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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편조왕사 신돈 이야기 / 제6장 공민왕의 꿈 편조의 꿈(1)

by 남전 南田 2023. 1. 24.

편조왕사 신돈 이야기 / 

옥천사가 있었던 창녕 비슬산 원경. 앞은 옥천 마을

제6장 공민왕의 꿈 편조의 꿈(1)

 

* 금강산에서 개경으로

 

편조는 연경 법원사 지공 선사의 문하를 떠나 고려로 돌아오자 금강산 유점사에 입산하여 적명암에서 몇 년을 수행에 매진하였다. 금강산은 화엄경에 해동에 보살이 사는 금강산이 있다는 말에 유래되었듯 화엄종의 고승이 많았다. 법기보살이 상주하는 화엄 도량이 많았는데 편조는 여러 사찰과 암자에 수행 중인 고승들을 만나서 반야심경과 화엄경, 그리고 법화경을 배우고 좌선 수행도 끊임없이 하였다.

자연히 금강산의 여러 사찰에서 편조를 초청하여 경전 법회를 열자 관음과 아미타불에 대한 설법과 지공 선사가 했던 문수보살 무생계를 설법했다.

편조는 3년여 금강산의 유점사를 비롯해 크고 작은 사찰과 암자들을 편력하였다. 그는 화엄종을 근간해서 법화경을 중점으로 하는 천태종, 참선을 주로 하는 선도인 선종, 원나라에서 접한 라마불교 또는 밀교까지 융합하여 고려 중흥을 꾀하는 호국불교에 대해 고승들에게 묻고 듣고 배워 깨달음을 얻고자 했다.

 

그러다가 문득 옥천사로 3년여 만에 돌아갔다. 그는 잠시 일미사에 들렸으나 그의 후임으로 주지를 맡은 각조 스님이 훌륭하게 절 살림을 처리하며 불도들이 많이 찾아드는 것을 보고 안심하고 옥천사로 갔다. 옥천사로 가자마자 편조는 반야심경, 화엄경 연구에 침잠하였다. 곧 지공 선사와 마찬가지로 반야경과 문수보살을 중시하였으니 곧 편조의 사상과 신앙의 핵심이기도 하였다. 곧 선승보다는 종파를 초월해 유가종과도 달라진 화엄종 승려로 우뚝 서려고 하였다.

 

연경에 있던 강릉대군 기()가 고려 국왕에 책봉되어(충정왕 3:1351) 노국공주와 함께 귀국하게 되니 그가 바로 공민왕이었다. 노국공주와 결혼하게 되자 원 황제 순제와 기황후는 앞으로 왕이 원에 반역하지 않고 황실에 충성하리라 믿어 14살이던 기의 조카 충정왕을 폐위시키고 새 임금으로 세웠던 것이었다.

그해 12월에 연경에서 조익청, 조일신(趙日新) 유숙 등과 함께 공민왕이 귀국하였다.

공민왕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계성 옥천사에서 들은 지 1년 후쯤 편조는 개경으로 갔다.

편조 사제, 이번에 소승을 데려가이소.”

옥천사에서 함께 수계를 받았던 혜조가 따라가겠다고 나서자 같이 개경으로 동행하기로 하였다. 일찍이 현조가 개경에 올라가 현화사에 있으니 혜조도 함께 그곳에서 수행하면 될 것이었다.

편조는 전에 주지로 있었던 현화사에 여장을 풀고 신예와 그 형제들을 만나보고 또 강성을도 만나보았다.

일문역 강상재과 박소새 사이에 태어난 아들로 편조의 이부 형제라 치부되었던 강성을도 고려로 돌아와 있었다. 그는 수년 전 편조와 함께 원나라로 가서 그곳 황궁을 드나들며 장작감 미관말직의 벼슬아치로 지냈다. 강성을은 공민왕 귀국 후 고려로 돌아와 역시 고용보의 주선으로 왕궁의 건물을 관리하는 선공시(繕工寺)의 정5품 시승으로 지내고 있었다.

또 강성을이 연경에서 혼인해 낳은 큰딸 강반야 외에 아들이 둘이나 되었다. 편조는 이름을 지어준 적이 있는 반야를 귀여워하자 반야도 숙부님이라면서 좋아했다.

강성을은 편조를 만나자 대뜸 고개를 저었다.

낭패났어요. 우리가 고용보 대감이나 신예 성님과 친척이라는 것 숨겨야 합니더.”

그게 무슨 소리야? 신예나 형제들 집을 찾아갔더니 좀 썰렁하다는 느낌이었는데? 신예는 연경에 갔다고 하고?”

난리가 났었지요. 조일신이 기철(奇轍) 대감과 고 대감을 잡아 죽이려 했어요.”

편조는 호국불교의 주장을 펴기 위해 독실한 불도인 왕을 만나 자신의 소신을 주장하고 싶어 개경으로 올라간 것이었다. 그러나 공민왕이 들어서자 정국이 어수선해져 있었다.

강성을이 그간의 정세를 이야기했다.

이제현 대감을 실권 없는 승상으로 만들고 권세를 잡은 조일신은 공민왕의 복심이 됐지요.”

그래. 그분이야 연경에서 함께 고생한 막료였으니 왕이 그에게 실권을 준 것이지.”

그런데 조일신이 올해 제멋대로 란을 일으켜 친원파의 거두인 기철을 비롯해 그 형제들과 성님의 매부 고용보 등 여섯 명을 암살하려 했습니더.”

허어! 큰일이 벌어졌겠군.”

그러나 그런 낌새를 알아챈 기철 형제와 그 무리가 도망쳤는데 셋째 기정(奇轅)만 붙잡혀 죽었습니더.”

매부는 어찌 되었나?”

편조의 후원자이기도 하고 신예의 든든한 힘이 되었던 자형 고용보의 안부가 궁금했다.

요행히 피신했지요. 고 대감은 머리를 깎고 스님으로 변장해 합천 해인사로 도망쳤고요.”

다행이구먼. 신예는 그때 연경에 가 있었기 때문에 환란을 피할 수 있었고?”

그렇지요. 천만다행이지요. 만약 개경에 계셨다면 화를 당했을지 모르지요.”

편조는 공민왕을 만나서 자신의 숭불정책과 호국불교에 대한 소신을 펴려고 했으나 창녕 사람 조익청이 좌시중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죽고 기철과 고용보도 환란을 겪게 되어 세력이 한풀 꺾이고 말았으니 갑자기 불어닥친 혼란에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조일신의 란 1년 후 신예가 원나라에서 돌아왔으나 대권을 거머잡은 공신들 때문에 실권 없는 한직에 머물게 되었다. 따라서 편조도 주지로 있었던 현화사에서 예전에 하던 포교를 계속하기로 했다.

 

친원파의 세력을 견제, 제거하려는 공민왕이 들어서고는 고용보와 신예는 한풀 꺾이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따라서 편조도 신예와 형제라는 사실을 내세울 수가 없었다. *

 

<창녕신문> 2023년 1월 26일자에 실린 신돈이야기 제6장 공민왕의 꿈 편조의 꿈(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