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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전과 함께

소설100

편조왕사 신돈 이야기 / 제9장 전민변정도감과 민생개혁(4) 편조왕사 신돈 이야기 / 제9장 전민변정도감과 민생개혁(4) * 송강의 새집과 탄핵과 암살 위기 송강 새집에 입주한 신돈에게는 좋은 일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왕이 직접 와서 축하잔치를 벌이고 별채 “문수암”에 찾아와 함께 예불을 올리며 무한한 신뢰를 여러 조정 중신들에게 표시한 것이 널리 알려졌다. 에는 문수암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제법 긍정적인 기술을 하였다. “또 북쪽 뜰에 여러 겹문이 딸린 깊고 그윽한 별실을 지어놓고 밝은 창 아래 깨끗한 안석을 깔고서 향을 피우고 홀로 앉아 있었는데 그 엄숙한 모습이 아무런 욕심이 없는 사람 같았다.” 그러나 고급 가구나 장식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으니 소박한 분위기였던 모양이다. 아침이면 찬성사 이춘부와 밀직 김란이 송강 집에 와서 조반을 함께 들면서 어제 일.. 2023. 10. 26.
편조왕사 신돈 이야기 / 제9장 전민변정도감과 민생개혁(3) 편조왕사 신돈 이야기 / 제9장 전민변정도감과 민생개혁(3) * 용암산 낙산사와 평양 천도 관가나 민간에 퍼진 소문대로 노비나 천민 출신이라 알려진 스님이 어느 날 갑자기 정권 중심부의 우두머리를 차지한 데 대한 반감이 조정에 널리 퍼졌다. 전민변정도감의 과감한 판결과 처결로 많은 사대부나 권세 잡은 호족이 토지를 잃게 되었거나 농사를 지을 노비를 방면하게 되었으니 그들의 원성이 이존오와 정추 등의 신돈에 대한 탄핵으로 반영된 것이었다, 이존오와 정추의 일이 있고 난 후부터 이로인해 신돈의 횡포가 더욱 심해져서 조정 중신들과 대간들이 모두 신돈에게 아부하는 바람에 언로가 막혀 버렸다고 는 기술하고 있다. 여전히 거센 반대 세력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올해 풍년이 들었습니다.‘ 하는 말을 공민왕 15.. 2023. 9. 28.
편조왕사 신돈 이야기 / 제9장 전민변정도감과 민생개혁(2) 편조왕사 신돈 이야기 / 제9장 전민변정도감과 민생개혁(2) * 백성의 환호와 세족의 반발 신돈은 격일로 도감에 출근해 쟁송 처결을 했다. 이인임과 이춘부 등 처결 실무를 맡은 관리들은 천민들의 소송을 직접 듣고 판결했다. 벼슬아치나 명문 거족들은 전전긍긍하며 자진해서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스스로 고치려는 자보다 숨기고 버티어보자는 가문도 많았다. 그러니 토지를 돌려받지 못한 원 지주나 억울하게 노비가 된 자들이 주인이 포고령을 무시하며 모르는 척하자 고발장이나 소장을 들고 전민변정도감으로 찾아와 호소하였다. 에는 변정도감의 처결이 백성들에게는 환영을 받아 ‘온 나라가 기뻐했다.“고 진실에 가까운 긍정적인 평가를 하였다. ― 令出, 權豪多以所奪田民還其主, 中外忻然. ― 명령이 발표되자 권세가와 부호들 .. 2023. 9. 15.
편조왕사 신돈 이야기/ 제9장 전민변정도감과 민생개혁(1) 제9장 전민변정도감과 민생개혁(1) * 전민변정도감 쟁송과 처결 신돈은 천명지민본이란 지론을 이루기 위해 공민왕 15년(1365)에 세운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은 그야말로 백성을 위한 민생개혁 기관이었다. 전민(田民)은 논밭과 백성을 지칭하고 있으며 변정은 옳고 그름을 참되고 거짓됨을 조사 판정하여 불법과 부정을 바로잡는 기관이란 뜻이니 전민을 불법으로 탈취한 권력자들에게는 청천벽력이요 백성들에게는 반갑고 좋은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도감이란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설치되었던 임시기관들의 명칭이었다. “전하께서 즉위한 이후 개혁에 착수하면서 논밭과 양민의 탈점을 시정하기 위한 도감을 설치하였지요.” 신돈의 말에 찬성사 이인임이 긍정했다. 같이 앉았던 찬성사(나중에는 시중) 이춘부도 고개를 끄덕이며 알.. 2023. 8. 25.
창녕신문 보도 / 창녕 출신 "신돈(편조)" 개혁가 다시 재평가 시작한다 창녕신문 2023년 8월 16일자 보도 / 창녕 출신 "신돈(편조)" 개혁가 다시 재평가 시작한다 김현우 장편소설 출판에 따른 보도 2023. 8. 23.
편조왕사 신돈 이야기 / 제8장 편조왕사 신돈의 개혁(4) 제8장 편조왕사 신돈의 개혁(4) * 봉선사 송강의 집 화엄종사 천희국사 신돈은 드디어 자신의 집을 지었다. 공민왕 16년(1367) 왕사가 된 지 2년 후였다. 기현의 집에 기숙(요즘 말로 하면 하숙)하면서 궁을 오갔는데 봉선사 송강(:솔밭언덕)을 지나다녔다. 송강에는 왕이 자주 다니는 격구장이 있었다. 좀 떨어진 서남쪽에 집터로 쓸만한 빈터가 있었다. “전하! 기현의 집에서 다니다 보니 마침 좋은 집터를 보았습니다. 거기에 작은 집을 지으면 노복이 왕래하기에 편할 듯하오니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아! 첨의가 집이 없어 이곳저곳을 다니며 몸을 눕혔으니 과인도 마음이 썩 안 좋았소. 당장 과인이 허락할 터이니 집을 지으시오.” 그런데 신돈의 집 짓기에 대해 《고려사》에는 좀 억지소리가 있다. 집을 짓.. 2023. 8. 4.