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남전과 함께
소설

돈구멍

by 남전 南田 2007. 3. 9.
LONG
 

그들의 대화는 서로 뻔히 아는 처지였지만 탈이 난 과정이나 겪어온 고통의 나날들에 대한 경험담을 나누는 것으로 시작했다. 사실 동병상련이란 것이 묘한 감정이어서 점점 남들이 들으면 망측하다고 할 그런 얘기를 스스럼없이 주고받게 되었다. 한소분은 그녀와 똑 같은 곳이 아픈 사내를 만나 얘기를 하면서 스스로 경계의 담을 아무런 생각도 없이 무너뜨리고 말았다. 지저분하기 이를 데 없는 그곳, 누구든지 제3자에게 아니, 부부 간이더라도 그곳에 대한 얘기를 꺼리는 판에 그들은 초면임에도 불구하고 꺼리낌없이 칙칙하기 이를 데 없는 그곳을 주제로 대화하였음에도 불결해 하거나 부끄럽다거나 추접고 더럽다는 느낌이 추호도 없었다.

진정한씨가 먼저 자신의 증상에 대해 얘기를 시작했다.

“이 병이란 게 참 지저분해서 쉽게 이야기할 형편이 아님을 나도 알고 남도 알아서 병 최급도 못 받고 서로 모르는 척 지내기 일 수지. 사실 병원에 하루라도 빨리 와서 문제를 해결하는 게 고통을 덜 받는데 말이요. 하지만 나도 가까운 친구는 물론 마누라에게도 오랫동안 감추고 감춰 왔으니 그 고통이야말로 어디 하소연할 곳도 막연하고 견뎌 내자니 감내하기에 힘들었어요. 내가 참다참다 못해 병원을 찾기로 결심하기까지 정말 몇 년, 몇 달이 걸렸지요. 차라리 암이니 심장병이니 하는 병처럼 금방 치료받지 않으면 목숨이 경각에 이르는 그런 것이었다면 아들 딸 며느리 사위에게 다 알리고 응급차에 실려 가거나 이런 작은 개인병원이 아니라 서울 큰 종합병원 신세를 졌겠지. 그런데 이놈으 병이란 게 설사 자식들에게 친구들에게 이실직고를 해도 중환자나 병자 취급을 않고 실실 웃을 꺼란 말이야.”

“좀 참아 봐라. 다 아는 병인데 그게 무슨 병이고? 우리 친구들도 그러데요.”

“그래, 거 뭐 좌욕(坐浴)하면 된다더라. 뭐 그리 엄살을 떠노? 사람이 평소 얼마나 지저분했기에 그런 거야? 깨끗하게 좀 살아라, 하는 식이제.”

그러면서 진정한씨는 그간에 받은 고통을 엄살을 섞어 얘기했다.

“하여간 나는 점점 변소에, 요새 좀 점잖은 말로 화장실이라 하데? 화장실 가기가 무섭고 겁나고 공포의 시간이 되었으니 고민꺼리일 뿐만 아니라 당장 결판을 내야할 당면한 최대의 과제로 대두된 거지요. 어느 시러배 탤런트가 약 선전을 하러 텔레비전에 나와서 뭐 화장실에다 책을 가져다 놓고 일을 보면서 독서를 하니 바로 화장실이 독서의 공간이요 창조의 서재가 되었다고 떠벌렸지만 얼마나 변비가 심했으면 책을 30분이고 한 시간이고 읽어야 똥이 나온단 말이요. 변비가 심하면 그걸 고쳐야지 독서한다고 해결되나? 그게 오래되면 십중팔구 나처럼 화장실이 공포의 공간이 돼 갈 때마다 비명을 치고 신음을 토하게 될 걸. 그러므로 똥 누는 똥구멍, 이거 너무 지저분하게 들릴지 모르니 우리 돈구멍이라 합시다.”

“젊은 사람들은 똥꼬라 하는데요?”

“똥꼬? 여하튼 돈구멍에 탈이 나면 화장실 가기가 비가 부슬부슬 오는 그믐날 밤 도깨비가 나온다는 서낭나무 외진 길 가기를 겁내는 애들보다 더 겁나게 되는 것이제.”

진정한씨는 4, 5년 전에 죽은 아내에게도 여러 해 감추어 오다가 변기에 피를 한바가지나 쏟아 온통 벌겋게 되어 너무 놀라 비명을 치는 바람에 아내도 알게 되었지만 여하튼 끙끙 앓으며 돈구멍 탈난 것을 감추며 살아왔다. 진정한씨는 물론 사람들은 대게 돈구멍의 탈에 관해서는 불결하고 더럽고 부끄러운 얘기라 입에 올리기조차 꺼려한다. 의사 선생님께서도 그걸 아시는지 그 병에 대한 수술 치료 전문병원임에도 간판을 <학문외과(學文外科)>라 붙여 놓았으니 이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떳떳이 제 치료 전문 과목이 뭐요 하고 밝히면 그만인데. 의사 선생님부터 그러니 무지몽매한 일반인들이야 어찌 그 더럽고 지저분하고 칙칙한 돈구멍의 탈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얘기를 한단 말인가? 성병 걸린 사내처럼 쉬쉬하면서 남모르게 비뇨기과를 찾아가듯 가야 하는데 <학문외과>란 간판 외에는 그냥 외과뿐이니 전문 병원을 찾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 아닐 수 없다고 진정한씨는 생각해 왔다.

참는 것도 한도가 있기 마련, 드디어 용기를 내 수술을 하기로 결단을 내렸지만 그 결단을 하기까지도 다시 몇 달이 걸렸다.

“그러다가 확신을 갖고 수술하기로 결심한 것이 건장한 체구를 가진 내 친구 박사장이 얼마 전에 수술을 했다는 얘기에 용기를 낸 거지. 박사장이란 친구는 건설업을 하는 사장인데 체구가 우람하고 강건해서 환갑 진갑 다 지냈으면서도 축구도 하고 지리산 오대산 월악산뿐만 아니라 전국 산이란 산은 등산을 다니는 사람이지.”

그때 한소분이 깜짝 놀란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머? 친구가 환갑 진갑 지냈다면 아저씨도 그렇겠네요? 나는 50대로 보았는데.”

“정말? 어이구 고맙네? 이왕이면 아저씨라 부르지 말고 젊은 오빠라 불러줘.”

“정말 50대 아녜요? 정말 젊어 보여요.”

“어허! 늙어도 한참 늙었제. 이제 뒤에 있는 돈구멍도 고장이 났지만 앞에 있는 것도 고장이 나서 쓸 모가 없는걸.”

“설마? 그럴 리가?”

“소분씨 같은 젊은 여자가 어찌면 고쳐 쓸 수도 있을 란가?”

“고쳐 쓰요?”

의아해 하다가 금방 그 말뜻을 알았다는 듯 여자는 음흉한 말을 하는 사내의 옆구리를 툭 치며 웃었다. 그들의 화제는 뒤에 있는 돈구멍에서 슬슬 앞쪽 구멍에 대한 얘기로 옮겨 갔다. 그런데 그들은 전연 불결하다거나 부자연스럽다거나 성희롱과 다름없는 음담패설이라는 느낌을 갖지 않았다. 요새 성추행이니 성희롱이니 해서 잘못하다간 점잖은 국회의원께서도 낭패를 보는 판에 진정한씨는 금방 만난 젊은 여자에게 헤서는 안 될 말을 거침없이 했고 그걸 들은 젊은 여자는 조금도 부끄러워하거나 싫다거나 놀라워하지 않고 이때껏 주고받은 돈구멍 얘기와 다름없는 반응으로 응수했던 것이다. 한소분은 성격이 직선적이고 단순하면서도 솔직했기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같은 병으로 입원 수술을 받았다는 동지애적인 심정적인 요인이 상승작용을 했을 것이었다. 사실 뒷구멍 애기나 앞 물건 얘기나 다 공개적으로 말하기에 꺼리고 숨기고 슬슬 피하는데 그들은 한창 돈구멍 얘기에 열중하다보니 그 앞 쪽에 대해서도 숨길 게 없다는 것에 이심전심 공감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진정한씨는 육십 중반의 점잖다면 점잖은 사람이고 제과점을 하며 사는 마을에서는 지방유지로 알아주는데 젊은 여자에게 할 말이 따로 있지 좀 심한 농담을 했나 싶어 얼른 화제를 돈구멍으로 돌렸다.

“박사장은 정말 건강하고 튼튼한 운동선수 같은 체력을 가진 사람이었어. 그런 사람이 치질 수술을 했다니 내가 깜짝 놀랐지 뭐요. 치질이 있는 줄 전연 몰랐거든, 수술이 너무 간단해서 그날 바로 퇴원해 버렸다는 거야. 갑자기 피가 흘러서 그랬다더군.”

“저도 그랬어요. 며칠 전 하혈이 심했어요. 깜짝 놀랐지 뭐예요. 전 처음에 월경인 줄 알았죠. 피가 너무 많이 흘렀거든요.”

“아니야. 피가 조금 흘러도 물에 섞이면 온통 피처럼 보이지.”

“그럴 거예요. 하여간 그거는 아니고 전 변비가 심해서 고생한 적은 있어도······ 그런데 똥꼬에서 피가······ 찢어 졌데요. 치질이래요. 당장 수술하라지 않아요? 병원에 오니. 나 Y정수기 사원이거든요. 정수기 필터도 갈아주고 관리해주는 사원, 코디예요. 난 우리 회사 비데를 쓰거든요. 변을 보고난 후 비데 리듬을 딱 누르면 물줄기가 강하게 나왔다가 약하게 나왔다가 리드미컬하게 나오면서 똥고를 씻어주거든요. 물이 강하게 나올 때는 구멍이 싹 열리면서 안까지 깨끗하게 씻기거든요.”

“저, 정말이요? 진작 나도 그걸 쓸 걸. 난 여자들이 오줌을 누고 나면 씻는 물건이 비데 인줄 알았더니 그런 기능도 있었구먼.”

“내가 누구예요? 정수기 공기청정기 연수기, 비데기 렌탈해 주고 다니면서 필터도 갈아주고 관리해주는 코디예요.”

한소분은 정수기 빌려주고 관리해주러 다니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성격이 솔직해지고 비데 얘기가 나오니 항문을 씻는 요령까지 거침없이 설명을 했던 것이다.

“맞아! 박사장이 비데를 쓰고 있다더군. 그 사람이 돈구멍에 털이 많아서 화장지로 닦아서는 잘 안 닦여 여러 해 전부터 비데를 쓰니 편리하더라고 그래,”

“남자들은 다 똥꼬에 털이 많아요?”

한소분의 뜻밖의 질문에 진정한씨는 잠시 머뭇거렸다. 남자들 돈구멍마다 관심을 가지고 바라본 적이 없으니 뭐라 대답을 해야 할 지 얼핏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마 그녀가 비데기를 팔러 다니는 외판원 노릇을 하니 비데기를 설명하자면 여자들에게도 유리하고 돈구멍에 털이 많은 남자들에게도 필수품이라는 말로 권유하려면 그의 확인을 듣고 싶었던 건지 몰랐다.

“음······ 아마 그걸 껄. 거 뭐냐? 무모증 있잖아? 털이 있을 곳에 없는 거 말이야? 그거처럼 간혹 돈구멍에 털이 없는 사람도 있겠지만······”

“무모증이 뭐예요?”

“어? 몰라? 정말?”

“모르기는 왜 몰라요? 모르는 척 해봤죠.”

한소분이 또 웃었다. 진정한씨는 그만 젊은 여자에게 끌려 들어갔다. 주책없고 채신머리없는 소리를 해대면서. 그런데 젊은 여자나 늙은 남자나 주위가 어둡고 적막한 분위기 때문이었는지 점점 얘기는 금방 만난 사람들의 행동반경을 넘어서고 있었다. 물론 손을 잡았다거나 갑자기 애정을 표하는 포옹이나 입맞춤 따위는 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대화는 수십 년을 살아온 부부간의 이야기 내용을 넘어서고 남이 들으면 음담패설에 성희롱이라 할만 했는데도 끊으려 하지 않았다. 똑 같은 치질 환자로 수술을 함께 받았다는 비밀을 서로 공유했다는 생각은 더 발전해서 은밀한 일들도 얼마든지 공유할 수 있다는 유대감이 형성되어 그럴까? 진정한씨는 옆길로 나간 걸 다시 돈구멍으로 급히 돌렸다.

“길가 광고판을 봤지. 항문클리닉 우짜고 했는데 그게 마음에 들어 이 병원엘 왔지. 학문이 아니고 똑바로 밝혀놓은 게 말이야. 와서 진찰을 받으니 심하다는 거야. 우리가 보통 얘기하는 암치질이지. 난 수술을 하면서 대장내시경도 했어. 이거 과민성대장 증후군이라던가? 여하간 차가운 음료수 맥주 등등은 먹었다 하면 배탈이 나는 것이 대장 내시경을 꼭 해야겠다 싶었지, 나이 육십이 넘었으니 말야. 소분씨도 대장 검사 해 볼걸 그랬어? 젊은  사람에게야 필요 없겠지만. 혹시나 소장 대장 직장에 이상이 없나 확인하는 차원이지만. 어차피 관장을 하는데?”

“의사 선생님이 간단히 수술만 하면 그만이래요.”

한소분은 대수롭잖게 대답했다. 그러나 진정한씨의 말이 씨가 되었는지 모르지만 한소분이 이후 겪어야 할 일에 대해서는 전연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대장 내시경 검사를 위해 해야 할 일이 장 청소이다. 약을 주는데 검사 전날 저녁을 굶고서 밤 7시 쯤 병원에서 주는 물약을 반쯤 먹고 물을 3컵 마시고 다시 9시에 약을 마저 먹고 물을 3컵 마시라고 했다. 전에 변비가 심할 때 아래 돈구멍으로 관장약을 넣어본 경험이 있지만 약물을 먹고 하는 관장(灌腸)은 처음이라 물을 4컵이나 먹고 물이 잘 내려가도록 방과 거실을 한 시간이나 걸어 다니면서 운동을 했다. 물을 4컵이나 마시고나니 목구멍까지 물이 차오르는 듯 속이 더부룩하고 약물 맛도 이상하고 헤서 참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이튿날 더더욱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대장 내시경 검사를 하는데 바지를 벗고 검사복을 입고 검사대까지 올라가 수면 검사를 위한 주사를 맞은 것 까지는 기억하는데 검사가 어떻게 언제 끝났는지 검사 결과 암 덩어리가 있는지 어땠는지 모르는 채였다. 제과점 김전무와 간호사가 그를 부축하고 수술실로 옮겨진 것과 수술대에 올라 엎드리라는 말에 엎드려 팔과 꼬리뼈에 주사를 맞은 것은 어렴풋 기억나지만 그 외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깨보니 김전무와 밤낮으로 제과점에 와서 노상 그와 함께 노는 친구 황달구가 병실에 있었다.

“어머! 사모님은 왜 안 왔어요? 설마 혼자 수술하라고 놔두고 볼 일 보러 가진 않았을 텐데.”

“마누라? 마누라는 벌써 죽었어. 암으로······· 그래서 내 물건이 쓸모없다고 했잖아? 그것도 자주 사용해야 제 성능을 지니는데 말이야.”

진정한씨가 그러자 한소분은 잠간 침묵했다가,

“들은 얘긴데요, 마누라 옆에 가면 힘을 통 못 쓰는 남자가 있었데요. 아마 아저씨처럼 고장이 났나 봐요.”

“아저씨 보다는 젊은 오빠가 나은데?”

“하여간 그랬는데요, 어느 날부터 갑자기 싱싱해져서 마누라에게 잘 해 주더래요. 이거 우짠 일인가 싶어 가만히 살펴보았더니 그 일 하기 전에 팬티 바람으로 방밖으로 나가더래요. 뭘 하나 싶어 살짝 따라 나가보았더니 ‘저 여자는 내 마누라가 아니다! 내 마누라가 아니다!’ 글쎄 남자가 그러더래요.”

둘은 웃어댔다.

“완전히 심리전이군,”

한소분은 결혼 15년차인 자기 남편도 그런 지경이 되었는데 어떨 적에는 고단하다면서 할일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바람이 나서 다른 여자를 보고 다니는지 모르지만 남편은 보일러도 설치하고 방 수리도 하고 화장실 변기, 세면기 등등 설비공사를 하는 사람인데 최근 일거리가 많아서인지 집에 돌아오면 고단하다고 제 옆에 오기를 게을리 한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했다.

“남자들 다 그렇데요? 자기 마누라와는 재미가 없다고·······, 아저씨도 그랬어요?”

“거 뭐······ 바람피우는 사내들이 내세우는 핑계가 그런 거지 뭐. 소분씨는 관상을 보니 참 재미있을 생김새인데?”

“무슨 얘기예요?”

“그거 있잖아? 결혼할 때 보는 궁합 있잖아? 그거 궁합이 바로 부부간의 성생활이 조화롭겠느냐 않겠느냐? 하는 문제를 예견하는 건데. 난 한걸음 더 나아가 내 나름대로 여자나 남자를 보면서 서로 어울리나 어쩌나 물건들을 가지고 점을 치지. 예를 들자면 궁합이 좋으면 성생활도 좋고, 그게 나쁘면 그 생활도 부조화로 부부생활이 원만치 못하다 이거야.”

“난 결혼을 스물 한 살에 했는데 아무 것도 몰랐어요. 첫날밤에 덩치가 큰 신랑이 황소같이 콧김을 씩씩 품으며 달려드는데······· 난 그러는 게 보통인가 하고 참아냈지요.”

“정말로? 그랬다면 둘 다 순진하다 해야 하나, 무식하다 해야 하나?”

“무식한 거죠 뭐. 정말 전 연애도 못해보고 아무 것도 모르는채 결혼했다니까요.”

“요새는 성교육이니 뭐니 하면서 노골적으로 그거를 가르치는데? 그 뭐 구 뭐시더라? 텔레비전에 나와서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는 거 보고 난 놀랬어.”

진정한씨는 한참이나 시답잖은 소리를 했다. 그런데 한소분은 그게 재미가 난다는 아니 진지한 표정으로 묻고 또 물었으므로 얘기는 점점 외곬으로 빠져들어 부부나 연인 사이에 주고받을 그런 것을 떠들었다. 아니 그 한계를 넘어서서 남자들끼리 주고받을 우스갯소리까지 했다.

수술 받은 엉덩이가 아파 더 이상 앉아 견딜 수 없어 진정한씨가 먼저 일어나려 했다. 그렇지만 한소분은 남자를 붙들고 그녀의 부모, 고향 얘기, 어릴 적, 고등학교 시절, 친구, 짧은 직장 생활, 결혼, 신혼생활, 임신, 육아, 15년간의 가난, 돈벌이 등등 얘기를 줄줄이 털어 놓아 일어나지를 못했다.

한소분은 남편과 결혼하게 된 경위도 솔직하게 털어 놓았다. 나이 스물한 살에 아무 것도 모르고 남편의 저돌적인 공격에 결혼을 했는데 사랑이 뭔지 남자가 뭔지 순진해서 세상사 아무 것도 몰랐다고 했다. 공사판을 떠돌며 날품팔이 하던 남편이 결혼을 위해 고향 김해 촌마을을 떠나 잠시 창원 금성사에 취업을 했던 모양이었다. 한 회사 같은 부서에 근무했던  한소분을 찍어 놓고 본인을 제쳐두고 친정부모에게 달려와 청혼을 했던 것이다. 농사짓는 부모들도 그렇고 막내딸로 부모의 보호막 아래 아무 것도 모르고 살았던 그녀는 듬직한 체구의 사내가 믿음직했을 뿐이었다. 결혼을 하고보니 사내가 그녀와 같이 근무했던 회사를 때려치우고 고향으로 가자했다. 그때 막 제대를 했던 시동생과 함께 설비공사 사업을 하면 큰돈을 번다고 했다. 하지만 신혼의 방 한간도 그녀가 직장생활로 저축한 돈으로 얻어야할 지경으로 사내는 큰소리만 쳤지 빈털터리였다. 연탄아궁이나 보일러 수리 미장일을 하는 신랑은 나이가 그녀보다 여덟 살이나 많았다고 했다.

이내 아이를 둘이나 낳았고 우유 한 병 사 먹이기에 노심초사 고생을 해야 했다. 일감이 많다는 창원으로 이사를 나왔다. 친정 부모나 시부모에게 애기를 맡겨 놓지 않고 애기를 들쳐 업고 우유 배달, 신문 배달, 학습지 배달을 했다. 보험 외판원도 하고 슈퍼 판매원도 하고 신혼 초 얼마간 외에는 여러 일을 마다 않고 뼈 빠지게 뛰어야 했다. 남편의 수입이 일정하지 않았기에. 억척같이 좌우 곁눈 한번 살피지 않고 푼돈 모으기에 온 힘을 다했다. 얼마 전부터 Y정수기 외판원이 되어서야 20평짜리 전세 아파트도 얻어 들었다. 그러고 보니 결혼 15년, 이제는 남편도 일거리가 많아 돈을 제법 벌지만 중학생인 큰 아들, 초등학교 6학년짜리 둘째의 학원 과외비에 생활비는 전적으로 그녀가 정수기 필터 교환하러 다니는 관리원 수입에 의존한다고 했다. 남편의 수입은 그들 명의의 아파트를 분양받기 위해 저축하고 있었다.

“그래, 내가 소분씨 관상을 보고 그랬지? 부부 화합하고 재미있을 꺼라고. 소분씨 같이 입이 얼굴에 비해 적당하게 작고 입술이 예쁘고 도톰하면서 건강한 혈색이면 돈구멍 앞에 있는 그것도 역시 똑 같아서 남편에게 잠자리의 즐거움을 줄 뿐만 아니라 남편에게 항상 음으로 양으로 도움을 주는 상이제. 예를 들자면 와리바시 다리, 아, 나무젓가락 같이 삐쩍 마른 다리 말이야, 여자 다리가 그리 생겼으면 십중팔구 남자에게 도움을 못주지. 아, 제과점 40년에 도통을 했다니까? 빵 먹으러 오는 손님들 몰래 내가 다 관상을 보는 거야. 저 여자 물건은 어떻겠다, 그거 하면 좋겠다, 별로 겠다······.”

“아이, 희한한 관상쟁이가 있네.”

한소분은 웃었다. 그녀는 자신의 아랫도리를 훤하게 사내가 들여다보고 있다 싶었지만 불쾌감도 부끄러운 마음도 들지 않았다. 그에게 치부(恥部)를 들어내 놓았다는 기분이 들면서도 뒤나 앞이나 감출 게 없어졌다는 생각이었다. 식욕 성욕 탐욕 성취욕 물욕 등등 수많은 욕망이 있겠지만 그녀 앞 사내에게는 감출 필요 없이 다 쏟아도 될 듯했다. 그녀가 뭐라 표현하기 전이라도 그녀 마음을 다 알고 있다는 느낌이었으니까.

병실로 돌아온 한소분은 그런 묘한 기분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진정한씨란 사람과 어제 오늘 만난 사이가 아니라는 느낌이었다. 어디선가 오래 전에 만났고, 그녀의 몸과 마음 속속들이 다 알고 있으며 그녀의 모든 것을 그가 다 알고 있고, 그녀 또한 그 사람의 몸과 마음을 겪어보고 더듬어보고 긁어보았으며 벌써 언제인가 한 몸이 되었던 사이였다고 하는 생각이 반복되었다. Y정수기에 다니면서 책을 많이 있는 동료 박정애의 영향을 받아 그녀는 3, 4년 동안 도서관 책을 많이 빌려다 보았다. 그러면서 그녀는 한 번도 내 영혼을 불사르며 열정적인 삶이나 사랑을 못해 봤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생활의 노예로 밥하고 빨래하고 아이 키우고 밤이면 남편을 위해 들어 눕고 아침이면 돈벌이에 나서는 개미나 꿀벌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점점 깨닫게 되었다. 최근 읽은 책이 생각났다. <전생 그 비밀을 말한다> 전생과 현재의 생, 내세의 생을 넘나들며 영혼이 만나고 사랑하고 헤어지고 죽고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고 환생(還生)하는 윤회사상을 담은 내용들이었다.

--- 어쩌면 저 사람은 내 전생의 남편이 아니었을까?

참, 턱도 없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지나갔고 그게 사실이라고 믿어졌다. 그러지 않고서야 처음 만나서 오만가지 잡일에 부모에게도 남편이나 아이들에게도 친구나 동료들에게 털어놓지 못한 자신의 비밀 까지도 아무 거리낌 없이 주고받고 얘기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고민을 어려움과 회한, 수치나 불결까지도 다 받아주는 넉넉함이 그에게 있다고 느꼈다. 한소분은 다시 그 사실을, 그 사내를 확인하러 한밤중에 502호 남자의 병실로 갔다. 간호사가 출입하도록 문이 잠겨 있지 않아 쉽게 안으로 들어갔다. 나이가 많은 남자는 평안한 얼굴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분명 낯선 얼굴이었다. 아니 오래 전에 헤어진 사람이었다. 어렴 풋 기억 저편에 희미하게 살아 있는 남자의 사랑스러운 미소가 그 얼굴에 있었다. 그녀는 끌리 듯 입술을 사내에게 가져갔다. 남자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섭섭했지만 그녀는 잠시 엎드려 있다가 돌아섰다.

이튿날은 일요일이었다. 진정한씨는 아침을 먹고서 바쁘게 506호실 문을 두드리다 기척이 없어 문을 열었다.

“커피 한 잔 해요.”

한소분이 침대에 누워 있었다. 아직 배달된 밥을 먹지 않고 그냥 있었다. 그때까지 자고 있었던 모양으로 부스스한 눈을 비볐다.

“나, 일으켜 줘요. 한 잠도 못 잤어요. 괜히······ 애들이 온다고 했는데······”

그는 침대에 다가가 여자를 일으켰다. 여자는 링거 병을 단 팔이 아닌 비어 있는 다른 팔로 남자의 목을 껴안았다. 자연히 뺨이 닿았다. 속옷을 입지 않았으므로 젖무덤이 그대로 남자의 가슴에서 물결쳤다. 여자는 아무런 경계심이 없었다.

“이상해요. 나 영업하러 다니면서 제일 조심하는 거 남자인데. 특히 코디하러 고객님 댁을 방문했을 때 남자가 혼자 있으면 괜히 무섭고 달려 들까봐 겁났거든요. 실제로 우리 코디 중 그런 일 당한 사람도 있어요. 가서 정수기 필터 간다고 일하고 있는데 주인 남자가 뒤에서 왈칵 껴안더래요. 뭐 난리가 나고 그 남자 혼이 났지만요. 그런데 오빠가 환자복 바람에 혼자 있는 여자 방에 쳐 들어와도 조금도 겁나지 않네요, 침대에 그냥 누워 있어도 하나도 걱정이 안 되네요.”

“아니, 링거병 단 환자가 어디다 욕심을 내겠노? 다 같이 환자 신세인데? 퇴원 하거든 그때 내가 욕심을 내볼게. 소분씨 그거 좋은 줄은 내가 알거든.”

남자의 그 말에 그녀도 웃고 말았다. 그녀의 남편과 아이들이 오기 전까지 그들은 어제처럼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지난밤 얘기를 이어 나갔다. 물론 진정한씨는 그녀에게만 통할 음담패설 같은 소리를 떠들었고 한소분은 그게 하나도 싫지 않았다. 새록새록 자신의 인생에 그가 깊숙이 들어와 자리 잡는 것이었다. 그 후 낮에 하루 종일 그녀의 병실에 아이들이 와 있었으므로 진정한씨는 눈치만 보다가 해가 저물었다. 밤에는 지난밤처럼 커피를 마시며 오래 사귀어 온 정다운 연인처럼 나란히 앉아 손도 잡아보고 슬쩍 다리도 만지며 이런 저런 얘기로 시간을 보냈다. 열두시가 다 되었어야 아쉬운 마음으로 헤어졌다. 그녀는 자신의 병실로 같이 가 더 놀자고 얘기하려다 그만 두었다. 

진정한씨가 하루 먼저 입원했으니 하루 먼저 퇴원을 했다. 친구 황달구가 승용차를 갖고 아침에 오기로 했다. 이번엔 링거 병을 떼었으니 두 팔로 여자를 안아 볼 수 있었다. 병실로 갔더니 어제 아침처럼 누워있던 여자가 일으켜 달라는 바람에 안아 일으켰다. 이번에는 서로 약속이나 한 듯 입술을 맞댔다.

“좋기는 좋네. 다른 병이었으면 이런 욕심을 부리겠노? 치질이라서 다행이네.”

진정한씨는 실실 웃었고 한소분은 눈을 흘겼다.

기침을 하면 돈구멍이 팍팍 결리고 아팠으므로 그는 집에 돌아 왔어도 며칠간 좌욕도 하고 변비에 걸리지 않으려고 여러 가지 반찬을 먹었고 앉아 있기가 불편해 누웠다가 일어났다가 하며 병원을 다녔다. 퇴원한 그녀는 당장 이튿날부터 영업을 나가야 하므로 차를 몰고 다니는데 조금 불편하다고 전화를 했다. 그는 수술 후 증상을 낱낱이 그녀에게 이야기 했다. 만약 아내가 살았더라면 구시렁구시렁 하소연할 일들을 한소분에게 한 셈이었다. 직선적이며 소탈한 그녀는 소심한 진정한씨의 자잘한 고통에 대하여 일언지하에 참으라고 잘라 말했다. “조금 참으면 될 걸 뭐 그게 큰일이라고.” 하고 잘라 말하면 그는 “아 알았어.” 하고 수긍했다. 마치 수십 년 살아온 아내의 말을 순종하듯이 말이다. 그는 대엿새 지나지 않아 한소분에게 연락해 비데기를 달았다. 그녀에게 영업 실적 1건을 선사한 셈이었다. 뿐만 아니라 주위친구에게 치질 수술한 것을 자랑삼아 얘기하면서 비데기를 달면 치질도 변비도 예방할 수 있다고 선전하고 권했다. 친구 황달구도 또 다른 친구도 그래서 비데기를 달았다. 또 한소분에게 보일러도 방도 수리해야 된다고 연락해 그녀의 남편이 와서 방을 수리하도록 일거리를 제공했다.

한소분은 제과점 뒤편에 있는 그의 살림집에 와 보고서야,

“정말 사모님이 안 계시네. 병원에서 돌아가신지 4, 5년 됐다는 거 흰소리인줄 알았어요.”

“그랬어? 늙은 홀아비에게 누가 살러 와야지. 혹시 살러 오려는 여자가 있으면 한 살림 제 명의로 해 줘야 된다더먼. 아들 며느리가 저희들 곁으로 오라고하지만 가기 싫어. 40년 을 해온 제과점도 있고······ 제과점도 이젠 영업을 전적으로 김전무에게 맡겼어. 그 대신 그 내외가 내 수발을 들어 주기로 한 거야. 아들 딸 보다 김전무가 났지. 나중에 제과점은 그냥 김전무에게 물려 줄 작정이야.”

결혼 후 곁눈 한 번 팔지 못하고 오로지 아이 키우랴 본 벌랴 고급 식당에 가서 1, 2만 원짜리 식사 한 번 못하고, 그 흔한 온천 한 번 못했다는 소리에 진정한씨는 퇴원한 지 이십여 일쯤 한소분을 고속도로 진입로가 있는 농산물공판장 주차장에서 만나기로 했다. 만나기로 한 날 그녀는 오후까지 다니며 해야 할 일을 오전에 해 치우고 약속 장소로 나갔다. 진정한씨가 와 있었다. 그는 그녀의 낡은 차부터 보고 비아냥거렸다.

“티코로 구만. 십년은 훨씬 넘었겠네. 이때껏 이런 것 끌고 다니는 사람도 있나?”

“차 한 대 사 주고 그런 타박하면 밉다하지는 않죠. 신랑이 공사 하느라 트럭 끌고 다니죠. 나도 일하려면 꼭 차가 있어야 되니까···· 이거 중고라도 겨우 샀어요.”

“그럼, 내가 차 한 대 사줄까?”

“중형이고 소형이고 필요 없고. 마티즈 중고면 좋아요. 기름 값 적게 들·······”

“그러지 뭐.”

“대답 쉽게 하시네. 정말 사 주기나 하면 밉지나 않겠네. 말만 번지르르 하며 공수표 날리려고!”

한소분은 그의 차를 타면서 입을 비쭉거렸다.

“새 차를 사 주지.”

“안돼요. 꼭 사주고 싶다면 중고차라도 마다 않을게요.”

온천을 다녀오던 길로 그는 차 중고시장에 나가서 적당한 소형차를 골랐다. 그러고는 전화를 했다. 고객 집에서 일을 하다가 전화를 받는 모양이었다. 말이 굳어 있었다.

“와 볼래? 여기 봉암동 중고차 매장인데······”

“내가 뭐 한가한 사람인가? 지금 바빠요.”

“그럼 어쩐다? 내가 조처해 놓을 테니 와서 차 끌고 가.”

“알았어요. 고마워요.”

그런데 차를 가져 간다면서 전화가 왔는데 좀 불길한 소리를 했다. 또 하혈이 있다는 것이었다. 온천에 갔을 때 그런 소리를 했다. 꿰맨 상처가 다시 찢어졌는지 심한 변비는 아니었는데 하혈이 있었다고 했다.

“나도 그렀는데? 똥이 부드럽고 묽어지라고 병원에서 처방해 주는 약 열심히 먹고 식이섬유 먹고 요구르트, 바나나, 양다래, 알로에에다 나물이라는 나물은 알뜰히 챙겨 먹고 씨락국 배추국 콩나물국 미역국까지 다 먹는데 말이야. 영 똥이 물러져야지. 땡땡 야물고 단단해서 여차하면 피가 뚝뚝 흐르는 판인데 치크린 연고를 노상 바르고 조심하고 그래. 소분씨도 아마 나하고 같은 모양이야.”

“오빠도 그러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하혈이 전과 똑 같은 듯해서 걱정이네.”

“그러다 괜찮아지겠지.”

그는 알몸뚱이 여자의 얘기에 의사도 아닌 그가 뭔가 알아보겠다는 듯 돈구멍을 보자고 했고 여자도 스스럼없이 엉덩이를 그의 코 앞에 디밀었다. 한참이나 살펴보았지만 뭐가 이상한 지 알 수가 없었다. 여자도 남자의 엉덩이를 들여다보며 자신과 뭐가 다른지 살폈지만 앞에서 덜렁거리는 물건 외에는 역시였다.

“병원에 다시 가 봐. 혹시 아픈 증세가 심하면 병원에 다시 오라던데?”

“좀 더 견뎌 보구요. 곧 상처가 아물겠지요.”

“그래, 그럴 거야. 여하간 그 놈으 돈구멍이 문제네.”

서로 웃고 말았다. 그런데 그 후 서너 차례 휴대폰 통화를 했는데 하혈이 그치지 않는다고 했다. 진정한씨는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을 하고서 강력하게 수술한 병원을 찾아가라고 권했다. 얼마 후 치질 수술은 잘 되었는데 자주 하혈이 있다니 이상하다면서 대장 내시경 검사를 하자고 의사가 말한다고 전해 왔다.

“그 놈의 의사 치질 밖에 모르는 모양이네. 당장 다른 병원에 가자. 다른데 가서 내시경 검사 해봐. 소문을 들으니까 시외주차장 근처 박내과가 내시경에는 전문이래.”

진정한씨가 걱정이 되어 한소분을 닥달해서 박내과에 가기는 두어 달이 지나서 였다. 남편은 공사일 때문에 같이 올 수 없다기에 그가 병원에 갔다. 별 것 아닌 검사 때문에 온실 농사에 정신없는 친정어머니도 부르지 않았다면서 그녀 혼자 병원에 왔다.

대장 내시경 검사를 끝낸 의사가 수면상태에서 겨우 정신을 차린 한소분과 그를 불러 놓고 심각한 표정으로 컴퓨터에 올려 진 여러 장의 사진들을 설명하면서 멈칫멈칫 하다가,

“직장에 뭐가 있네요. 양성인지 악성인지 조직검사를 해야 될 것 같아서 떼기는 했습니다만······. 조직검사를 해 보면 걱정할 게 없다고 판가름 나겠지요.”

했다. 청천벽력이었다. 직장에 암 덩어리가 있다는 얘기였다. 병원을 나서서도 한소분은 말이 없었다.

“털털한 소분씨가 와 그러노? 큰 병원에 한 번 더 가 봐야지. 이런 개인병원 검사를 우째 믿겠노? 너무 걱정 말아.”

“치질 수술하던 날 하반신 마취를 하는데 그런 생각이 들데요. 마취에서 못 깨어나면 어쩌나? 난 아직 마흔도 안되었는데······”

“무슨 씰 데 없는 소리를 하노? 끄떡없이 내보다 오래 살 사람이!”

진정한씨의 태평스러운 다짐 따위는 상관없이 한소분은 직장암으로 판명 났다. 남편과 친정 부모들의 성화로 부산의 대학병원에 갔고 다시 검사하니 역시 같은 병이었다. 그는 한소분을 만나 천만 원이 든 돈 봉투를 건넸다.

“이거 가지고 수술하고 건강해져. 아이들 봐서······ 욕심 많은 날 봐서. 하루 속히 건강해져야지.”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봉투를 받아 수표를 헤아렸다. 별로 놀라지도 싫어하지도 또 거절하지도 않았다. 그녀에게 현금 100만원도 없다는 것을 그가 잘 알기 때문이었다.


한소분은 그 해 가을에 죽었다. 죽기 며칠 전 그가 병원에 갔을 때 고통 속에서도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박정애씨가 시집을 가져 왔데요. 그래서 시 한편 외웠어요. 들어 보세요.”

--- 사랑이여, 보아라/ 꽃초롱 하나가 불을 밝힌다./꽃초롱 하나로 천리 밖까지/ 너와 나의 사랑을 모두 밝히고/ 해질녘엔 저무는 강가에 와 닿는다·······1)

그는 가만히 들으며 죽음을 예감했다. 초롱불은 상가(喪家)에 다는 것이 아닌가. 시를 다 외운 한소분은 힘없이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

“오빠는 내 첫사랑 이예요. 다음 세상에선 내가 먼저 태어나 기다릴 레요. 서른 살 나이 많은 남자보다 연상의 여인이 좋잖아요?”  ****


ARTICLE  

단편소설


돈구멍


김 현 우


정말로 사람은 탈도 병도 많다. 그런데 그 많은 병들 중에 대수롭잖게 여기는, 병 취급도 못 받는 병도 있는데, 아니 의료보험 적용을 받으니 이건 병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탈이 나서 피가 줄줄 흘러내려 심각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본인이나 주위에서 병 취급도 해주려 들지 않는 것이 있다. 물론 병은 자랑해야 되고 뭐는 감춰야 한다는 속담이 있지만 이 병 만은 열에 아홉 명은 자랑하기는커녕 시치미 뚝 떼고 십 년, 이십년을 혼자서 끙끙 앓으며 참고 견디는 사람들이 허다하다.

--- 이거 병이 아니야, 약간 탈이 난거지. 이거 가지고 병원엘 가?

진정한씨가 한소분을 만나기는 병원에서였다. 둘 다 그 병 같잖은 탈난 것 때문에 수술을 받고서. 환자복에 맨 발에 링거 병을 손에 매단 채 개인병원 복도에서. 그때 그는 커피를 한 잔 할까하고 로비로 나오는 길이었고 506호실 입원 환자로 그보다 하루 늦게 수술을 받은 그녀는 건장하게 생긴 남자를 엘리베이터 앞에서 배웅하고 돌아서고 있었다. 아마 남편일 듯 했다. 506호실을 지나며 병실 문 앞에 「한소분, 36세」 그런 팻말을 보고서,

--- 젊은 여자가 일찍 탈이 났구먼.

하고 웃었기에. 그는 엉거주춤 서서 그녀가 돌아서자 빙긋 웃음을 보내며 알은 척 했다. 여자는 키가 작아 통통해 보였지만 첫눈에 밉상이 아니고 선량해 보여 그의 마음에 들었다. 그러자 한소분은 활짝 웃으며,

“아저씨도 수술했네요?”

“아, 예······· 하고보니 잘 했다 싶기는 한데, 밖에는 벚꽃이 피고 봄이라 놀러 간다고 야단들인데 이거 꼼짝없이 갇혔네요. 무통 주사 덕분에 아픈 건 없는데 퇴원하면 더 아프다던데?”

“정말 그래요? 저도 봄 거꾸로 보내겠네요.”

“난 정말 십 년······ 아니 이십 년을 고생하다 결국 수술을 받았는데 거기는 젊은데 너무 일찍 병원에 왔군요?”

서서 얘기를 하기에는 서로 고통스러워 진정한씨는 커피를 타서 병원 로비의 소파에 가 앉자 한소분도 따라와 나란히 앉았다. 토요일 오후, 어느 듯 해는 지고 의사와 간호사들도 다 퇴근하고 들락날락하던 사람들이 없어진 조용한 시간이었다. 이 개인병원은 입원실이 1인실만 6개 있는데 그 중 5개에 수술한 환자가 입원해 있을 뿐이었다. 사람들이 다 아는 병이라 진정한씨도 그렇고 다른 환자들도 옆에서 간호해 주는 가족들이 아예 없었다. 저녁이면 입원 환자와 당직 간호사 한 사람 뿐이어서 적막감이 감도는 편이었다.

진정한씨야 마누라가 4, 5년 전에 죽었으니 멀리 있는 아들 며느리들 오겠다는 걸 아예 오지 말라고 막아놓아 아무도 안 왔고 평생 직업으로 제과점을 했는데 제과점 일을 하는 김전무 내외와 친구 황달구가 수술할 때 와서 지켜보다가 돌아갔다. 저녁이면 다들 제 병실에 누워있었는데 그들 둘만 불 꺼진 로비에 나와 앉은 셈이었다.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름-4  (0) 2009.06.20
이름-3  (0) 2009.06.18
이름-2  (0) 2009.06.17
이름-1  (0) 2009.06.14
황혼(黃昏)  (0) 2008.07.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