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100 편조왕사 신돈 이야기 / 제11장 파국, <空>이로다(1) 제11장 파국, 이로다(1) * 시해 모의 고변 익명서와 추국(推鞫) 사심관 제도의 부활 주장과 19년(1370)에 왕의 존엄이 상했다고 생각한 최용소의 일이 생긴 후 직접 정사를 돌보기로 결심하게 되었으며 드디어 친정(親政)을 선언하였다. 그러면서 신돈을 정권에서 물러나게 할 기회를 찾고 있었던 공민왕은 20년(1371년) 7월, 김속명이 두 손을 부들부들 떨며 바친 익명 투서를 읽자마자 이성을 잃었다. 처음에는 고변 익명서(투서)를 읽고서 믿지 않았다. 그러나 계속 진짜라며 김속명의 부추기는 말에 심란해져 더욱 화가 났다. 익명서를 다시 읽고 분격하면서 속으로 무릎을 탁 쳤다. “옳타! 바로 요때로구나!” 한림거사(이인)의 시해 모의 익명서를 읽자마자 권력을 쥐고 있는 영도첨의를 단번에 무너트릴 수 .. 2024. 2. 3. 편조왕사 신돈 이야기 / 제10장 왕의 배신과 좌절(5) 편조왕사 신돈 이야기 제10장 왕의 배신과 좌절(5) * 공민왕의 배신과 신돈의 좌절 공민왕은 치밀했다. 아니 김속명이 더 주도면밀하게 신돈을 속였다. 심복들이 사라졌는데도 신돈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해가 지고 캄캄해졌으나 무슨 소식을 들을 수가 없었다. 벽호 스님과 함께 있었는데 한밤중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성님! 제가 왔소.” 강성을이었다. 울타리 밖을 지키던 충용위 군사에게 뇌물을 건네고 사정하여 군관 몰래 개구멍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당황한 표정으로 강성을이 숨을 몰아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큰일 났소. 그제 밤중에 기현의 아들 기중수 정랑과 한을송이 순위부에 붙잡혀 들어갔다 합니다. 이어서 기현과 최사원, 고인기 등도 불려 갔답니다.” “뭐야? 언제 그런 일이 생겼다더냐?” “어제 .. 2024. 1. 26. 편조왕사 신돈 이야기 / 제10장 왕의 배신과 좌절(4) 제10장 왕의 배신과 좌절(4) * 밤중에 날아든 익명서 왕과 신돈 사이에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음을 감지한 김속명은 태후에게 가서 속삭였다. “태후마마! 이제 중놈을 제거할 기회가 온 듯합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기회가 오다니.” “동북면 덕원 출신 이성계 장군을 아시지요? 그 사람을 만나 얘기를 들으니 이제 그 중놈을 끌어내릴 기회가 왔다고 했습니다.” 김속명은 명덕태후의 인척으로 10여 년 전 편조대사를 왕에게 데려가 소개한 김원명의 동생이었다. 형이 오인택(吳仁澤) 등과 함께 신돈을 제거하려 모의를 하다 발각되어 경상도 영덕(盈德)에 유배되었다가 죽임을 당했다. 신돈이 보낸 자가 죽였다 하여 앙앙불락 복수하려고 벼르고 있었다. 그는 신돈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선부의랑 이인(李韌)을 신돈의 문객.. 2024. 1. 8. 편조왕사 신돈 이야기 / 제10장 왕의 배신과 좌절(3) 편조왕사 신돈 이야기 제10장 왕의 배신과 좌절(3) * 왕의 의심과 친정(親政) 공포 이인임은 에는 ’간신‘으로 기록될 만치 처세술이 능하고 눈치가 빨라 형세가 변하면 따라 변하는 사람이었다. 그도 처음에는 신돈의 개혁정책을 강력하게 지지하고 따랐으나 출신 배경이 권신 대족의 집안이어서 점점 신돈의 개혁정책을 반신반의해 중신들의 여론과 사세에 따라 약삭빠르게 자신의 이득이 어디에 있는지 따져 처세하고 있었다. 이인임은 왕을 만난 자리에서 슬쩍 사심관 제도 부활을 들먹였다. 그러면서 충숙왕이 폐지한 제도임을 은근하게 말했다. 왕은 고개를 갸웃했다. 왕의 의심병을 살짝 도지게 했다. “그렇지. 5도에 사심관을 내려보내면 역시 그자도 도둑이 될 거요. 예전 사심관들이 모두 큰 도둑들이었기에 제도를 없앤 것인.. 2023. 12. 9. 편조왕사 신돈 이야기 / 제10장 왕의 배신과 좌절 (사진 : 운주사 와불) 제10장 왕의 배신과 좌절(2) * 국학 재건과 왕자 모니노 상면 공민왕 17년 영전을 다른 터인 마암에 짓고 있었을 때 신돈과 임박이 공사 현장에 간 적이 있었다. 그러다 태후의 명으로 공사를 중단한 마암은 개경 동북쪽으로 그 근처에 퇴락한 국학(성균관)이 있었다. 주) 국학: 고려 초기, ‘국자감’을 고친 이름으로 ‘성균관’이라고도 함. 신돈을 따라 그곳에 간 임박이 뜻밖의 말을 했다. “저곳이 성균관인데 너무 퇴락하였습니다. 고쳐 지어서 유생들을 모아 교육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첨의에 대한 유생들의 민심도 얻을 것입니다.” 그 말에 그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개혁 세력이 미미하였는데 국학을 일으켜 유학자 출신 신진사대부 조정 중신들을 자신의 세력권에 끌어들인다면 더욱 .. 2023. 11. 24. 편조왕사 신돈 이야기 / 제10장 왕의 배신과 좌절(1) 편조왕사 신돈 이야기 / 제10장 왕의 배신과 좌절(1) * 영전건축으로 생긴 간극(間隙) 공민왕은 왕비 노국공주의 무덤인 정릉과 위패를 봉안한 혼전(魂殿)인 인희전(仁熙殿)을 지어 추모했는데 또 죽은 왕비를 잊지 못해 영상을 모실 영전(影殿)을 송악산 왕륜사 동남편에 짓기로 하였다. 처음 영전 건축을 명하기는 전민변정도감이 설치된 해인 15년(1365) 5월의 일이었다. 왕륜사는 919년 창건한 송도 10찰 중 하나였다. 공민왕 19년(1370)에는 왕륜사에 왕이 신돈과 함께 행차하였던 일이 있었다. 그때 부처님의 치(齒)사리와 얼마 전 편조와 혜근스님의 스승이었던 지공선사가 입적하였는데 다비한 선사의 유골(두골)이 송도에 도착하였기 때문이었다. 치사리와 선사의 유골을 친견하는 승려들이 많이 모인 큰 .. 2023. 11. 11. 이전 1 2 3 4 5 6 ··· 17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