀 한포기의 이름부터 흘러가는 물, 하늘에 떠가는 구름에 까지 해박한 지식을 펼쳐 가르쳐 내 좁은 문학의 영역을 넓혀 주시고 깊게 하셨던 분이다.
다 아는 일이지만 잘 가르치는 스승 없이는 결코 잘난 제자가 있을 수 없다. 나는 비록 잘난 제자의 대열에 끼일 수 없을만치 둔재에 불과하지만 세 분 선생님의 제자들은 내가 알기에도 훌륭하게 자라고 큰일을 하는 재목으로 자라 그야말로 청출어람(靑出於藍)의 고사를 생각하게 하는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