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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야기

친구 조용업 시인

by 남전 南田 2009. 3. 21.

친구 조용업 시인

 

 

 

 

 

친구 조용업(趙鏞業) 시인은 나와 남지중학교 동창이다. 그러니 태어난 해도 1939년으로 같다. 외동아들이라 장가는 친구들보다 일찍 갔는데 부친께서 성미 급하게 손자를 빨리 보려는 마음 때문인 듯했다.

그는 부산대학교 법과를 나왔다. 여하튼 그는 우리 친구들이 고향에서 빌빌거리고 있을 때 대학을 나와 이내 초등학교 교사로 취직을 했다. 물론 제 전공을 살리러 고등고시 준비도 했던 모양인데 사정이 여의치 않아 판·검사의 길을 접고 말았던 것 같다.

아마 초임 발령지가 창녕군 중부에 있는 대지면 대지초등학교로 기억된다. 그는 그때부터 교회를 다녔던 모양이다. 중도에 그만 두기도 했지만 말년에 교회를 열심히 다녔다.

그 후 중학교 교사로 발령이 나 여러 학교를 다니다 사립인 마산 중앙고등학교로 가서 교감을 지내기도 하였다.

그러다 다시 공립으로 돌아와 거제중학교를 거쳐 합천교육청 장학사, 마산교육청 장학사, 울산교육청 중등교육과 장학관 등을 거쳐 2001년에 울산 남창고등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직 했다.

정년 후 창원으로 돌아와 그의 팔용동 자택 반지하방에 한문·논술지도교실 문을 열고 창원대학교와 춘해대학에 강사로 출강도 했다. 갈 곳 없는 친구들을 초청해서 놀이터로도 사무실을 제공하겠다고 하는 등 포부가 컸다. 친구들은 곧잘 그곳에 몰려가 점심도 얻어먹고 바둑도 두며 소일했다. 그러다 공기 맑고 경치 좋은 시외로 나가고 싶다며 창원 외곽 동읍으로 함안으로 집을 사러 다닌다면서 기세 좋게 신바람을 냈다. 감나무 과수원 복판에 집이 있는 동면의 매물도 보러가고 장유에 가서 집도 둘러보러 다녔다. 그런데 동면 과수원은 계약 직전에 파의가 되고 결국 장유에 있는 터 넓고 높다란 집을 샀다. 우리 친구들이 새로 산 집에 갔는데 정말 터도 넓고 높직한 곳이라 전망이 아주 좋아서 모두들 집을 잘 샀다고 좋아했다.

“야야, 여게는 무슨 가든 같은 고급 음식점을 했으면 장사가 잘 될 곳인걸.”

“경치가 죽여준다. 언제 나는 이런 집에 살아보나?”

하고 이구동성 축하 겸 부러움으로 떠들어댔다.

그는 조금 지나자 시 공부를 한다면서 창원대학교 평생교육원 문학창작과에 등록했다. 한 2년 넘게 다니며 강의를 들었다. 내가 사무국장으로 근무를 했던 경남문학관에 문학행사가 있으면 빠지지 않고 꼭 참석하곤 했다. 그의 그랜저 승용차에 장유에서 창원대에 함께 다니며 문학공부를 한다는 여자들 두어 명을 태워 오곤 해서 좌석을 채워주는 바람에 나는 반갑고 고마웠다.

그는 드라이브를 좋아했다. 승용차를 운전하고 하루에 갈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갔다가 돌아오곤 했는데 주로 친구들을 불러서 함께 다니곤 했다. 물론 나도 자주 불렀는데 사실 내가 문학관 사무국장으로 붙들려있는 몸이라 자주 함께 할 수 없었다.

드라이브를 함께 해보면 그의 운전솜씨는 일류였다. 절대 과속하는 일이 없고 여유만만 급한 일이 없는 듯 유유자적 운전을 했다. 심지어 고속도로에서도 80km를 놓고 가서 조금 느리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그는 합천교육청 장학사 시절에 큰 교통사고를 당했었다. 그때 집이 함안 칠원에 있었는데 합천까지 백리나 넘는 길을 출퇴근했다. 여름이었던가? 날이 어두운 퇴근길에 경운기를 만났던 것이다. 유어면 등대중학교 조금 지나서였는데 그 길은 쭉 곧은길이라 아주 달리기 좋은 길이었다. 캄캄한 밤이라 미쳐 앞서 가는 경운기를 발견하지 못하고 바로 앞에 가서야 그걸 발견하자마자 정신없이 핸들을 꺾었다. 차는 길가 밭으로 몇 번인가 구르고 또 굴러버렸다. 정신을 차려보니 크게 부상을 당하지 않았지만 차는 완전히 망가져 결국 폐차를 하고 말았다 한다. 그 이후 그는 차를 조심스레 모는 것이 습관화 되어 있었다.

2003년인가 친구들과 함께 2박 3일로 강원도 속초까지 갔다가 한반도를 가로 질러 충청도 아산까지 그리고 마산으로 돌아오는 여행을 한 적이 있는데 시종 농담에 여유 있는 운전으로 친구들을 즐겁고 편안하게 해 주었다. 그때가 겨울인데 속초에서 길을 잘 못 들어 눈이 쌓여 얼어붙은 산길을 곡예 운전해서 지나왔는데 그때도 침착성을 잃지 않았다.

그는 초등학교 교사로 있다 퇴임한 부인의 와병에 간호하느라 여러 해를 고생했다. 부인은 당뇨가 심해 여러 합병증이 왔는데 눈도 이상이 생겨 여러 번 수술도 했고 신장도 안 좋아 투석도 해야 했다. 나중에는 장유 집도 팔고 장유 시내에 있는 아파트로 이사 했다. 거동이 불편한 부인이 나다니기에 쉽도록 1층에 있는 집을 구했던 것이었다.

우리는 공직에서 정년퇴직 후에 매주 월요일이면 친구들 몇 명이 모여 북면 온천으로 목욕하러 다녔다. 그도 꼭꼭 참석했는데 체중이 많이 나가고 배가 좀 부른 것이 탈일 뿐 나보다 건강하고 식욕도 왕성해서 나 같은 병골과는 대비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변비에 걸렸다고 했다. 그 즈음 나도 또 다른 친구 정 형도 건강검진 삼아 대장내시경 검사를 한 적이 있어서 그걸 권했다. 그도 증상이 심상치 않았던지 얼마 지나지 않아 검사를 했던 모양이었다. 부인의 병구완에 너무 정신이 팔려서인지 자신의 건강은 미처 챙기지 못했던 것이다.

대장암이란 판정을 받았다면서 더 큰 병원으로 가서 재검을 해야겠다고 했다. 그게 2006년 늦은 봄으로 기억된다. 그리고는 수술을 하기로 결정을 하고서는 부인을 장유의 병원에다 입원시켜 간병인을 붙여 놓고서 부산대학병원으로 가 입원했다. 6월로 기억되는데 수술 다음날 병원에 가보니 병실에 누워있는 그는 평상심을 잃지 않고 친구들을 맞으며 고통을 견디어 내고 있었다. 대장보다는 직장암이라 직장을 모두 잘라내고 인공항문을 접합하는 대수술이었다.

수술 후 집에 돌아오자마자 병원에 입원시킨 부인이 남편의 수술 충격 때문이었는지 숨을 거두었다. 그는 병간호를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장례를 치르고 자기 혼자 아파트에 남겨졌다.

그는 평소에는 마음이 너그럽고 만사를 여유만만 일처리를 잘 하는 사람인데 어떻게 된 셈인지 수술 후에는 어느 자식들 집에라도 가 의탁을 하고 간호를 받든지 아니면 청소도 하고 살림을 살아줄 파출부 아주머니라도 구해서 살라고 우리 친구들이 아무리 강권해도 말을 듣지 않았다.

“나 혼자 잘 해 먹을 수 있는데 뭐. 대학시절부터 자취를 했었는데 이깟 살림쯤이야 문제없다. 걱정 말아라.”

인공항문을 단 이후에는 매주 월요일이면 우리가 가는 목욕탕까지는 왔지만 같이 목욕을 할 수 없었다. 그는 우리가 목욕을 다하고 나오도록 1층 로비에서 기다렸다가 점심 먹으러 함께 가곤 했다. 우리는 혼자 살면 반찬을 제대로 챙겨 먹을 수 없지 싶어 영양보충을 시켜주려고 보신탕집이나 반찬이 여러 가지 나오는 한정식 식당으로 자주 갔다. 그러면 그는 먹성 좋게 맛있게 많이 먹어서 도리어 우리들이 불안해하곤 했다.

나는 그와 메일을 주고받았다. 그가 보내오는 글은 모두 한편의 시였다. 당시의 그의 생활을 알 수 있는 다음과 같은 글도 보내왔다.

고독

아버지는 고독하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고독은 인간의 본성이다

고독 속에 사랑이 싹튼다/고독이 없으면 사랑도 없다/고독하지 않으면 사랑이 필요할까?

아침에 일어나/세수를 하고/쌀을 씻어 밥을 짓는다/전자밥통이 밥을 한다지만/쌀을 안치지 않고는 밥이 되지 못한다/고독한 삶의 행진이/어느새 고독에 대한 사랑으로 변한다

산다는 것은 고독의 연속이며/사랑의 행렬이다/주검은 사랑의 목표이다.(2007. 11.19)

그는 암투병에 진력하면서도 결코 희망을 잃지 않았다. 다음 글을 보면 그렇다.

연말연시

크리스마스가 지나니까/연말연시

26일 병원에서/직장암은 탈 없이 잘 가고 있는데/CT검사 결과/'폐가 조금 이상하니 다시 검사해 보자'/1월 8일 다시 씨티검사 하기로.

기본적으로/생로병사는 신의 뜻에 따라야 하는 영역

숲을 찾아/싱그러운 심호흡을 하고 싶다

숲과 계곡의 물만 있으면/하늘과 구름 바위들까지/친구가 되어 줄 것이다

그저 서로/외롭지 않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질 것이다. ****(2007. 12.27)

그러나 그의 암은 폐로 전이된 모양이었다. 그래서 다시 항암주사를 맞고 다녔다. 나중에는 그게 폐에서 또 다른 부위로 전이된 모양이었는데 가슴이 아파, 허리도 아프다고 하면서 침도 맞고 물리치료도 받으러 다녔다. <봄의 서곡>이란 시에 그 심정이 잘 나타난다.

봄의 서곡

개구리가 기지개를 켠다/경칩이다

아침 8시/부산대학병원으로 가다/항암치료 제3회째/먼저 병원에 도착하면/혈액검사를 받는다

코레스톨이 적정한 수치가 아니면/치료를 받지 못한다/한 시간 후 결과가 나오면/의사의 지시에 따라/주사실에 가서 항암주사를 맞는다

한참을 기다리니/주사약을 매달고 드러누워/방울방울 떨어지는 주사약을 보면서/시간을 보내야 한다/오늘은 주사약 떨어지는 속도가 느려서인지/다섯 시간이나 걸렸다/지루해서 몇 번이나 주사약 떨어지는 꼭지를 쳐다보았다

항암치료를 하는 것은/병을 낫게 하는 것이 아니라/삶을 연장하는 것이다/평소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귀한일인지를 잘 모를 때가 많다/병원에 가보면/작은 눈짓 하나까지/하나님에게 감사로운 일임을 알게 된다

이렇게 편지를 쓸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는 것/삶의 한 조각으로/생명의 귀한 보물임을 깨닫게 한다

어디서 무얼 하던지/살아서 건강하기만 하면 된다 (2008. 3. 5)

그는 여러 해 전에 중풍이 다행스럽게도 가볍게 와서 치료를 받은 적이 있는데 그 후유증으로 다리와 손이 조금 불편했다. 그런데 2008년 가을이 들자 점점 그게 심해지고 허리에 통증이 와서 견디지 못해 자주 우리들에게 아픔을 호소했다. 동리에 있는 정형외과나 한의원을 찾아다니며 약도 먹고 침도 맞았다. 침을 맞으면 잠간 동안 고통이 없다가 자고나면 아프다고 했다. 점점 몸이 무거워지고 발등이 퉁퉁 부어올랐다. 우리는 걱정스러워 하며 혼자 지내지 말고 자식들 병구완을 받든지 노인요양병원 같은데 라도 입원해서 조리하라고 하면 그는 좀 태평스러운 반응이었다. 물론 자기 속으로야 그게 아니었겠지만.

친구는 2008년 12월 초순에 장유 아파트 근처 병원에 입원했다. 입원하기는 암 수술 후 처음이었다.

그가 입원직전인 11월 중순, 나는 수원으로 이명(耳鳴) 치료를 받으러 갔다. 가기 하루 전인가? 함께 자주 다니던 정씨 형님과 장유에 갔었는데 그는 외출할 수 없는 지경이라서 바둑을 한 판 두고 밖에 나가지 않고 집에서 점심으로 자장면을 시켜 먹었다. 그는 자장면을 맛있게 한 그릇을 비웠다.

“요즘은 식욕이 통 없어서 아침도 먹다가 말았다.” 했다. 그 먹성 좋던 친구가 밥맛이 없다니 우리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지만 내색을 하지 못했다.

그날 이후 나는 수원으로 가 딸네 집에 지내면서 이명치료를 잘 한다는 한의원에 일주일에 세 번을 가서 침도 맞고 목에 대한 추나요법 치료를 받았다. 그런데 마산의 정씨 형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는데 12월 초에 입원을 했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1주일이 넘어 알았다고 했다. 사실 우리 친구들은 거동이 불편해진 다음 병원에 입원하라고 많이 권했다. 그러면 그는 성을 내며.

“병원에 가면 진짜 병신이 되고만다.”하면서 거부했다.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전화를 했다. 힘겹게 그는 말했다.

“현우야! 이제 나는 사형선고를 받았다.”

마치 예측이나 하고 있었든 듯 나는 아무 위로의 말을 할 수 없었다.

이명 치료를 중단하고 장유로 가서 병실 침대에 누운 그를 만나보았더니 영 얼굴이 반쪽이 되어 있었다. 입원 3주째였는데. 수북하게 부어올랐던 발등은 부기가 빠져 있어 조금 반갑기도 했다. 그때 그는 힘없이 말했다.

“내 마지막으로 서울 가기로 했다. 원자력암센터에 가 볼란다.”

사실 나도 그때서야 가족들이나 부산대학병원 의사가 그에게 치료해도 가망이 없다는 말을 알려주지 않고 있었음을 알았다. 그도 전에는 몰랐는데 이번에서야 사실을 알았다는 것이다. 다음 글을 보면 그게 확실하다.

생명의 뿌리

30분을 기다리니/이름을 부른다/불안과 초조가 교차한 시간이 1시간이나 된 듯하다

진료실 문을 열었다/안녕하십니까/주제넘게 의사의 건강을 걱정하는 인사를 하고 말았다

요즘 좀 어떠세요/가슴이 좀 아픈 외는 별 특이한 증상이 없습니다/그래요/나는 아무데도 아프지 않은 것처럼 미소를 띈다/의사도 웃으며/그럼 됐습니다/가슴 아픈 곳 처방과/다음에 올 때는 CT검사를 받아 봅시다/피검사를 받고 가세요

오늘도/초조와 불안이 싱겁게 끝난 것이다/병원을 나설 때/가슴 아픈 것조차도 잊어버렸다 *** (2008. 9. 1)

그는 12월 29일경, 아들에게 의지하여 구급차를 타고서 서울 어디엔가 있다는 원자력암센터를 다녀왔다. 가서 의사만 만나고 그냥 되돌아오고 말았던 것이다. 의사가 치료나 수술을 해도 가망이 없으니 마음 편히 잡숫고 가시라며 솔직하게 말해 주더라고 했다. 그는 12월 30일인가 집으로 돌아와 잠시 누웠다가 새해 1월 3일인가 부산의료원으로 입원하러 갔다. 친구들과 병문안을 서너 번 갔다. 마지막 그를 만나러 갔을 때는 혼수상태였다. 한 마디도 대화를 할 수가 없었다. 발을 만져보니 싸늘한 기운이 바로 죽음 일보직전에 왔음을 예감할 수 있었다.

“이 사람아! 설이나 쇠고 가.”

나는 그런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그것도 속으로. 설이 1월 26일이었으니 2주 정도 남아 있었다.

2009년 1월 15일 밤에 운명했다고 그의 장녀가 울먹이며 연락해왔다.

장례는 3일장, 1월 17일. 그는 고향 남지읍 성사리 매전 황새목 산기슭 그의 부모님과 아내 곁에 묻혔다.

그가 입원하기 직전 마지막으로 보낸 메일에서 그는 여전히 죽음을 잘 모르는 듯 하면서도 불길한 예감으로 낙엽을 바라보고 있었다.

병원과 동그라미

(전략) 병원에는 환자들이 없다/동그라미뿐이다

낙엽이 낙엽을 밟고/낙엽을 쳐다본다/낙엽이 아름답게 보이면/그는 젊은이다/거리에 나가보니/낙엽이 낙엽 같지가 않다

그도 그럴 것이/싱싱한 여름에는 푸르름 속에 두꺼운 옷을 입더니/겨울에는 그 추운 겨울에/홀랑 벗고 나무들이 서지 않는가

뭔가 맞지 않는 자연 이치이다/병원에서 동그라미를 보듯이 말이다 (2008. 11.18)

그의 명복을 빈다. 어느 날엔가 내가 그 친구를 만나러 가는 날이면 동구 밖까지 마중 나와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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